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로마가 기다려지는 이유
글 이백만 전 주교황청 한국 대사
‘영원의 도시’ 로마는 서양문명의 수원지로 불립니다. 세계 13억 신자를 거느린 가톨릭의 총본산 바티칸이 그 한복판에 있습니다. 로마에는 역사의 향기가, 바티칸에는 그리스도의 숨결이 있습니다. 한국의 과거와 현재가 있고 미래도 있습니다. 이번호부터 주교황청 대사로 3년간 근무하고 지난해 말 귀국한 이백만 전 대사가 로마의 향기와 바티칸의 숨결을 전해 드립니다.
혹시 ‘프라티칸테’라는 말을 아시나요? 이탈리아어 praticante! 제가 이 말 때문에 무척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2018년 1월 주교황청 대사로 부임하여 교황청의 동아시아 담당 몬시뇰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새로 취임하신 문재인 대통령이 프라티칸테 맞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비롯하여 교황청 사제들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황청으로서는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특임 대사로 부임한 저에게 뭔가 좋은 덕담을 해준 거 같아서 “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은 했지만, 어쩐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프라티칸테,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주일마다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는 가톨릭 신자, 또는 실질적인 신앙 활동을 하는 가톨릭 신자를 의미합니다.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면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교황청이 파악하기로는 세계 주요국의 정상 가운데 프라티칸테는 문 대통령이 유일했다고 합니다. 유럽이나 남미의 국가 정상 가운데 가톨릭 신자가 적지 않았지만 프라티칸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프라티칸테를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문 대통령이 이제 유일한 프라티칸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세계 질서를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도 프라티칸테입니다. 교황청으로서는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습니까. 세계 주요국의 국가 지도자 가운데 프라티칸테가 두 명으로 늘어났으니 말입니다.
가톨릭에도 보수와 진보가 있습니다. 진보적 가톨릭(Liberal Catholic)은 인권, 환경, 평화 등 사회적 가치 실현을 아주 중요시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바로 리버럴 가톨릭입니다. 문 대통령도 알아주는 리버럴 가톨릭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역대 교황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프라티칸테 지도자이자 리버럴 가톨릭인 문재인과 바이든, 그리고 진보적 성향의 가톨릭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님! 환상의 삼각 콤비 아닙니까? 머리 속에 뭔가 좋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2월 힌트를 주었습니다. 바이든은 취임 직후 문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2021.2.4)에서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숨김없이 털어놓았습니다.
“문 대통령이 가톨릭 신자라고 하시니…, (나의) 당선 직후 교황께서 축하 전화를 주신 기억이 난다. 당시 기후변화, 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문 대통령과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니 우리 두 사람의 견해가 비슷한 것 같다.”(바이든) “저도 교황과 대화한 일이 있다. 교황께선 동북아 평화 안정, 기후변화 등을 걱정하셨다. 자신이 직접 역할을 하실 수도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교황님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문재인) 바이든과 문재인은 첫 전화 통화에서 가톨릭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라는 공통된 코드를 서로 확인했습니다.
저는 10월의 로마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G20 정상회의가 올해에는 10월 30~31일 양일간 로마에서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황청에는 중요한 외교 관례가 있습니다. 교황청 수교국의 정상이 이탈리아를 방문할 경우 반드시 바티칸을 들러 교황을 만나는 외교 의전입니다. 교황청의 외교 관례에 따라 바이든과 문재인이 바티칸 사도궁을 찾아 교황님을 면담(알현)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교황님 면담은 통역만 배석한 독대로 진행됩니다. 교황님은 바이든과 문재인을 독대하는 자라에서 과연 무슨 대화를 나누실까요.
교황님이 한반도와 한국민을 각별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구태어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주교황청 대사로서 3년간 일하면서 직접 들었거나 간접적으로 확인한 교황님의 어록은 이렇습니다. “내 가슴과 머리에 항상 한반도가 있다.”(2018.2) “북한에 갈 준비가 되어 있다.”(2018.10) “남북한 지도자와 손잡고 판문점을 걷는 것이 나의 꿈이다.”(2019.1)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방문하고 싶다.”(2020.10)
많은 언론들이 교황 방북 성사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저는 교황님의 방북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나름 일을 좀 했습니다. 교황님은 2018년 10월 바티칸을 방문한 문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이 공식 초청장을 보내주면 북한에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발언은 ‘교황, 사실상 방북 요청 수락’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국제적인 뉴스가 되었습니다. 이후 북한과 교황청의 관계는 급속히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교황 전용기가 곧 평양으로 출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하노이 노딜(2019.2)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교황님과 불편한 관계였던 트럼프가 물러가고, 교황님을 존경하는 바이든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교황 방북 프로젝트가 다시 추진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뭔가 큰 열매가 맺을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제가 로마의 10월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이유입니다.
교황 방북은 단순한 종교 이벤트가 아닙니다. 교황 방북이 성사되면, 이것은 한반도의 외교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교황 전용기가 평양순안국제공항에 내리고 교황님이 김정은 위원장과 포옹(악수)할 때, 한국의 모든 TV 채널은 물론이고 CNN BBC 등 외국의 유력한 TV 채널이 이 장면을 생중계할 것입니다. 실로 가슴 떨리는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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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만 대사는
전 주교황청 한국 대사.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매일경제신문 기자, 한국일보 경제부장과 논설위원 등으로 언론계에서 활동했다. 참여정부 당시에 국정홍보처 차장,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 대통령 홍보특별보좌관을 맡아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했다. 이후 노무현재단의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2018년 1월부터 2020년 11월까지 주교황청 한국 대사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