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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1 | 연재 [문화저널]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
하우봉․전북대 사학과 교수(2004-01-29 16:43:26)


1.
서울-천진-북경-심양을 거쳐 7월 27일 중국의 동북쪽 끝인 길림성 연길시에 도착하였다. 우리를 실고온 50인승 프로펠라기가 연길공항에 착륙하자 활주로에는 다른 비행기가 하나도 없었고 한적하여 마치 시골역에 온 것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공항 청사에 한글간판이 나오자 왈칵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중간에 초가집이 보이기도 해 한국의 어느 시골에 온 것처럼 푸근하였다. 연길시는 조선족자치주의 수도격인 도시로 인구는 25만명 정도라고 한다. 남원시 정도의 규모에 시내풍경을 보면 20,30년전의 우리나라 모습에 가까웠다. 시내의 중심가에는 새로운 서구식 건물들이 있었지만 전통적인 옛 거리 모습도 많이 남아 있었다. 특히 연변자치주 청사와 연길시 청사를 비롯하여 관공서건물이 모두 기와집으로 되어 있었고, 한글간판이 한자와 병기되어 있었다.
해방후 46년이 지난 지금 남북한 모두 전통문화가 상당히 많이 변형 내지 변질 되었다고 하는데 비해 이곳 연변지역에는 전통적인 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은 인류학등을 연구하는 이에게는 보고라고 불리어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곳은 단군조선의 옛터로서 우리민족의 요람지이며, 근대에 와서는 독립운동의 성지이자 민족고난의 한 상징이기도 하다. 소중히 보호되어야 할 곳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연변지역과 여기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삶은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만큼 그 유래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현재 중국내에 있는 조선족 동포는 200만명 정도라고 한다. 이는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12번째 많은 숫자이다. 거주분포를 보면 대부분(약 88%)이 이른바 동북삼성(東北三省;吉林省, 黑龍江省, 遼寧省으로 옛 만주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길림성에 110만, 흑룡강성에 45만, 요녕성에 20만 정도가 모여 살고 있으며, 그 밖에 내몽고자치구에 2만명, 북경시에 8천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길림성은 쉽게 이야기해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의 옛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지역은 동쪽으로는 소련, 남쪽으로는 북한과 국경을 접해 있는데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520km 국경선이 맞닿아 있다. 최근 ‘두만강 특구’로 불리면서 신문지상에 나오는 곳도 바로 이 지역인데, 중국․소련․북한․한국이 다 관련되면서 국제무역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실제 연변자치주의 소재지인 연길시는 1985년 ‘갑급(甲級)개방도서’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현재의 연길시는 경공업 중심의 신흥도시로서 ‘개방도시’적인 면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조선족동포들이 중국에 거주하게 된 유래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반강제적 이주정책 때문이었다. 또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나간 이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만주지역에 모인 조선족 동포들은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중 가장 활발하게 투쟁하였다. ‘선구자’의 고향 용정시를 비롯하여 곳곳에 독립운동의 유적지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1919년 3월 13일 해외에서의 최초의 독립운동인 3․13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연길시의 국자로(局子路)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우리를 맞이하였다.
이 곳이 ‘자치주(自治州:중국에는 소수민족을 위해 5大自治區와 31개의 자치주가 있다)로 된 연혁을 보면, 1945년 8월 소련 홍군과 동북항일연합군이 간도 임시정부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이후 중국 공산당정권은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설립하였고, 3년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격시켰다. 그 뒤로도 조선족 동포들이 이 지역에 계속 모여들자 확장되어, 현재 조선족자치주는 연길․도문․돈화․용정․훈춘의 5개 시와 안도․화룡․왕청의 3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자치주안에는 대게 조선족이 전체주민의 40%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연길․도문․용정․훈춘시 등은 동포들이 60%나 된다고 한다.
