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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2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판소리 명창(1) 권 삼 득
최동현 판소리 연구가(2004-01-29 10:44:29)

판소리 창자들의 이름이 역사의 지평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부터이다. 물론 그 훨씬 전부터 판소리는 있었겠지만, 이 때에 와서야 비로소 기록에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19세기 초에 이르면 판소리가 기록 수단을 가지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의 눈에 띄고, 그것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기록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판소리가 역사의 지평에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거명이 되는 소리꾼들은 우춘대, 권삼득, 모흥갑 등인데, 이 중에서 우춘대는 권삼득이나 모흡갑보다는 한 세대 쯤 선배이나, 이름만 전할 뿐 다른 사항, 예컨대 출신이라든가 소리의 특징 등이 전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서 전혀 알 길이 없다. 여러 가지 사항이 비교적 많이 전해지고 있는 사람은 권삼득과 모흥갑이다.
권삼득은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안동 권씨 명문의 후예로 태어났다고 한다. 양반 출신 소리꾼을 〈비가비〉라 하는데, 권삼득은 최초의 비가비이다. 용진면 구억리는 전주에서 봉동 가는 길로 가다가, 전주시를 벗어나자마자 만나는 만경강 지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는 곳에서 500m쯤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총 89세대 중 25세대가 지금도 안동 권씨일 만큼, 안동 권씨들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마을이다. 현재 이 마을 이장으로 있는 권진택 씨가 가지고 있는 가승에 의하면, 권삼득의 아버지는 래언으로, 호가 이우당인데, 안동 권씨 28세손으로 되어 있다. 권삼득은 권래언의 둘째 아들로 나와 있는데, 삼득은 그의 호이며, 이름은 정으로 되어 있다.
전 전북대학교 교수였던 홍현식씨는 권래언의 문집을 갖고 있다고 하나,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권래언의 호 이우당은 ‘두 가지 근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중 한 가지는 자식인 권삼득이 소리를 하여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음악은 광대  재인 등 천민이나 하는 것으로 알던 때였으니, 명문의 후예가 되어 판소리를 하겠다고 돌아다니는 자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걱정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런 자식을 두느니 차라리 죽여버리겠다고까지 했다 한다.
지금 용진면 구억리 뒷산인 작약골에는 권삼득의 묘와 권삼득이 소리 공부를 했다는 소리굴이 있다. 권삼득의 것이라고 주장되는 묘는 자기 아버지 권래언의 묘 아래에 있는데, 상성로 비도 없어서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가승에 권태언의 묘가 작약골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고, 권삼득의 묘는 아버지의 묘 아래에 있는 것으로는 되어 있지만, 가승에 기록되어 있는 묘의 좌향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확신 할 수 는 없다. 그러나 사실 여부에 상관 없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권삼득의 묘라고 믿고 있다.
권삼득의 묘 오른편 앞쪽에는 소리 구멍이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다. 왜 하필이면 묘 바로곁에 그런 구멍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후손들은 그 구멍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으며, 그 곳에서 소리가 울려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한다. 소리 구멍에서 소리가 울려 나왔다는 얘기를 사실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권삼득뿐만 아니라 다른 명창들과 관련된 이야기 중에는 소리 구멍이나 소리 무덤, 소리굴등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문화 양식이 만들어낸 설화의 한 양상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권삼득의 묘 오른편 아래 쪽에는 권삼득이 소리 공부를 했다는 굴이 있다. 굴이라고 해야, 겨우 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급한 비나 그을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권삼득이 소리 공부를 하던 곳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는 가승 무덤,소리 구멍,소리굴 등이 잘 조직된 ‘권삼득 설화’의 현장이다. 권삼득은 이제 설화가 되어 설화 속의 인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권삼득에 대한 민중의 평가가 어떠했는가를 잘 반영하는 증거가 된다.
