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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바친 날들
이병천(2004-01-29 15:36:51)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바친 날들
이병천

한번은 그가 어느 학교의 자모회에 초청돼 강연을 한 적이있다. 당시에 그는 전라북도청의 청소년 계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측의 배려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우리말과 언어사용에 대한 평소의 생각과 주장들을 피력했다고 한다. 자모회의 회원들은 대부분의 도회지 학교가 그렇듯 이른바 고등교육을 마친, 생활의 여유가 있는 주부들이었다. 그런데 강연이 끝나고난 뒤 몇몇 사람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무슨 그렇게도 「촌(村) 말」을 해대는 사람을 강사로 초빙했느냐고 하더란다. 그 얘기를 전해 들으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그게 1977년의 일이었고, 박준하! 그는 그때부터 우리말의 아름답고 풍부한 형용사 사전을 편찬하기로 결심하였다. 올 여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출간된 형용사 사전은 그의 14년 각고의 노력이 그렇게 맺은 결실이었다. 그것도 전문가 아닌 행정공무원의 손에 의한-.
지난 1940년 무주에서 출생했다고 하니 박준하씨는 올해로 쉰하나, 그러나 우리말과 관련된 어릴때의 기억하나가 그에게는 잊혀지지 않는다. 한번은 그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빨리 오셔서 진지 잡수세요.」 밥상을 이미 마련됐는데, 그리고 어린 그는 때도 때인지라 배가 몹시도 고팠던 모양인데, 우리들의 아버지 세대가 흔히 그러하듯 그의 부친도 하던 일을 마저 끝맺음하시느라 아마도 조금쯤, 부러 밥상에는 얼른 다가오지 않으셨던 것이리라. 어쨌든 어린 그의 말은 문법적으로 또는 공경법으로는 조금도 탓할게 없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의 응대는 전혀 뜻밖이었다. 「이놈! 말버릇이 아주 고약하고나. 어서 매를 들고와서 종아리 걷어!」 그는 결코 영문을 알 수 없는데도 매를 맞았다. 그리고 나서 무엇이 말버릇을 고약하게 했는지를 울먹이며 항변했다. 그때 그 부친의 가르침은 이러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 또한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말의 공경어법에는 단순히, 어미(語尾)나 조사의 표현 차이 일뿐 아니라 어휘자체도 분명히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놈! 어른에게 도대체 빨리라는 말을 어떻게 쓸 수 있느냐! 그런 표현은 같은 동년배나 아랫사람에게나 써야 할 말이 아니더냐?」
얼마전, 신문에서 읽은 귀절인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웃어른에게 흔히 인사로 말한다고 한다. 「수고하십시오」라고-. 그러나 이런 인사법은 불경스럽다고 한다. 수고라는 말로 굳이 인사를 하고 싶다면 언제나 이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그럼 이놈아, 수고해라!」말하자면 그런 표현의 하나일 것인데 그와 같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부터 그는 우리말의 다양함이며 아름다움에 눈뜨고, 비록 공사다망한 공무원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오늘 14년의 끈질긴 집념으로 형용사 사전을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형용사 사전에는 모두 만3천여 단어가 수록돼 있다. 보통의 우리말 큰사전을 샅샅이 뒤져본다고 하더라도 기껏 오륙천개의 단어밖에 건져 올릴 수 없음을 염두해 둔다면 그 방대한 양에 우선 놀랄 것이다. 하나라도 더, 거칠고 험하고 바쁜 세상에서 형용사가 사라져 가기 전에 붙잡아 두어야겠다는 일념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리고 이 과정에서도 그의 사명감은 저 어린 시절의 한 귀띔에서 더욱 스스로를 다지게 했으니, 중학교때 한번은 학교 교사들을 상대로 했던 어떤 국어학자의 강연을 우연히 엿들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는 그때 자기 반의 실장이었는데 담임 선생의 심부름으로 그것에 들렀던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하나 그 국어학자는 그때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말중에 붉다는 뜻의 형용사만 도대체 몇 개나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놀라지 마세요. 무려 백삼십여개에 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불고 열서너 개의 낱말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인지, 지금부터 백삼십여개의 낱말들을 모두 찾아보자고 했던 것인지 생각은 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공중에 떠도는 말들을 붙들어매던 그의 각고 속으로 그 얘기는 언제나 화두(話頭)처럼 다가왔으리라고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실제로 그의 사전 속에는 붉다는 뜻의 형용사가, 紅은 제외하고 赤의 의미만 88개나 수록돼 있다고 전한다 마찬가지로 검다는 뜻의 동의어는 45개!