내가 둘러본 곳은 연길시와 도문, 용정시 정도인데 전체적으로 보아 이들 도시는 무론 북경․천진․심양과 같은 대도시보다는 못하지만 주민들의 복장과 표정을 상당히 밝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 중국내 조선족동포들의 경제․문화․교육정도가 중국의 한족(韓族)보다 높으며, 다른 소수민족보다는 훨씬 우수하다고 한다. 문맹율이 평균치보다 3배 가량 낮고, 정신노동 취업인구도 중국 평균치보다 4,5배 가량 높다는 통계를 보았다.
세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로 조선 족은 교육열이 유난히 높아 고등교육기관 진학률이 중국내에서 제일이라고 한다. 인구 25만의 연길시에 연변대학교를 비롯해 4년제 대학이 5개나 되었다. 연변대학교는 1949년에 세워진 이래 조선족동포들의 최고고등교육기관으로서 동포들의 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현재 9개학부에 학생수가 1,500여명 정도 되는데, 조선족이 65%(교직원의 경우 77%)를 차지하는 ‘민족대학’이다. 부설연구소로는 민족연구소와 조선문제연구소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모두 중국내 소수민족문제와 남북한문제를 비롯한 통일문제를 주된 연구과제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특히 최근 중국이 개방되고 남북한문제가 국제적 관심사과 됨에 따라 연변대학은 남한과 북한의 학술적 교류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나름대로 충실히 하고 있다. 이번 여름만 하더라도 연변대학은 남북한 학자가 같이 참여하는 많은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비록 규모는 작지만 ‘국제적인 대학’으로 성장하고 있는 듯하였다.
조선족 동포들은 이와같이 거의 모든 면에서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중 으뜸이었고, 한족보다 높았다. 이들은 또한 중국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아래 언어를 비롯한 전통문화와 관습을 잘 보존하며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최소한 제도적으로, 또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차별을 받지 않고 살고 있었다. 이 점은 일본에서 재일동포들이 처한 여건과 그들이 받는 차별과 고통에 비교해 볼 때 확연히 다른점이라고 느껴졌다. 자신만만하게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는 조선족동포들을 보면서 국내에서 외래어를 자랑스럽게 쓰고, 꼬마들이 쓰는 물건에까지도 외래어로 된 상표를 꼭 붙이는 우리, 국민학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치자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새삼 부끄럽게 느껴졌다.
공식적인 학회일정보다 하루전에 도착한 우리들은 이튿날 오전 북한과의 접경지역인 도문시를 구경하러 갔다. 연길에서 도문시까지는 버스로 한시간 거리였다. 가는 도중 넓은 고원지대에 펼쳐진 옥수수밭과 드문드문한 마을에 초가집, 또 기와지붕의 곡선을 한 벽돌집들의 모양이 인상적이었다. 벽돌집에는 석탄을 뗀다고 하는데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지방인 만큼 방마다 굴뚝이 하나씩 있었다. 도문시의 남쪽 끝에 내려가니 중조(中韓)국경선이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다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장마로 인해 수량이 불었지만 두만강은 생각보다 크지않았다. 100미터쯤 되는 다리너머가 바로 북한의 남양시였다. 다리 건너에는 김일성의 초상화가 크게 그려져 있는 선전판이 있었고, 망원경으로 보니 아파트에는 빨래를 너는 아낙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였다. 국경치고는 경계가 완만하였고, 분위기도 평화롭고 한산하였다.