권삼득에 얽힌 이야기는 두 가지 정도가 전해진다. 모두 권삼득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해서, 이른바 멍석말이라고 하는 벌을 받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권삼득이 소리를 하고 다니자 크게 노한 권삼득의 부친은, 차라리 권삼득을 죽여 가문의 명예를 지켜 나가기로 했다. 문중의 여러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권삼득을 멍석말이를 시켜 죽이기로 하고 막 시행하려고 할 때, 권삼득이 마지막 소원이니 소리나 한 마디 하고 죽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문중의 어른들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하자, 권삼득은 혼신의 힘을 다해 슬픈 곡조를 한 대목 불렀다.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문중 어른들은 그 재능이 아까와 죽이기는 아깝다하여, 족보에서 제명하곡 쫓아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회적 관습에 비추어 소리꾼이 되는 것은 가문의 불명예이지만, 음악의 중요성과 가치 또한 한 가문의 명예와 맞바꿀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민중들의 음악관이 반영된 이야기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중들의 실제 생활에서 얻어진 지식을 이용한 재치가 번뜩이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도 소리하는 것이 문중의 수치가 된다하여 멍석말이를 하게 되는 대목까지는 같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다르다. 권삼득이 꼼짝없이 죽게 되었을 때, 권삼득은 마지막 청을 하였다. 자기가 여태까지 소리를 하여 사람들은 수없이 울리고 웃겼으나, 짐승들은 한 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이제 마지막 짐승을 웃겨보고 죽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해보라고 하자, 그는 외양간에 매어져 있는 황소 앞으로 가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 소리를 하자 황소가 벙실벙실 웃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짐승마저 소리에 감동해서 웃는 것을 본 사람들은 권삼득을 살려 주었다는 것이다. 후에 권삼득에게 어떻게 하여 소를 웃게 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권삼득은 소리로 어떻게 황소를 웃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황소를 웃게하기 위해 한 꾀를 냈다고 했다. 권삼득은, 소리 할 때 쓰는 부채에다 암소 오줌을 묻혀두었다가, 소리를 할 때 부채를 활짝 펴서 황소에게 암소의 오줌 냄새를 맡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소가 웃은 것은 권삼득의 소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암소의 오줌 냄새 때문이었던 것이다.
널리 퍼져 있지는 않지만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권삼득이 소리만 하고 밖으로 나돌아다니자 집안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하는 수없이 권삼득의 마누라는 베를 짜서 생계를 잇고 있었다. 하루는 권삼득이 오랜만에 집에 오게 되었다. 아내는 베를 짜고 있었다. 고단한 생활에 지쳐 남편이 미웠던 아내는 권삼득을 보고도, 베틀에서 내려오지 않고 하던 일만을 계속했다. 권삼득은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내에게 다가가 베틀을 붙들고 소리 한 대목을 불렀다. 그 소리는 아내에 가족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가득 담긴 노래였을지도 모른다. 소리 한 대목을 들은 아내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봄눈 녹듯 사라져, 이내 남편을 잘 대접했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되었건, 소리를 했기 때문에 당해야 했던 어려움과, 그 소리의 위력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공통된다. 이 이야기들은 그러므로,〈음악가의 경우 사회적 지위는 낮고, 그 중요성은 높다〉는 전세계적으로 공통되는 음악에 대한 민중의 인식을 보여주는 예들이라 할 수 있다.
권삼득은 〈권삼득 덜렁제〉라는 새로운 판소리 선율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덜렁제는 설렁제,권제,권마성조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현재도 판소리 창자들은 이 선율로 된 대목을 부를 때 〈권삼득 씨 덜렁제로 떠들고 나오는디~〉하는 식의 말을 첨가하여, 그것이 권삼득이 만들어낸 선율임을 꼭 밝힌다.
덜렁제는 고음역의 소리가 연속되다가 뚝 떨어지는 음이 출현한다거나, 저음역에서 갑자기 치솟는 음이 출현하는 등 소위 도약선율을 많이 사용하여, 매우 식씩한 느낌을 준다. 이 선율은 〈홍보가〉의 〈놀보 제비 후리러가는 대목〉,〈적벽가〉의 〈위국자의 노래〉, 〈춘향가〉의 〈군노사령이 춘향을 잡으러가는 대목〉, 〈심청가〉의 〈남경장사 선인들이 사람을 사겠다고 외치는 대목〉 등에 쓰인다.
이러한 특징으로 볼 때, 권삼득은 계면조 일변도의 초기 판소리에 남성적인 선율을 도입함으로써 판소리의 표현 영역을 넓힌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권삼득은 양반이라는 신분을 내던지고 판소리 창자가 되어 판소리가 고도의 예술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초기의 소리꾼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아마 앞으로도 길이 빛날 이름임에 틀림없다. 그런 업적을 이루기까지는 수많은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그 고통을 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권삼득 설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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