그러나 사실은 어릴적 한두어가지의 경험에 언제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말하자면 프로이드의 학설, 유아기의 욕망과 꿈이 그 후의 삶을 지배한다는 논리는 타당성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즉시 여러 사회적이고 환경 적인 요소들도 절반의 변인(變因)을 지닌다고 수정되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가 굳이 남들이 생각지 않는 형용사 사전을 비전문가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만들려고 했던 이유는 다른데서 찾아져야할 것 같다. 그리고 결과부터 먼저 얘기하자면 이 부분에 대한 그의 고백은 그의 삶이, 세상살이가 어떤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게 바로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형용사 사전을 편찬하기 직전, 그는 또 하나의 방대한 원고가 이미 완성돼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 속담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그가 찾은 속담들은 무려 5천여개의 것으로 그 뜻과 동의어들을 한데 모은 것이었다. 그러나 책의 출간을 서두르던 어느 날 문득 그는 서점에서 이미 누군가에 의해 속담사전이 출간돼 있음을 알았다. 그때 그는 비록 아쉽기는 하나 자기의 작업이 출세나 돈을 위한 방편은 아니었기에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잠시 짚고 넘어가야할 얘기가 있으니 그 누군가의 작업과는 상관없이 박준하씨의 작업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아직 세상에 잉태되지 않은 그의 원고들에는 그가 밤잠을 아껴 흘린 담과 힘씀과 진통들이 독특한 생명으로 이미 눈떠 있을 것이지 때문이다.
우리 것에 대한 그의 의문과 관심은 거기서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는 전주 도립국악원 판소리 1기생으로 일찍 판소리와 인연을 맺은 뒤 이제는 그 정리 작업들을 이미 시작하기도 했다. 하나는 판소리 고법(鼓法)에 관한 연구, 그리고 또 한 부문이 판소리 사설에 대한 연구라고 한다. 그 뿐만은 물론 아니다. 우연히 한 성씨(姓氏)의 관향에 대해 의문을 품게된 이후 그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하여 우리나라 성씨와 이미 탈고를 앞두고 있다. 그의 얘지명에 관한 내용의 원고도 지금 기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성씨는 대략 3백여라고 하는데 그가 조사한 자료는 모두 백여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 할 만 하다.
이 모든 일들은 그에게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관심과 의문이니, 모름지기 누구나 그러한 미덕을 갖출 일이다. 한번은 우연히 TV드라마를 보다가 옛 유생들이 유건(儒巾)을 쓴 모습을 주목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잘 아는 대로 그것은 검은 배로 만들어져 있어 한쪽으로 숙여지게 돼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앞쪽으로 숙여지도록 연기자들이 쓰고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향교를 찾아가 묻고 옛 문헌을 뒤져 그게 틀렸음을 알았다. 물론 아주 희귀한 예로 어떤 문중에서는 반대의 경우로 쓰는 일이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는 담당 프로듀서에게 정중하게 그 사실을 알렸는데 더없이 고마워하더라고 했다. 그런 며칠 후, 그 드라마에서는 옳게 유건을 쓴 선비의 모습이 크로즈업되어서는 30초 가량이나 방송되더라는 것이다.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바른 우리의 복식문화를 깊이 머리에 남아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누군지 모르는 한사람에게는 사과와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의 이러한 생활 자세는 그의 아들에게도 고스란히 유전된 모양인데 한번은 역시 TV드라마를 보고있던 아들이 지적해내더라는 것이다.
「아버지! 빨리 오셔서 TV좀 보세요」
우리 세대는 아무래도 검증없이, 급한 마음으로 빨리라고 쉽게 말해버릴 것이다. 어찌됐든 아들이 가리키는 화면에서는 한 아낙네가 시계바늘 방향으로 부지런히 맷돌을 골고 있었다고 한다.
