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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4 | 문화현장 [문화현장]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영화 <지슬> 오멸 감독 - 관객과의 대화
임주아 기자(2013-04-05 11:59:47)

이날 상영관은 시작 30분전부터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지슬> 때문이었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는 미국 최대 독립영화 축제인 선댄스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대상을 수상하고,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을 하는 등 주목을 받아온 화제의 작품. 영화가 끝난 후 숨죽이고 있던 관객들은 오멸 감독이 등장하자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먹먹함이 가시지 않아 보였지만 묻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았다. “어느날 생각해보니 이 많고 많은 색채가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운을 뗀 감독은 <지슬>을 흑백으로 찍은 이유에 대해 “제주도 하면 아름다운 풍광만 생각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슬픔을 이야기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어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의도하고 찍은 영화라 색은 배제했다”고 덧붙였다. 신위(神位) 신묘(神廟) 음복(飮福) 소지(燒紙) 네 개 덩어리로 구성된 <지슬>은 ‘영혼을 모셔 앉혀 머물게 하고 그들이 남긴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영원을 드리는’ 이야기다. “4.3사건은 제주의 아주 평범했던 보통사람들이 죽어간 이야기인 만큼 제주의 방식대로 풀고 싶었다”고 말하는 감독. 제주의 방식이란 그의 선배 고 김경률 감독이 4.3사건 영화를 찍을 당시의 방식을 말한다. “제주에서 십여 편의 단편을 찍고 <끝나지 않은 세월>이라는 4.3사건을 다룬 영화를 만드신 분인데 완성하고 1년 만에 돌아가셨어요. 첫 장편영화였는데 잘 안됐습니다. 저는 이 분이 또 하나의 4.3사건 희생자라고 생각했어요. 제주도 사람들은 그런 부담이 몸에 쌓여있어요. 영화가 주는 의무와 책임이 그만큼 컸던 겁니다.”빚을 갚고 싶었다는 감독은 “제주도민들에게 후원금을 받고 제주출신의 평범한 사람을 배우로 쓴 것도 다 선배가 했던 방식이었다”며 “그렇게 해야 우리도 숙제를 완성하고 그 그늘을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슬>에 <끝나지 않은 세월2> 제목을 붙이고 총제작지휘자에 그의 이름을 올린 것도 그 마음에서였다고 했다. “영화를 찍는 내내 위에서 계속 누군가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되겠다 싶었는데 한번에 오케이 난 장면이 유독 많았지요.” 감독은 제주도민이 이 영화에 갖는 기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4.3사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도 많고, 이렇게 전국적인 관심은 처음인지라 모두 기대하고 있습니다. 의무와 책임감을 느끼고요. 그래서 GV나 인터뷰도 더 열심히 하고 다닙니다.” <지슬>은 배급 방식도 특별하다. 일부 지역 독립영화협회에 배급권을 나눠주고 단체와 개인에게 신청서를 받아 ‘공동체상영’을 시도한 것. 공동체 상영은 독립영화의 새로운 배급통로로, 영화관이 없는 지역을 찾아가거나 혹은 영화를 보기 어려운 관객을 대상으로 상영하는 형태를 말한다. 말하자면‘찾아가는 영화관’인 셈. 동호회나 학교, 단체 등 공동체 단위로 영화 상영을 의뢰하면 소정의 상영료를 받고 찾아가서 영화를 상영해 준다. 전북독립영화협회에서도 배급권을 위임받아 공동체 상영을 진행 중에 있다. <지슬>이 찬사를 받는 이유는 제주에서 나고 자라 이해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오기 힘들다는 판단이 드는 몇몇 선물 같은 장면 때문이 아닐까. <지슬>에는 근간의 역사영화들이 보여준 억지 교훈이나 거대담론이 없고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강요가 없다. 사랑이란 주고받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임을 알려주는 영화. 당분간 <지슬>의 인기는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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