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성을 벗어던진 사랑의 원형을 마주하다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70대 ‘진옥(고두심)’은 바다에서 숨 오래 참기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뛰어난 물질 실력으로 유명한 제주 해녀이다. 다큐멘터리 PD인 30대 ‘경훈(지현우)’은 그런 진옥을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서울에서 제주도로 무작정 내려온다. 그러나 진옥은 카메라에 자신의 모습이 담기는 것이 싫다며 한사코 거절한다. 제작사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야만 하는 경훈은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비서를 자처하며 곁에서 열심히 물질을 돕는다. 마침내 그의 진심에 마음을 연 진옥은 촬영을 허락한다. 그 과정에서 바다를 둘러싼 서로의 상처를 발견하고 어루만지며 점차 그들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경훈은 진옥에게 함께 서울로 갈 것을 제안한다.
<빛나는 순간>은 그동안 꾸준히 퀴어 영화를 만들어 온 소준문 감독이 연출한 첫 번째 이성애 로맨스 영화이다. 그런데 70대 여성인 ‘진옥’과 30대 남성인 ‘경훈’의 사랑이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이탈한 파격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 영화는 퀴어 영화와 다름없다. 퀴어 영화란 본디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 표명을 넘어 대안적이고 비규범적인 관계성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역겨움’이라는 부정적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관계라는 측면에서 그들은 더 없이 퀴어다.
그 당위성을 벗어던진 사랑은 쉬이 납득될 수 없다. 그것은 선남선녀의 사랑이 결코 환기시킬 수 없는 질문을 유도한다. 사랑에 이르게 하는 외부적/세속적 조건들이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지 않을 때, 우리는 날 것 그대로의 낯선 사랑을 목격하며 그 기원에 대한 깊은 탐구와 마주한다. 사랑은 오롯이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것이라는 너무나 자명한 이치를 복기한다. 누구도 그것을 판단하거나 재단할 수 없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영화는 사랑의 원형을 복원해 낸다.
그러나 진옥은 경훈과 함께 떠나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의 구조로 봤을 때, 끝내 함께하지 못하는 그들은 사랑에 실패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별의 이유는 그들을 향한 외부의 부정적 시선이 아니라 바다에서의 삶이라는 진옥의 숙명이다. 사랑의 궁극적 목표는 서로를 항상 곁에 두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이다. 진옥은 경훈의 사랑 덕에 상처를 딛고 더 힘차게 물질을 할 수 있게 된다. 경훈은 진옥 덕에 바다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다. 그리하여 상실의 경험을 제외하고는 어떤 유사한 속성도 공유하지 않는 사랑은 세대와 계급을 넘어 서로의 삶에 깊숙이 뛰어드는 연대의 우화로 승화된다. 이처럼 영화는 사랑을 재발명한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끝이 날 수밖에 없다. 빛나는 순간을 맞이한 사랑은 점차 시들어 가기 때문에, 그 미래는 장담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사랑의 관건은 그 가장 빛나는 순간을 포획해 간직하며 들여다보는 것이다. 사랑에 영원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종속된 관계와 물리적 거리로부터 그것을 자유롭게 풀어줘야 한다. <빛나는 순간>은 관계의 해피엔딩을 넘어 사랑의 정수에 대한 영원한 박제를 꿈꾼다. 아마도 그것은 관계를 넘어선 사랑의 해피엔딩이 될 것이다. 경훈은 자신과 사랑에 빠진 진옥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미 다큐멘터리 영상에 고스란히 담아놓았다. 그래서 경훈은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않고 웃으며 뒤돌아설 수 있다. 진옥의 영상 위로 경훈의 내레이션이 겹쳐진다. 빛나는 순간은 서로의 기억 속에서, 그 영상 속에서 영원히 그 빛을 지속할 수 있다. 언제든 힘들 때마다 위로받기 위해 꺼내 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랑이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