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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8 | 연재 [문화저널]
여름날의 단상
윤덕향 · 발행인(2004-01-29 15:08:44)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면 절로 한숨이 나오고 땀방울이 등을 따라 물줄기를 이루곤 한다. 금년이라고 별다른 방안이 없고 보면 지루하게 이어지는 장마비가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니면서도 지루한 장마의 끈끈한 더위가 온몸을 짜증으로 뒤범벅하는 날들이었다. 이제 그 장마의 뒤끝 불볕더위가 삼복으로 이어져 위세를 떨치는 요즘은 어디 시원한 나라로 피서여행을 가는 공상속으로 억지로 밤잠을 청하곤한다. 이런 날이면 한줌 바람이라도 얻어볼까하여 가능한한 벗어붙이고 집앞에라도 나서고 싶지만 체면 때문에 크지 않은 집안을 맴돌 수 밖에 없다. 아예 여름이면 잠시 체면을 차리지 않기로 모두가 약속이라도 하였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정말 과감하게도 체면을 무시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주변에 점점 많아지고 있어 한가닥의 희망을 걸게도 한다. 백주대로상을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거니는 숙녀님이 있는가 하면 승용차 차창으로 발을 내놓고 달리는 점잖은 신사분도 있다. 여름옷 사이로 드러난 여인네의 멋진 몸매는 한순간 더위를 가시게라도 하지만, 에어콘을 아끼느라 차창에 발을 올린 신사분의 열정적인 행동에는 분노 비슷한 더위를 느끼게 한다. 행여 누군가 그분에게 시비르 건다면 아마도 “남이야...”하는 핀잔을 얻어 듣기에 십상이다. 인간이 더불어 사는 사람이라서 인간이라는 것을 무시한다면 그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민주국가의 선량한 시민이라고 믿으며 살 것이니 말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도처에서 무더운 짜증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 아니 차라리 짜증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시피 하다. 더위를 피한답시고 큰 맘먹고 마련한 피서 여행은 처음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짜증의 연속이며 그 불쾌감은 여행을 마친 다음에도 며칠동안 꼬리를 문다. 마땅한 시설이 없으니 곳곳에 쓰레기를 쌓아두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애궂은 병을 조각조각 깨뜨려 모래사장이건 계곡에 널어 놓은 것은 차라리 깡패들의 폭행에 다름아니다. 여름한철 벌어서 1년을 먹고 살아야 된다는 소상인의 바가지는 차라리 애교스럽다. 상한 음식을 가져다 주며 먹으려면 먹고 말려면 말되 돈은 내라는 강압적인 종업원의 태도는 서비스란 말을 떠나서 한 점 인정도 없다. 피서지가 온통 자신의 것인양 나대는 사람들의 모양도 볼상사납고, 시민의 편의를 외면하는 관리원들의 오불관언한 거만은 역겹기 그지 없다. 이러니 차라리 집구석에서 세수대야에 물떠다놓고 발담그는 방법으로 버티는 것이 마음 편할 듯도 하나 이 또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조상님 제사는 거르더라도 여름이면 피서여행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문화가 보편화되었는가 보다. 국민학교도 채 못 들어간 딸아이조차 피서니 바캉스니 하는 말을 들먹이며 무능한 부모를 닦아세운다. 어찌 하겠는가? 피서여행이 아니라 피곤 여정이며, 스트레스의 해소가 아니라 대책 없는 축적의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떠날 수 밖에. 온가족 비행기 타고 해외나들이를 떠나는 이들이 줄을 잇는 판국에 그까짓 피서 여행조차 못가는 주변머리 없는 애비애미일 수야 없지 않은가. 또 앞집, 옆집, 뒷집 모두 떠나는 바캉스를 못가는 바람에 문화생활을 모르는 미개인이나 야만인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신문, 방송, 잡지마다 등장하는 파란 바다와 강렬한 태양, 짙은 숲 바람의 바캉스를 외면하다가는 자칫 서민이라는 사회적 위치마저 상실할 것만 같으니 보따리 챙기는 수밖에 달리 길이 있겠는가? 또 이때쯤이면 건전한 피서문화를 외치는 각종 지당한 구호와 행사가 주지적으로 펼쳐지니 ‘역시나’로 끝나겠지만 다시 한번 ‘혹시나’하는 기대를 걸어봄 직 하지 않은가.
