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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 | 문화현장
[문화이슈] 민중서관 경원동 본점 폐점
관리자(2011-03-04 18:29:12)

민중서관 경원동 본점 폐점 이제 민중서관 사거리에는 민중서관이 없다 - 황재근 기자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지역의 한서점은 거리의 이름을 남겼다. 비록 공식적인 기록에 남는 지명은 아니지만 전주시민이라면 누구나 관통로 사거리를 일컬어 자연스럽게‘민중서관 사거리’라고 불러왔다. 1970년 개점해 올해까지 41년 동안 전주 도심 한복판의 영욕을 지켜본 민중서관. 


대표적인 지역서점 중 하나인 민중서관이 지난 2월을 끝으로 40여년 역사를 이어온 본점의 문을 닫았다. 전주 한복판, 역사와 추억의 장소 민중서관이 처음 문을 연 것은 지난 1969년. 1대 조정자 대표가 서점을 열었다. 서점의 이름은 자신이 다니던 출판사의 이름을 그대로 딴 민중서관이라고 정했다. 1980년, 기존 서점 자리에 다시 신축건물을 지어 확장하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1992년, 현재의 강준호(53) 대표가 서점을 이어받아 운영해왔다.강대표는“오래전부터 폐점을 고민했지만 관통로 사거리에 자리 잡은 민중서관의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문을 닫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누적된적자를 견딜 수 없어 작년 말 폐점을 결정했다”고 밝혔다.폐점이 그 누구보다 서운한 사람은 강대표 본인이다. 


젊은 나이에 민중서관을인수해 20여 년간 청춘을 바친 곳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는“책이나 서점과는아무런 관련도 없는 회사에 다니다 인수제의를 받고 고민을 많이 했다. 식당이나술집이었으면 맡지 않았을 테지만 책을 파는 일이어서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처음에는 주위에서 신뢰를 받지도 못했다. 같은 업계에서는 그저‘바지사장’노릇을 할 청년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 달, 직접 책을 사서 지고 나르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친 후에서야 업계는 그를 신임했다. 비로소 민중서관 대표로 인정을 받은 것도 그 이후였다.관통로 한 복판에 자리 잡은 민중서관은 역사적 공간의 역할도 해왔다. 80년대는 대표적인 가두집회 장소로 최루탄 연기가 가실 날이 없었고, 2002년에는거리응원의 인파들이 넘실대기도 했다. 


호출기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에는 약속장소로도 인기가 높았다. “지금도 객지로 나간 독자들 중에는 전화로 민중서관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지 묻는 분들이 많다”고 소개한 강대표는“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담긴 장소여서 이 자리만은 꼭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은 문을 닫게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인터넷, 대형서점에 밀려나는 향토서점 민중서관의 폐점은 경영악화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각종 시청각미디어의 보급 등으로 독서량이 줄어든데다가 2000년대 들어와서부터는출판시장에서 인터넷 서점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더 많은 독자들을 빼앗겼다. 결정적으로 지난 2006년 인근 고사동에 교보문고가 들어서면서 수익이 크게 악화됐다.


민중서관 경원동 본점 폐점으로 인해 이제는 과거 전주 시내권의 3개 대형 향토서점(홍지서림, 민중서관, 대한문고)중 홍지서림만 남게됐다.강대표는“폐점 소식이 전해지면서 굉장히 많은 분들이 찾아와 아쉬움을 전하셨다. 평소 더 자주 이용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들도 하셨다.하지만 애국심, 애향심만으로 장사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걸 잘알고 있기 때문에 더 나은 영업전략과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해 독자들의 사랑을 이어가지 못한 점이 죄송하다”고 말했다.민중서관은 앞으로 평화동과 서신동 지점에서 향토서점의 맥을 이어갈 예정이다. 경원동 본점을 가득 채웠던 20만 여권의 서적은 반품되거나 지점으로 옮겨진 상태이다.현재 위치에는 다른 점포가 들어서게 된다.이제 민중서관 사거리에는 민중서관이 없다. 시간이 흐르면 그곳에서점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힐지 모른다. 하지만 민중서관과 함께 세월을 보낸 시민들은, 옛 지명을 부르는 어르신들처럼 꽤 오랫동안 그곳을민중서관 사거리라 부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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