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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 | 문화현장 [국가대표 브레이킹 팀, 라스트포원]
전주에서 세계로 간 길거리의 춤꾼들
신동하(2022-06-10 13:42:01)


전주에서 세계로 간 길거리의 춤꾼들




형형색색의 화려한 조명과 빠르고 경쾌한 음악에 브레이크 댄서들이 현란하게 몸을 움직인다. 지난 5월 14일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서 제15회 전주비보이그랑프리가 열렸다. 대회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덕분에 국내 최정상급 춤꾼들이 전주시민들과 직접 만나 소통하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언택트로 진행됐던 지난 회의 경험을 밑거름 삼아 무대를 직접 관람할 수 없는 팬들을 위해 온라인 유튜브 생중계로 무대의 열기를 전하기도 했다.


우승 상금인 1,000만 원은 ‘베이스 어스 크루(BASE US CREW)’의 손으로 돌아갔다. 2등을 차지한 ‘레퍼젠 코리아(REPRESENT KOREA)’에는 상금 400만 원과 상패가, 공동 3위를 차지한 ‘플라톤크루(PLATON CREW)와 ’소울번즈(SOUL BURNZ)’에는 각각 200만 원의 상금과 상패가 수여됐다.


이날 대회를 주관한 라스트포원 조성국 대표는 “3년 만에 진행되는 오프라인 행사이다 보니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했다”고 전하며, “코로나19로 놀거리, 볼거리가 많이 사라진 상태에서 열린 유명 가수와 댄서가 참여하는 큰 행사여서 사람들의 반응이 유난히 더 뜨거웠다”고 덧붙였다.


길거리에서 공연장으로, 그리고 올림픽 무대로
브레이킹이란 ‘브레이크 비트에 맞추어 추는 춤’을 의미한다. 원래는 ‘비보잉’이란 단어를 더 많이 사용했으나, 현재는 더욱 성 중립적인 의미의 단어인 브레이킹, 혹은 브레이크 댄스로 표기하고 있다. ‘브레이크 비트’는 정확한 4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다른 EDM 장르들과는 달리 당김음이 많은 드럼을 특징으로 한다.

 ‘브레이크 비트’가 이러한 형태를 가지게 된 데에는 또 다른 흑인 문화인 ‘소울’과 ‘펑크’가 있다. 소울의 대가이자 펑크의 창시자인 ‘제임스 브라운’은 화려한 테크닉을 뽐내기 위해 여러 대의 드럼을 각각 다른 리듬으로 연주하게 했다. 이런 식으로 잘게 쪼개진 리듬은 한 마디 안에서도 다양한 박자를 만들 수 있어 랩을 하거나 춤을 추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초기 힙합 디제이인 쿨헉이 음악에서 보컬이 쉬고 반주만 나오는 구간인 브레이크(break)만을 추출하여 이어 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탄생한 음악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었고, 이는 브레이크 댄스의 시작이 된다.



브레이크 댄스는 201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청소년 하계올림픽을 시작으로, 2022년 항저우 아시안 게임과 2024년 개최되는 파리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뉴욕 브롱크스의 골목에서 클럽에 출입할 수 없던 청소년들이 모여 추던 춤이 젊은 세대의 정서를 대표하는 주류문화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황량한 길거리에서 공연장으로, 그리고 다시 올림픽 무대로 이어지는 브레이크 댄스의 삼단 진화는 점점 높아지는 스트리트 문화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한국을 대표하는 브레이킹 팀, 라스트포원
브레이크 댄스는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 현진영과 같은 1세대 아이돌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한국에 알려졌다. 그리고 2000년대 초, 교통과 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을 발판 삼아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한국의 브레이크 댄서들은 세계무대를 배경으로 경쟁했고, 많은 배틀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하며 한국을 브레이크 댄스 강국으로 만들었다. 2005년 독일의 ‘배틀 오브 더 이어(Battle of the Year)’에서 우승하면서 최고의 비보이팀이 된 ‘라스트포원’도 그들 중 하나다.


‘라스트포원’은 2002년 최고의 춤꾼을 꿈꾸는 전주의 청년들이 모여 만들어졌고, 더 많은 기회를 찾아 2005년 활동지를 서울로 옮겼다. 동시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플래닛 비보이’가 인기를 끌어, 전속 기획사가 생겼고 기업체가 지정 후원에 나서면서 월급을 받으며 맘껏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9년 전속 기획사가 파산하면서 연습실을 잃고 생계조차 어려워지자 더 이상 팀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를 맞게 됐다.


또다시 큰 시련이 라스트포원을 기다렸다. 코로나19로 공연시장이 얼어붙은 것이다. 그러나 라스트포원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예술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라스트포원은 법인을 설립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자기 계발과 대회 연습에 매진했다. 그 덕분에 비대면 대회에 출전하여 뜻깊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엔데믹을 코앞에 둔 지금. 라스트포원은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그 시작은 신인 브레이크 댄서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댄서 씬에 사람이 많아지고 있지만, 브레이킹의 경우 그렇지 않아요. 브레이킹의 전성기를 함께한 댄서들이 브레이킹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고령화되고 있어요. 마침 라스트포원의 20주년을 기념해서 스튜디오를 새로 오픈했습니다. 그곳에서 지역에서 유명한 선수들을 양성하고 싶습니다.” 


글 신동하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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