잠시후 도문공원으로 가자 마침 조선족동포 할머니 20여명이 소풍을 나와 점심식하를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인사를 하고 함께 어울려 도시락과 막걸리(그들은 甘酒라고 불렀는데 우리의 동동주에 가까웠다)를 맛있게 얻어 먹었다. 밥과 반찬도 푸짐한데다가 자꾸 더 먹으라고 권하는 바람에 오히려 곤란할 정도였다. 아마 함경도식이라고 여겨지는데 세로로 길레 쭉쭉 찢어놓은 김치와 큼직큼직하게 썰어 젓갈에 찍어먹도록 되어있는 가지나물들이 아주 맛있었다. 식당에서 사먹어 본 냉면도 담백하고 국물맛이 아주 좋았다. 대체로 식생활에 있어서 양적인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여졌다. 11억이 넘는 인구를 굶기지 않고 다 먹여살리는 것은 현 중국사회주의 정권의 공로라고 할 만하였다. 비록 현재 중국의 경제적 수준이 세계적으로 볼 때 낙후되었지만 평균적으로 일반인민들이 고르게 살며 식생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점은 중국의 기나긴 역사상 흔하지 않은 예이다. 그 가운데서도 노인복지가 잘 되어 있다고 동포할머니들이 자랑하였다. 특히 연변자치주에서는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들 답게 1985년 ‘연변노인절(8월 15일)’을 명절로 지정하여 노인들을 위해 다채로운 행사를 한다고 한다.
식사후 이들은 카셋트와 북을 반주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모두 흰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똑같이 차려 입고 즐거운 모습으로 춤을 추었는데 춤사위가 대단한 수준이었다. 일행중에는 춤선생이 있었고, 지도위원도 있었는데 상당히 조직적으로 춤을 배우며, 소풍도 일년에 네 번씩 간다고 하였다. 예부터 ‘고구려인들은 춤과 노래를 즐겼다’하고 하였는데, ‘과연’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조선족이라고 하면 중국에서 가장 옷을 잘 입고 노래와 춤을 잘하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한다. 이곳 도문을 통해서 중국의 조선족들은 비교적 자유스럽게 북한을 방문하며, 북한에서도 연변에 친족이 있을 경우 15일간의 휴가를 받아 친족방문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단지 중국에서 북한에 가는 경우에 비해 숫자는 훨씬 적다고 하였다. 이들의 잦은 방문으로 인해 함경북도 회령시는 북한 주민과 조선족동포들간에 교역이 활발해 ‘북한의 홍콩’으로 불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도문공원에서 북한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멀리 굴에서 초록색 기차가 나왔다. 옆에 있는 동포아주머니에 의하면 청진으로 가는 객차라고 하였다. 망원경을 통해서 보니 열차 난간에 사람들이 매달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온몸을 휩싸는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스럽고 중국에서 조선인으로 사는 것이 실생활에 있어서는 불편함이 없어 보였지만 이들에게도 고민과 어려움은 없지 않다.
그 하나는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제로서 민족과 국가의 이질상, 민족으로서의 동질성 보존에 대한 불안이다.
현재 중국은 소수민족에 대해 우대정책을 쓰고 있다. 예컨대 인구문제에 있어서도 중국인의 경우 자녀를 하나밖에 둘 수 없는 대신 조선족의 경우 두 사람까지 낳을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대학이나 관공서등에도 일정 비율은 소수민족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보장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 동포들은 앞으로의 장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 중국인이면 평생 중국인(一時國人 一世中國人)이라는 말이 있듯이 중국의 그 무서운 동화력과 문화력, 혼인에 의한 자연적 결합 등에 의해 결국 우리도 중국인으로 되고 말지 않겠느냐라고 우려하였다. 실제 자치주의 대부분의 기관에 있어서 장(長)은 조선족에게 주더라도 부장(副長)은 반드시 한족(韓族)으로 임명하는데 실권은 그 한족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또 연변의 경우만 하더라도 계속 한족을 이주시켜 자치주가 조선족 일색이 되는 것을 정책적으로 막는다고 하였다.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가장 포용적인 듯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실권을 제한하고 실질적인 동화정책을 써나간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국의 분단으로 인한 갈등이다.