요란하고 어려운 무슨 캠페인은 모르겠지만 건전한 피서문화란 무엇일까? 아니 보다 시야를 넓혀 문화란 무엇일까? 얼핏 문화생활이나 문화시민이라고 하면 왠지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특수한 집단만의 소유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거리 곳곳에 나붙은 ‘우리는 문화시민’이라는 말조차 허겁지겁 하루를 먹고 사느라 여유없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생소한 말같다. 그러니 하물며 ‘문화저널’과 같은 작업은 일반적인 삶을 꾸리는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별천지에서의 일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문화는 두가지로 정의되는데 하난는 “문덕(학문의 덕)으로 백성을 가르쳐 이끄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가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학습에 의하여 이루어 놓은 일체의 성과”라고 한다. 전자는 학문을 통하여 백성을 착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해석되며 이때 누가 가르치느냐 하는 것과 착하다는 것이 무엇인가가 의문일 수 있다. 이 경우 가르치는 주제는 집단공동체의 성원들에 의하여 인정된 지도자(정치적이든 정신적이든간에)일 것이여 착한 사람이든간데)일 것이며 착한 사람이란 그 집단 공동체가 전반적으로 옳다고 수긍하는 일체의 것이다. 결국 집단공동체 성원들이 공감하는 도덕률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집단성원들이 보편적으로 그르다고 인식하는 것은 반문화, 또는 비문화적인 것이다.
후자의 정의는 자연생태계에 존재하는 생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학습을 통하여 여러 세대를 통하여 이룬 모든 것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뜻한다. 그가 어떤 것을 습득하여 지니고 있는가는 따라서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 집단내에서 공통적으로 학습시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일 것이며 그것들의 총합을 우리는 문화라고 한다. 따라서 왼손으로 밥을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인식하는 집단공동체에서는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것은 문화에 반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 경우든 문화는 매우 간단한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일반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행위양식이 문화이며 집단 공동체의 공통적인 규범을 지키는 우리 모두는 문화시민, 또는 문화 국민인 것이다. 한편 문화를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는 것이며 공동체 성원의 보편적 도덕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하면 금수같다고 비판함으로써 문화의 틀안에서 끌어안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한 문화를 지향하는 것도 시간적 맥락속에서 우리를 돌아보고 그를 토대로 집단공동체가 나아갈 긍정적 방향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이일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며 우리 공동체 성원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 더운 여름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지켜가야될 최소한의 체면을 지키고자 욕구를 자제하는 행위, 그것이 동물과 구분되는 문화를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이며 그가 바로 문화를 아는 문화인이다. 나도 덥지만 이웃에게 나로 인하여 짜증스러운 더위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바로 문화인인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물장구치는 개울에서 차를 씻는 운전수 아저씨, 쌀 씻는 윗쪽에서 머리를 빨래하는 아주머니, 자기 집 강아지조차 먹이지 않을 상한 음식을 파는 식당 아저씨, 입 끝에 버릇처럼 국민을 올리면서도 국민을 볼모삼는 정치꾼 아저씨...이런 분들은 부와 권력과 미모와 건강과 사회적 위치를 모두 가지고 있더라도 절대로 문화인 일 수 없다. 곰의 쓸개즙도 못 마시고, 골프장에 나다닐 수도, 초호화판 별장도, 모타보트도, 콘도미니엄도 없고, 피서 여행 경비마련에 머리를 싸매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인 우리, 즉 너그리고 나는 문화인 일수 있다. 우리의 이웃에게 열통 터지는 짓거리를 하기에는 중뿔난 체면을 의식해야하니 말이다.
우리의 작업은 바로 시장판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갑남을녀(甲男乙女)들이 역사 속에서 올곧은 문화를 지닌 인간이기를 바라는 몸짓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더운 여름날 우리네 삶의 터전을 에워싼 짜증스러운 분위기에 한줄기 삽상한 바람을 일으키려는 몸짓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이 땅을 사는 우리 모두의 몸짓일 때 참으로 의미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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