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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1 | 연재 [문화가 정보]
신흥종교의 현장을 찾아증산교 -김제군 금산면 백운동 마을-
문화저널(2004-01-29 16:36:44)

전주에서 금산사 가는 버스를 타고 달리다 보면 서편으로 어머니의 픔과 같은 넉넉한 사자락이 다가온다. 누구나 편하게 받아주는 산, 금만 넓은 뜰이 이 산자락을 타고 내리어 더욱 풍요로운 산이다. 산의 이름 또한 구실에 맞게 모악산(母岳山)이라 부른다.
반 시간쯤 주변을 살피며 가노라면 산중턱으로 허술한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시골 경치를 감상하며 지나는 사람들에겐 그저 여느 산골마을로 보이리라. 사람이 땅에 뿌리내리고 터를 잡은 곳이면 어디나 사연이 깃들어 있듯이 이 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백운동이라 한다. 산 중턱에 자리한 이 마을을 굳이 말하는 이유는 입지에 있어서 마을터로서는 불리하다는 점이다. 백운동 주민의 삶은 앞으로 이야기 할 종교, 증산교와 떼어 놓고는 성립될 수가 없기에 지금과 같은 마을이 들어선 것이다.
우리가 증산교라 하는 이 신앙은 1901년 강일순 선생이 모악산 대원사에서 도를 깨닫고 세운 종교로서, 반외세․반봉건을 외친 동학혁명이 외세와 봉건세력에 의해 무위로 끝나고 일제 식민정책이 더해가는 사회적 암울기에 빈부격차와 생사차별이 없는 후천개벽 사상은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어, 현재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신흥종교로 자리 잡았는데 선생의 호[甑山]를 따서 통상 “증산교”라 한다.
강일순은 1871년 고부군 이평면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힘을 쏟았고, 이십대에 유․불․선의 여러책과 음양․술서 등을 탐독하고, 당시에 사회변혁에 큰 흐름이었던 동학에 입교하여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종교적 이상이 사회변혁 힘으로 발전함을 체험하였다. 증산은 동학혁명에 종군하였음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싸움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은 듯하고, 결국 동학의 패배를 체험하였다. 이후에 증산은 동학에 대신할 새로운 종교를 모색하게 되었고 수 년동안 전국을 돌며 구도를 하던 중 충청남도 사람 김경소에게서 태을주(太乙呪)를 얻고, 김일부에게서 정역(正易)이론을 전수받고, 마침내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도를 하던 중 9일 만에 도를 얻게 되었다. 도를 깨친 증산은 병자를 낫게하고, 후천세계를 여는 天地公事를 한다하여 특히 동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많은 신자를 얻었다.
증산은 스스로를 “구천상제(九天上帝)로 있다가 말세가 되어 마케오리치가 세상을 구원해주길 청원하여 인간세상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던 중 동양의 정세가 급하고, 특히 한국의 정세가 더욱 위태하여 모악산 금산사의 미륵불에 들어 있다가 동학교주 최제우에게 신권을 주어 다스리라 했으나 만족치 아니하여 스스로가 인간으로 태어나 현세의 안간을 구제하기 위해 필요한 천지의 운도(運道)를 뜯어 고치는 천지공사(天地公私)로 말세를 개벽한다”라 하였다. 여기에서 증산은 스스로를 구천상제의 화신이며, 동학 교주 최제우의 재생이요, 미륵불의 출세라 하였다. 특히 증산은 죽기 전에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 미륵전으로 오라”하였다 한다. 이러한 말은 증산교리가 유․불․선과 동․서학․음양․풍수․술수 등을 통일 시킨 복합적인 것으로, 증산사후에 여러종파로 분립하는 밑바팅이 되기도 한다.
증산이 천지공사를 시작한지 9년만인 1909년(39세) 8월 9일 (음 6월 24일)에 갑자기 사망하여 신도들이 잠시 실망하였지만, 1911년 증산의 제2부인 고씨가 증산의 영이 내렸다 하여 새로이 교파를 형성하여 태을교(太乙敎)라 하였다. 태을교 성립 이후에 증산의 혈연과 제자들이 각 교파를 형성하여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해방전에는 40여개, 해방 후 80여 교파를 형성하였고, 이 가운데 보천교(普天敎)의 경우 신도수가 100만명을 넘나 들었다 한다.
증산은 세상을 선천․말세․후천으로 나누고, 선천의 시대는 이미 끝나고 후천의 세계가 도래 한다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후천의 세계를 이끌어 갈 중심지가 모악산이라는 점이다. 풍수․도참적 영향을 받은 증산은 후천세계는 음의 세계로, 모악산이 음의 기운을 지닌 산으로 보아 후천개벽의 조화 정부가 들어설 자리라 믿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금산면의 모악산 밑에서 시작하였고 지금에 와서도 모악산 일대에 증산교 여러분파가 모여 있다.
필자가 찾은 백운동은 증산 제자였던 안내성이 증산 죽은 후에 고씨 부인을 섬기다가 분립하여 전남여수에서 태을교라 하여 포교를 하다 1927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해방 후 6․25내전을 겪으면서 사회적 혼란기에 사제 담배와 모악산 일대의 금광에 종사하여 제법 규모있는 마을이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글머리에서 언급했듯이 경제적 부양력의 한계와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어감에 따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으며, 거주민의 대부분은 증산을 신봉하여 양잠을 주로 하여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백운동을 찾아 증산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인간의 큰 장점이자 단점인 환경에의 적응을 생각해보고, 사회 변혁의 계속적인 동학과 증산신앙이 우리터전에서 발원하여 이 땅이 주체임을 내세웠고, 교조의 죽음이 지향점 종착이 아니었듯이 먼저 우리 마음 깊숙이를 체념의 따이 아닌 후천세계 중심지로 갈아 놓으면 어떨까 하여 청도리 골짜기를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길손을 맞이하는 감꽃을 뒤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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