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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 | 연재 [문화저널]
갑오동학농민전쟁 시민강좌를 듣고 /내 안에서 부활하는 갑오농민 전쟁
장춘실(2004-01-29 15:24:54)

“지난 여름은 위대하였다.”라고 노래한 시인은 누구였던가.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임과 고민으로 가족들의 웃음거리가 된 내가 문화저널에서 마련한 첫 번째 시민강좌 「갑오 농민 전쟁의 현재적 의미」에 수강신청을 한 일은 사실 위대한(?) 결단이 되고 말았다.
90년 겨울 우연히 만난 쬐그만 잡지 ‘문화저널’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나의 무지를 자책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 화려한 표지와 광고뿐인 잡지의 홍수 속에서 얇지만-결코 빈약하지 않은-속 찬 내용이 지난 호를 다시 찾아 읽을 만큼 짭짤했던 것이다.
저번 20회 백제기행에 참여한 경험 또한 책을 만들고 꾸려 가는 이들에 대해 신뢰와 기대를 갖게 했고, 이 잡지가 표방하고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주는 기회가 되었다.
장마비가 오락가락하는 칠월의 끝에 시작된 시민강좌는 “갑오동학 농민전쟁 백주년을 분비하자.”는 청유문의 주제대로, 우리 전북인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는 행사였다.
주최측은 우선 여덟 항목으로 분류한 소주제와 열여섯시간에 걸친 빡빡한 강의로 수강생의 마음과 몸을 묶어 놓았다. 그러더니 아흐레째 끝날 에는 전문가를 안내자로 모신 전적지 답사까지 실시, 철저한 현장교육으로 강좌를 마감했다. 더구나 남의 속내도 모르면서 이런 무거운 숙제를 맡겨 수강생의 학습성취도를 점수 매기려 더는 것이었다. 덕택에 무관심으로 형편없던 나의 농민전쟁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일대 수정과 변혁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30년 전 교과서에서 배웠던 동학난의 수준에서 갑오 농민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1894년 갑오 농민 전쟁!
이것은 열강의 세력다툼과 봉건 지배세력이 최대 희생자인 이 땅의 농민들의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벅찬 몸부림이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일이나 하고 군말 없이 땅이나 파먹는 줄 알았던 무지랭이 농투산이들이 반외세 반봉건을 들고 일어선 것이다.
하루 이틀 떠들다 호령 한마디에 쑥 들어가는 우발 적인 일이 아니요, 성질 급한 놈 몇이 나서서 분탕질치고 달아나는 일시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백여년전 전라도 땅 고부에서 발화하여 충청, 경상, 황해...전국을 저항과 개혁의 불길로 태운 농민전쟁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찾고 얻어내 오늘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 이루어야 할 것인가?
침침한 불빛아래 곰팡내가 짙은 소극장의 객석에서 나는 휴가대신 선택한 학습의 본전을 톡톡히 뽑아 보기로 작정했다. 엄마 없는 저녁식사가 싫다고 떼쓰는 아이들에게 중요한 공부하러 나간다고 큰소리를 쳐놓았으니 열심히 배워야만 했다.
갑오년 농민들이 봉기하게된 사회적 요인과 경제적 배경, 봉건 지주와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했던 호남지방의 참상을 설명한 첫 강좌부터 나의 무지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사학을 전공한 전문 교수들의 강의는 동학에 대해 품었던 편견을 무너뜨리고 오류를 바로 잡아 주었다. 남접과 북접의 차이점, 농민군을 이끈 전봉준의 사상과 입장에 대해서도 시원스레 알게 돼 농민전쟁의 성격을 이해하고 전체를 조망하는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차분한 어조와 객관적 태도로 일관한 신순철님은 강의 역시 우리들의 눈치와 맞아 떨어졌다. 학자답게 참고도서를 밝히고 사발통문으로 시작된 고부민란이 탐학의 대명사 조병갑을 축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듬해 4월 무장봉기로 이어진 원인도 구체적이었다. 이 일이 모순과 압제에 항거,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열망의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강좌는 점점 역사의 광맥을 더듬어 제 골로 찾아 들었다. 관군을 대파하고 승승장구하던 전봉준의 농민군이 내쳐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주화약을 맺은 후 집강소를 설치, 폐정개혁 단행의 역사적 의미로 결론을 맺을 쯤에는 심각한 회의와 부끄러움으로 내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짓밟히고 억눌린 자가 어디 그 날의 농민군뿐이며,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고 제 백성 위한 다면서도 부정을 일삼는 일신의 영달과 이권에 눈 먼 이 나라의 벼슬아치는 꼭 조병갑 하나뿐이던가?
오늘의 농민군은 어디 있어 무엇을 바라며, 개혁해야될 폐정은 과연 전무하단 말인가?
「1894년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 규정을 둘러싼 제 문제」를 논한 이윤갑님의 강좌는 이런 회의와 자괴를 얼마간 풀어 주었다.
봉건 지배세력의 편에서 규정한「동학난」이 종교적 입장을 강화한「동학혁명」으로, 다시 8․15해방이후 식민사관의 극복과 조선 사회의 내재적 발전을 확인하게 된 학자들에 의해 「갑오 농민전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설명은 역사인식의 흐름과 변천을 극명히 보여주었다.