박준하씨는, 말세에 이르러서는 우리네 인간의 감정과 언어가 조급해지고 바빠진다는 얘기를 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는 형용사가 사라져 가는 언어권일수록 말세를 향해 치닫는 셈이 될 것이다. 감정이 메마르고 따뜻한 감성의 피가 자꾸 밭아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단순한 이 앞 문장에서 형용사를 무려 세 개씩이나 사용했음을 유념해 주기 바란다. 그러나 하여튼, 그의 믿음에 의하면 세상이란 언제든 구즉반(舊卽返)! 곧, 오래 되면 뒤집어진다는 것이다. 구즉반의 실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거니와 그의 예를 그대로 따르자면 필자에게도 있던 경험이다. 어린 시절 모시옷이 부끄럽고 싫어서 버린 지 불과 30년, 이제 모시적삼이 얼마나 그립고 부러워지는지-. 그런 이치로 우리는 지금 말세에 이르러 형용사를 버려가고 있으나 언젠가는 틀림없이 울면서 사라져갔던 그 말들을 우리가 다시 찾게 되리라는 것이니, 아아, 구즉반! 박준하씨는 자신의 형용사 사저니 그때의 징검다리로 놓였으면 한다고 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그는 우리 사투리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비록 대학 출신의 자모회로부터 촌말이라고 빈정거림을 받았으나 사투리는 결코 방언이라고 무시해야할 언어가 아니라 향토어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믿는다. 만약 이 명제에 거부하는 향토인이 있다면 우리는 다함께 불행해질 것이다.
반도가 그나마 둘로 나뉜 땅에서 공무원의 신분으로 엮어진 형용사 사전은 여러모로 눈물 겹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다 밝히기란 오히려 사족과 같다. 여기서는 일화 한가지만을 부언하기로 하거니 필자는 남의 비밀을 폭로하면서 쾌감도 적지 않게 느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열정의 한 상징일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84년 10월부터 장기근속수당을 한 달에 8만원씩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월급 봉투를 고쳐 가정에는 여태껏 비밀로 하고 그걸로 자기 작업을 계속해온다고 했다. 말로써 말많은 사람들이여! 이 경우, 그래도 아내에게 얘기해야 한다커니 아니다 그렇지 않다커니 입씨름하는 일은 의미 없다. 다만 그 열정의 작업은 그렇듯이 세상의 평판과는 관심 없이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봄에 씨뿌려 한 여름 내내 혼자 땀흘리고 가을에 접어들어 수확하고 방아찧은 쌀을 들고와 마지막 단계, 뉘를 고르고 컴퓨터에 입력하여 밥을 지은 공동저자 김병선 교수와 나란히 밥을 나누어 먹는 모습은 보기에 아름답다.
전주 관통로변의 작은 찻집 「하나된 세상」에서 그를 만난 게 저녁7시, 그의 얘기가 다 끝난 시각은 꼭 10시였다. 미안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일어서던 그가 메모지에 이런 글을 써주었다. 홍운타월(烘雲打月)! 이 말은 무슨 수건회사의 상표가 아니라, 구름을 그려놓고 그 위에 슬쩍 달하나를 올려놓는다는 말이다. 옛적 화공 한 사람이 닷새에 걸쳐 그림을 그리는데 무려 나흘 밤과 낮과 다시 한나절을 구름 그리기에만 매달리더라는 것이다. 지우고 다시 그렸다가 화선지를 구겨버리고, 그렇게 힘들게 구름 그리기를 마친 다음 마지막으로 우주 손쉽게,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달을 그려놓았던 것인데 보는 사람마다 꼭 얘기하더란다.
「아따! 그 달 참 멋지게 그렸다.」
말하자면 박준하씨는 세시간 동안이나 힘들여 구름을 그려놓고 일어서면서 아주 간단하게 달을 그려주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그 달을 일러 결론(結論)이라고 부른다. 어쨌거나 그가 그려준 달은 평범하게도 논어 첫 구절에 있다고 하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유붕자원방래면 불역낙호아!
인부지이불온이면 불역군자호아!
허나 이 새김에 어찌 교훈이 있으리오. 스스로 깨치고 새겨가는데에 기쁨이 있으리니, 팔자 또한 무엇을 가필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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