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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문화 산책/ 글쓰기의 어려움
박남준(2004-01-29 15:30:24)


어려운 시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산다는 그 자체가 힘겹고 어렵지 않은 것 없지만 글을 쓴다는 일도 참으로 어렵고 곤고한 일 중 하나다. 10여년전 일이다. 그 무렵 한 것 치기만만한 문학청년시절, 누구의 작품이 어떻고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느니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거리 집에 모여 서로의 어줍지 않은, 알량한 문학관으로 열변을 토해가던 날들이 있었다.
이 글은 십여년전의 여름 내가 거의 무전걸식이 유랑과도 같은 제주도여생을 다녀와서 써보았던 글인데 이사를 자주 다니던 짐뭉치 속에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지껏 없어지지 않고 남아 오늘의 이야기 감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글을 여기에 싣는 이유는 글이 잘 쓰여져서도 아니요, 내용이 별다른 것이 어서도 더욱 아니다. 공자는 사내장부 나이 이십이면 입지요, 삼십이면 이립이라 했다. 내가 문학에 뜻을 둔 입지의 나이에 썼던 지금 다시 보니 부끄러운 글이지만 혹여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빛 바랜 원고뭉치 그 글의 서두에 나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이번 제주도 여행으로 결정을 보았으면 한다. 잊어버리든지, 아니면, 아! 잊을 수 없어도 할 수 없다. 목구멍으로 아직 소리가 걸려있다. 토할수만 있다면, 써지지 않는 소리가 이제 나는 싫다. 싫다.

방황의 끝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찾아야 해
그만 끝을 내려야해. 패배하여 구석에 몰리고 스스로 선택한 위선의 행동 그 자체의 관조, 의식의 흐름과 패배 속에서 비참과 절망이 무엇이었거나 육신은 헐떡이며 배설을 혐오하고 웃고 술마시며 절망하는 것일까! 언제 그 끝은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찾을 수 있을까!
막차를 타고 이제 바람나라에 가는 길입니다. 목포에서 물길로 반나절을 다 걸려 아직도 끝나지 않는 섬들의 긴 행렬에 긴 지루함을 느끼는 삼등여객선의 갑판. 바다 바람에 벌써 얼굴은 찝질한 소금기가 끈적입니다. 파도는 뱃전으로 새파랗게 부서지더니 하얀 거품을 연기처럼 풀었다가는 숨어버리고 또 부서지고, 나는 이번 여행으로 이제껏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이 하나둘 서슴없이 표면화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고 그것들은 정작 내가서야 할 곳에 서게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만 너무 쉽게 결정을 보려는 욕심에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중학시절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 부터 나는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고는 했었지요. 세상사람들을 모두 깜짝 놀라게 할 그런 글을 써야지. 꼭 쓰고 말아야지.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을 일이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엉망이었습니다. 시작의 처음부터가 그것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디오니소스의 힘을 빌리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 술을 마시며 이제 술을 마시는 일이 부끄러워 술을 마신다는 어린왕자속의 이름 모를 별에 사는 주정뱅이가 생각납니다. 아! 무엇이 되겠는가?
칠월의 태양아래 그늘도 없는 갑판 끝 난간에 기대어 잠이 들어있습니다. 회오리 바람이 보입니다. 바람은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파도를 재촉하고 함부로 갑판을 쓸어내고 있습니다. 외마딧 소리는 곧 바람에 묻혀버리고 몇 번이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을 아스라이 들었습니다.
여기가 어딜까? 아아 전설 속에서만 있어야 할 땅, 악이 없고 혼란이 없고 위선이 없는 그것은 영원의 땅. 이상의 나라. 여기가 그곳이라니, 이 땅에 내가 오게 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아직도 심장이 뛰고 있는지 가슴으로 두 손을 가져갔다. 틍틍- 긴장된 소리가 그만 무거운 정적을 깨듯 긴 여운의 음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그것은 목적지가 가까웠음을 알리는 뱃고동소리, 그만 잠이 깨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꿈이었습니다.
