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에서 ‘공정성’을 기대하는 사회

“자네는 몸에 대한 예의가 없어.” ‘피지컬 100’을 봤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집 앞 의사 선생님의 잔소리였다. 이 나이 지긋한 통증의학과 원장님은 누구에게나 반존대로 혼을 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어떤 변명에도 사정을 봐주지 않기로도 꽤 유명했다. 나는 안 그래도 아픈데 이 독설 가득한 잔소리를 들으려니 조금 발끈해서 요즘 직장인들은 다 그렇다, 피곤하면 커피(혹은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고기 앞으로 가고, 좀 걱정된다 싶으면 영양제를 먹는다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원장님은 거의 경멸적인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요즘 직장인, 그리고 자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운동과 자세 교정이라 잘라 말하고는 소염진통제 3일분을 처방해줬다. 나는 집에 돌아와 ‘피지컬 100’을 보며 약간의 박탈감과 함께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K-콘텐츠’의 부상? 넷플릭스에서 한국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은 이제 새롭지 않다. 최근 ‘더 글로리’, ‘오징어게임’ 등 무수히 많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피지컬100’의 인기는 이례적이다. ‘리얼리티 쇼’가 이 자리에 올라온 건 처음이다. 업계에서는 한국 리얼리티 쇼가 “차세대 K콘텐츠로 부상”하고 있다며 기대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피지컬 100’이 인기를 얻은 배경은 무엇일까?

‘피지컬 100’은 이름 그대로 100명 중 누가 최고의 ‘몸’을 가졌는지 겨루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각기 다른 신체 능력과 조건이 다른 사람들이 나와 상금 3억 원을 걸고 치열한 승부를 펼쳤다. 시청자들은 ‘피지컬100’의 인기 비결에 대해 육체미의 향연과 더불어 동등하게 경쟁을 그려냈다는 점, 한국다운 방식의 동료애를 꼽았다. 그래서인지 시청자들은 극한의 순간까지 밧줄을 잡아당기면서 경쟁하면서도 서로의 원동력이 되는 순간을 가장 인상적인, 최고의 순간으로 꼽기도 했다.

경연프로그램에서의 ‘공정성’

하지만 ‘피지컬 100’이 성별과 같은 구분 없이 정말 ‘평등’한 경쟁이었을까? 높은 인기가 무색하게도 ‘피지컬100’은 종영과 동시에 승부조작 등 논란에 휩싸였다. 제작진은 바로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영상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욕설이나 성희롱 논란은 예능프로그램이어도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공정성’ 논란까지 불러올 일인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이는 최근 종영한 ‘불타는 트롯맨’에서 학폭 논란으로 하차한 황영웅 사건과도 닮았다. 황영웅이 하차하고 나서는 별 문제가 없으려니 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던 것 같다. 트로트에 관심이 전혀 없던 동생도 전화를 걸어 “황영웅이 대체 누구냐. 어떤 아줌마 무리 30명이 회사 사옥 앞에서 시위한다”고 볼멘소리를 해댄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는 왜 예능, 리얼리티 쇼를 보면서 하필 ‘평등’과 ‘공정성’에 집착하는 걸까?

‘공정성’ 논쟁이 일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피지컬 100’은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스포츠’의 얼굴로 그려졌다. 그래서 더 ‘평등’과 ‘공정성’이 논란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꼭 ‘피지컬 100’이 아니어도 지금 인기를 얻고 있는 수많은 경연프로그램에서 공정성 논란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이다. 우리는 경연프로그램을 보며 ‘성취’를 바라보기보다는 ‘생존’을 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낙오자가 발생하고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쇼’가 ‘쇼’일 수 없게 된다. 오히려 현실의 축소판에 더 가깝다. 그렇기에 ‘공정성’은 중요해진다.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우리가 동의한 ‘질서(Rule)’가 잘 지켜지는지, 아니 지켜져야 한다고 쇼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것과 같다. 이는 역설적으로 얼마나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은지를 드러낸다. ‘공정성’이 콘텐츠의 성공 요소가 되어버린 시대,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공정성’ 논쟁이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일상’이 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