특별한 인상과 많은 생각을 남긴 이 강의는 역사해석에 대한 어떤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동안의 강의 내용이 체계를 세워 정리되면서 오늘의 삶과 연결, 선명한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80년 5월부터 81년 가을, 전국의 교육공무원을 계도라는 미명하에 대 국민 정부 홍보요원으로 내몰던 시절의 얘기이다. 물색 모르고 순종이 미덕이었던 풋내기 교사의 수치가 되살아나고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탕 길을 이삼십리씩 걸어가 학부형을 붙들고 이러쿵 저러쿵 앵무새 노릇한 일이 떠올라 아찔해진 것이다.
열심히 가르치는 것만으로 교사의 책임을 다했다 할 수 있을까? 공무원 신분이니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은 과연 면죄부가 될 수 있는가?
무지와 무관심은 죄악이다.
외면과 침묵도 역시 죄악이었다.
뼈아픈 반성과 가슴 두근거리는 가운데 남은 강좌에 더욱 마음을 쏟았다.
문순태, 송기숙 님의 시간은 문학적 입장과 농민전쟁을 보는 시각, 평가와 더불어 당신 작품의 해설을 들을 수 있어, 평소 독자로서 쌓였던 궁금증과 기대를 만족스레 채울 수 있었다.
귀설지 않은 남도 사투리로 사정없이 풀어놓은 說에 매료된 나는 전봉준 휘하의 농민군이 되어 고부에서 백산으로 배들평에서 황톳재로 고함지르고 뜀박질 했다.
말목장터의 열기와 죽창 하나로 지키려던 그들의 삶을 더듬어 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어떤 자리 누구 앞이든 나의 생각과 입장을 분명히 밝힌 후 예기를 시작한다.”는 송선생님의 말씀은 마음 안쪽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이 땅 한 구석지에서 시작돼 우리 근세사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된 갑오농민전쟁.
집강소의 개혁내용과 그 결과를 강의하신 이이화 선생님은 우리들의 자긍심과 오기를 일깨우고, 역사의 참뜻을 발견해야 할 책임의식을 역설하였다.
역사를 보는 자신이 눈뜸과 인식이 전환이야말로 반민족 반민주의 틀을 깨부수는 첫 걸음 이라는 원론을 확인한 종합토론은 「어떻게 백주년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버거운 과제를 남겼다. 학계 언론계 문화 예술 각 분야에서 선도하는 자주적, 의도적인 시도가 이뤄지고 관심과 조명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단순한 희망사항에 그치고 말 것인지 기대와 우려 속에서 지켜보고자 한다.
새롭게 연구되고 파헤쳐지고 있다는 농민전쟁.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연구논문이 발표되었으나 아직 명칭마저 통일되지 못했노라면 강사진의 실토는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우리의 의식수준을 대변하는 것 같다.
오히려, 제 고장 전북은 무심 조용하기만 한데, 타 곳과 외국에서는 학자들이 관심과 연구가 활발하단다. 전봉준의 무덤마저 확인되지 못했고, 농민군의 후손들은 성씨를 감춘 채 흩어져 자료수집이 어려운 안타까운 실정인데, 태인의 피향정 뜰에는 조병갑의 아비의 선정비가 남아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백년이 채 못된 역사적 사실이 이다지도 희미해지고 망실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농민전쟁의 근원이 된 만석보!
드넓은 배들평 한가운데를 가로 흐르는 강물은 말이 없었다. 무심한 팔월의 폭양은 뜨겁기만 한데 안내 교수의 설명을 꼼꼼히 받아 적는 나어린 학생들을 보면서 다소나마 위로를 받았다.
짱짱한 강의로 텅 빈 머리를 채워주신 강사선생님들, 자신들의 짝사랑에 보답한 0.01%도 채 안되는 시민강좌 수강생들을 보듬고 끝내 버티어준 문화 저널에 감사한다.
끝으로 주최측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몇 마디 사족으로 수강 중에 느낀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하고 싶다.
시민강좌의 성격상 처음부터 지나친 욕심을 부린 점이다. 전문적인 주제만 다뤄 마음이 있던 이들도 겁을 먹고 포기하지 않았을까? 우수한 강사진, 수준 높은 내용도 좋으나 동기유발이 미흡했다. 강좌 일정을 길게 잡은 점도 무리수였다. 6시30분부터 8시30분이라는 시간상의 어중띰보다 연속 2주8일을 개근해야 하는 부담도 작은 일이 아니었다.
하필 휴가철을 선별한 것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이곳저곳에서 찾아든 친지와 졸라대는 아이들 등쌀에 무슨 수로 집에서만 버텨내겠는가. 덧붙이자면 이처럼 좋은 기획에 50만 전주시민이 구름처럼 오시지 않을까 너무 믿어서(이것은 발행인의 고백이었다.)앉아서 기다린 듯한 낙관적인 홍보자세를 꼬집고 싶다.
아무리 잘 차려도 소문이 나야 잔치가 되는 법인데......
「갑오농민전쟁의 현재적 의미」는 두고두고 나의 생활 가운데 되작거려 볼 것임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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