뱃길로 한 날을 다 걸려온 멀리 안개 속으로 바람나라가 보입니다.
해발 1200미터를 알리는 지석을 지나서부터 천천히 안개를 내뿜는 한라산을 벌써 무거워하며 밟고 있습니다. 산중턱까지 돌아있는 2차선 포장도로 위로 이따금 택시들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그때마다 유리창 너머로 편안히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눈길을 맞추었습니다.
벗겨진 채로 죽어 넘어진 나무와 돌과 아열대 식물 그리고 안개너머로 비를 뿌리는 한라산의 정물. 언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과 서로들 아는 사람들처럼 한 두 마디 인사를 주고받는다. “수고하십니다 그려. 아, 예 수고하십시오” 천근 만근 몸이 무거워 온다. 기계처럼 한발한발 발을 떼어놓고 문득 등이 서늘하여 뒤돌아보면 무심코 지나온 길이 난간도 없는 까마득한 절벽의 비탈이었습니다.
힘이…더 지탱할 힘이 내겐 없다.
더 올라 갈 수 없다.
난 이제 주저앉아야 한다. 주저앉아야 한다. 그 이상한 꿈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사람이 보고싶다. 아무도 와줄 수 없다. 이곳까지는. 두 개피 남은 담배가 흐믈 거리며 땅바닥에 떨어 졌을 때부터 비바람은 온 한라산을 흔들어 놓기라도 할 것처럼 소리를 내고 있다. 아니 울고 있다.
산을 올라오기 전날 폭포수를 맞는 내 몸 둘레에 무지개가 겹으로 걸려 있던 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때 매미는 폭포수 속으로 몸을 던지며 떨어지고 번쩍이는 날개로 다시 날아올라 또 몸을 던지다가 죽어갔을까? 무엇을 원하면서 무엇을 찾았을까? 단지 생리적 본능 뿐이었을까? 아니면….
비릿한 정액 냄새가 뒹구는 남제주의 어느 어두운 방. 파리하게 다 죽은 입술을 가진 뭍에서 왔다는 늙은 창녀가 생각납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을 거라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모르겠다 모를 일이다. 이제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는다. 내가 찾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서야할 곳은 어디란 말인가?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란 말인가? 결국 짜여진 운명의 대본에 의한 그래서 거쳐야할, 방황해야 할 형식이 내용들인가? 그렇다면 형식은 무엇이며 내용은 무엇인가 아직도 내용이 있고 형식이 있다는 말인가? 어지럽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바람소리가 저리도록 떨려오고 영실의 절벽너머로 안개가 갈라지며 부시도록 내 눈으로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아! 저곳은 그림처럼 저곳은 바로….
발 밑으로 바람을 느끼기 시작하며 내 몸은 긴 선을 그리며 힘없이 안개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안개가 덮이고 알지 못할 사람 몇이 선홍색으로 물들어 버린 무척 낯익은 한사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아득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 중 한사람은 몹시 슬픈 눈을 하고 있었지만 의미의 부여를 잃어버린 무슨 절망이라도 하는 것일까? 죽음의, 위선의, 그러나 이제 그 끝은 내려진 것일까? 난 아직도 의심하고 있구나. 아! 심화로 이어지지 않는 무감각 속의 나를 본다.
바로 이와 같은 글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써야한다는 치기 만만한 그 시절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고통,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날들의 시간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며 번민 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러한 때 쓰여진 정말 보잘것없는 글입니다. 그리고 이 글이 쓰여지던 무렵 이청준의 “이어도”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소설을 읽은 직후여서 인지 이 짧은 글에서나마 그러한 분위기를 흉내 내보려 했다는 생각을 오늘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 참으로 가당치 않은 헛 웃음이 나옵니다.
나는 부끄러운 이러한 나의 젊은 날의 편린들을 보기를 그만두고 낡은 사진첩과 이제는 멀고 오랜 멋들이 보내온 편지꾸러미를 한장한장 펼쳐들며 추억에 잠겼습니다.
밖은 지금 밤비가 한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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