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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 | 문화현장 [문화현장]
혼불, 그 아름다운 불길
임주아 기자(2013-01-04 15:06:31)

어쩌지 못한 불길에 사로잡혀 쓴 소설이 남은 이들에게 다시 불길이 된 이야기. 지난달 17일 최명희문학관과 KBS 전주방송총국 가 마련한 송년특집 낭독콘서트가 최명희 문학관에서 열렸다. ‘최명희와 나, 그리고 혼불’을 주제로 다시 혼불을 기억한 네 사람. 작가와 함께 대학시절을 보낸 시인 진동규, 전 문화해설사 황영순, 수필가이자 혼불 연구자인 이진숙, 올해 혼불학생문학상 수상자이자 작가의 기전여고 후배인 김태희 학생이 특별손님으로 무대에 섰다.

진동규 시인은 대학시절 최명희 작가의 모습을 ‘활발하고 똑부러진 후배’로 기억했다. 그는 “지금은 애석하게도 그 동네 이름이 없어졌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전주시의 화원동이다”로 시작하는 작가의 수필 ‘기억은 저마다 한 채 씩의 집을 짓는다’를 읽었다. 이 수필은 동문사거리 근처 어디쯤 있었을 작가의 첫 집에 관한 이야기. 진동규 시인은 “수필을 읽을 때면 명희가 항상 우리 옆에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매일 밤 눈물을 닦으며 읽었다는 소설 <혼불>. 그녀가 가져온 혼불 책은 이미 누렇게 바랬다. 포스트잇도 빽빽하게 붙어있다. “동네사람들이 물으면 설명해주려고 중요한 장면마다 붙여놓았어요. 덕분에 <혼불>팬이 많이 늘어났죠!” 그녀는 마치 작가 앞에 선 것처럼 뺨이 발그레했다. 전 문화해설사 황영순 씨. <혼불>의 서도역 부분을 낭송한 그녀는 “<혼불>엔 우리 전통음식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며 손수 집에서 만들어 왔다는 구절판을 관객들에게 맛보이기도 했다.

“최명희 선생님 별명 아시는 분 있나요?”

사회를 본 전주KBS 박명원 아나운서가 객석에 묻자 세 번째 손님으로 단상 의자에 앉아있던 김태희 학생이 관객들에게 얼른 일러준다. “‘공포의 자주색’이요!” 당시 기전여고 교복이 자주색이었는데, 학창시절 백일장을 하도 휩쓸어 생긴 작가의 별명이라고 말한다. 자주색 교복만 지나가면 “최명희다!”하며 문청들이 술렁거렸다고 덧붙이면서. 김태희 학생은 <혼불> 중 사투리 부분을 사회자와 함께 읽었다. 사회자의 어설픈 사투리와 김태희 학생의 능숙한 사투리가 잘 어울렸다. 대신 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공포의 하늘색(바뀐 셔츠색)이 되고 싶어요!” 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어린 후배를, 작가는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하님과 대반은 술상 위에 놓여 있는 표주박 잔을 챙긴다. 세 번째 술잔은 표주박인 것이다. 원래 한 통이었던 것을 둘로 나눈, 작고 앙징스러운 표주박의 손잡이에는 명주실 타래가 묶여 길게 드리워져 있다. 신랑 쪽에는 푸른 실, 신부 쪽에는 붉은 실이다. 그것은 가다가, 서로 그 끝을 정교하게 풀로 이어 붙여서 마치 한 타래 같았다. 이제 이렇게 각기 다른 꼬타리의 실끝이 서로 만나 이어져 하나로 되었듯이, 두 사람도 한 몸을 이루었으니, 부디부디 한 평생 변치 말고 살라는 뜻이리라.”

마지막 손님인 혼블전문가 이진숙 씨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청사초롱’ 대목을 읽어 내려가자 관객들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청사초롱’은 전통 혼례의 절차가 매우 세세하고 아름답게 묘사돼 <혼불>의 백미로 꼽히는 부분. 책이 절판 돼 청량리 헌책방에서 한 권 한 권 모아 읽었다는 이 씨는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다”는 작가의 말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근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17년 동안 눈과 발로 취재하고 손으로 눌러 써내려간 소설 <혼불>이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는 그녀에게서 혼불의 불길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 혼불>뿐만 아니라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수필들을 만날 수 있어 뜻깊었던 낭독회. 생전 인연이 모두 닿은 건 아니지만 똑같이 혼불을 나누어받았고, 접어둔 귀퉁이와 줄그은 문장은 다르지만 마음속엔 고루 바람이 분 탓이다. “아름다운 세상, 잘 살다 갑니다.” 작가의 마지막 말이 다시 기억나는 계절. 매년 12월 11일, 건지산 중턱엔 흰 국화꽃이 핀다. 눈송이처럼 소복소복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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