몇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연변은 북한의 영향력이 강해서 이에 관해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70년대 이후 북한의 경제력이 쇠퇴하는 대신, 1988년 올림픽의 영향과 90년 아시아경기 대회이후 남한쪽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자 이곳에서도 상당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남한쪽의 문화가 물밀 듯이 이곳에 밀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서울말을 배우는 것이 유행이고, 복장도 서울의 패션이 그대로 모방되고 있으며(실제 이곳 백화점의 옷은 대부분 남대문시장에서 사온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도 대부분 한국의 대중가요였다. 이러한 경향과 함께 남,북한에 대한 기존인식에 큰 혼란이 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일본․소련에서와 같이 교포사회가 이분화되는 양상까지 보인다고 한다. 물론 북한과 붙어있는 지리적 여건이나 중국과 북한의 정치적 관계, 동포들의 출신지역(고향)등으로 볼 때 소련과는 사정이 다르지만 상당한 동요가 있는 것은 사실처럼 보였다. 학회중의 토론과정에서도 느낀 이이지만 젊은이들일수로 우경화(사회주의에서의 이탈)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연변대학교의 한 연구원은 실학사랑과 주체사상의 관련성, 주체사상을 남한에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여부를 물었고,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인 최모씨는 심지어 나에게 마르크스의 사회발전 5단계설을 믿느냐고(구체적으로 자본주의 다음에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진행하느냐)묻기까지 하였다.
한편 남한의 자본주의문화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먼저 상륙하는 것도 이들에게는 근심거리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무도청(舞蹈廳)의 청소년들의 모습, 가라오케바의 성행, 개체호(個體戶)영업자유와 이후 파생된 빈부격차 문제와 건강한 생활기풍의 파괴, 과소비 풍조의 만연등이 이미 사회문제화되고 있었다. 또 한국관광객들에 대한 바가지요금을 보면서 우리가 뿌린 씨앗이거니 하면서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 동포의 경우 남북한 등거리정책(?)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좀처럼(거의 절대적으로) 어느 한쪽을 편드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 점은 남북한의 인사들을 접촉하면서 체득한 지혜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빈궁한 북한의 실정에 대한 동정심 내지 연대감 때문이라고도 여겨졌다. 그러나 조국통일에 관한 한 실로 간절하고 진지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번 소장학자 국제학술토론회를 보면서 국제고려학회도 그렇지만 특히 중국에 있는 우리동포들의 노력이 가상하다고 느껴졌다. 연변대학 민족문제 연구소 소장인 박창욱씨는 ‘남북한 학자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하였다. 대회진행과정에서 성심성의를 다하는 이들의 노력과 자세에는 고개가 수그러들 정도이고, 그만큼 조국통일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볼 때 중국내 동포들의 태도와 자세 수준등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다. 논문의 주제선택에 있어서 모두 현실성이 있었고, 토론회에서 보인 그들의 성실한 태도에도 감명을 받았다. 북한측 학자들의 논문들이 구체성이 결여된 선언적 성격의 글이 많았는데 비해, 중국내 동포학자들의 논문은 상당한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귀국후 최근의 소련사태를 보면서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멀지 않은 장래에 중국에서도 소련처럼 큰 변화가 일어나서 대만이 완전 독립국가임을 선포하고, 내몽고․서장(티베트)․신강의 3대 자치구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 각각 독립해 나간다. 이어 연변과 같은 유력한 소수민족들의 자치주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마침내 중국정부는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이에 연변자치주에서는 주민들의 투표에 의해 독립할 것을 결의하고 나아가 통일조국으로 편입할 것을 요구한다. 이래서 단군조선의 터이자 옛 고구려의 땅 일부나마 우리의 영토로 회복하고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은 장백산이라는 낯선 이름을 떨치고 본명을 되찾아 완전히 우리의 산이된다.
그 때쯤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암. 당연히 통일되어 있어야 하겠지. 이미 그 때는 통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직후의 그 엄청난 혼란도 대부분 극복되고 그야말로 하나의 민족, 하나의 나라로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져 있겠지. 통일조국의 그 힘과 따뜻함으로 백년도 넘게 그 추운 만주벌판에서 고생한 우리의 동포를 힘껏 껴안아 주겠지. 아! 그 때가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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