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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⑦
돌아온 고국
임안자(2020-07-07 12:57:24)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⑦


돌아온 고국
임안자 영화평론가


4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나는 공항에 마중 나온 어머니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만도 통통하고 건강한 체격에 기운찼던 어머니 대신에 폭삭 늙어버린 가냘픈 할머니가 내 가슴 안에 가볍게 안겼는데,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쓸쓸해 보여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딸을 멀리 외국에 두고 그리움에 시달렸던 어머니의 외로움과 아픔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몸으로 느껴졌다. 내가 시카고로 갈 때에 어머니는 계속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는 웃으면서 가볍게 이별의 손짓을 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어린애처럼 엉엉 울자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내 눈물만을 닦아주었다.


나는 한국을 떠난 뒤 어머니를 꿈에서 자주 만났다. 꿈에서 만나는 어머니는 언제나 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 내가 아무리 손을 내밀고 뛰어가도 잡히지 않았고 끝에 가서는 어디론가 사라지던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깨어났고 그게 반복될 때에는 기운을 잃고 피곤에 지쳐버리곤 했었는데, 틀림없이 어머니도 이별의 악몽에 오래 시달렸을 거라고 믿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짜부라진 어머니의 몸이 고통의 깊이를 나타내 보여주었다.


고향 용담에서 나는 어머니와 울다 웃다 하면서 4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한 달을 보냈다. 평소 음식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다. 익은 김치, 생김치, 파전, 수제비, 송편 모두 맛이 여전했다. 한 번은 내가 고기도 먹는다고 하자 언제부터냐며 어머니는 햇닭에 생인삼을 넣은 닭고기 요리를 해줬다. 내가 어릴 때 더위에 좋다고 해줄 때는 고기 냄새가 싫어서 못 먹었지만 고기 맛을 안 뒤의 삼계탕은 어머니의 사랑을 양념으로 맛이 좋았다.



휴가 동안에 나는 어머니에게 오래 전부터 생각해 뒀던 재봉틀 싱거를 선물로 사줬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내 옷들을 손수 재봉틀로 만들어 줬는데 나는 그게 너무 싫어서 항상 불만이 컸었다. 내 친구들이 시장에서 유행하는 현대식 원피스를 입을 때 나는 촌스러운 무명옷, 그것도 손으로 만든 것들을 입어야 해서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고 돈 없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6.25 동란이 끝날 무렵 먹고살기 위해 그처럼 오래 쓰던 자봉침을 동네 사람에게 팔았다. 그런데도 나는 철따구니 없이 친구처럼 시장에서 파는 옷을 입을 수 있다고 은근히 좋아했었다. 재봉틀을 선물 받은 어머니는 아주 좋아하셨지만 좀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의 눈이 바느질을 할 수 없을 만큼 나빠졌고, 더 이상 딸을 위해 옷을 만들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첫 결혼에서 낳은 의붓 오빠 가족과 같이 살았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상처를 입어서인지 그는 어머니에게 정을 주지 않았고 나에게도 항상 서먹서먹했었는데, 오랜만의 만남이라서 그런지 내가 집에 오자 친절히 맞아주어 껄끄러움이 덜했다. 의붓 오빠는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널따란 밭에다 인삼을 심었는데 그게 잘 돼서 옛날에 비해 경제적으로 많이 나아진 듯했는데 어머니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웠다.


어머니 곁에서 보낸 한 달은 슬프기도 했지만 정스럽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어머니가 가장 알고자 했던 건 내가 언제 결혼을 할 거냐였는데, 내가 사귀는 남자가 없다고 자신 없는 대답을 하자 “네 나이도 생각할 때라”고 조용히 타일렀다. 어머니가 행여 먼 곳에서 딸이 시집도 못 가고 혼자 살까 봐 걱정을 하는 동안에 나의 고민은 예수병원에 들어가던가 아니면 바젤로 돌아갈까 둘 중의 하나를 고르는 일이었다. 내가 시카고에 있을 때 간호학교로부터 임상간호 실습분야의 팀장으로 오라는 초청이 한 번 있었으나 그 문제는 내가 스위스로 가는 바람에 흐지부지돼 버렸다. 그 대신 바젤시립병원엔 다시 갈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기 전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휴가 전에 간호원장에게 병동을 바꾸거나 이비인후과 수술실로 갈 수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그녀의 대답은 “당장은 모르지만 기다려보자, 혹시 모르니까 한국의 주소를 남기고 가라”는 대답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약속은 헛말이 아니었다. 휴가가 끝날 즈음에 바젤시립병원의 간호원장실로부터 편지가 왔다. 내용은 ‘수술실에 자리가 하나 났는데 언제 올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수술실로 갈 수 있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일주일 뒤에 도착하겠다는 대답을 보낸 뒤 떠날 준비를 했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빨리 가야 하느냐며 다시 슬픔에 잠기는 사이에 나는 스위스로 떠났다. 바젤에 오자 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친구는 무척 기뻐하면서 가을에 결혼할 거라고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1970년 8월 중순에 들어간 이비인후과 수술실은 예상대로 근무 시간부터 달라서 일하기에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1년 내내 나를 괴롭혔던 수간호사를 보지 않아서 살 것 같았고, 새 수간호사는 정반대로 수줍은 성격에다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아서 수술실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이비인후과 수술실은 미국의 두 수술실에 비해 간단하고 시간도 짧게 걸려 문제될 게 하나도 없었다. 한 가지 다르다면 근무 시간 외의 응급환자를 위한 당번제가 더러 있었지만 그로 인한 수당이 높아서 싫지 않았다.
바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저녁 시간을 이용해 학원에서 독일어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어는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그런데다 스위스인들이 쓰는 일상 언어가 표준 독어가 아닌 지역 시투리여서 학원에서 배운 걸 밖에서 그대로 쓰기엔 한계가 있었고, 사투리를 배우기도 간단치 않았다. 그런 언어의 풍토 때문에 스위스에서 표준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하다. 나에 비해 다른 한국 간호사들은 모두 독일에서 3-4년 동안 일하다가 스위스로 들어왔는지라 비교적 독일어를 잘하는 편이었다.


아무튼 독일어가 차츰 습관이 되어가던 가을 어느 날, 나는 시내의 책방에서 한 젊은 남자를 만났다. 독일어 문법책을 사려는데 책방 주인이 영어를 몰라서 독일어로 더듬거리고 있는 자리에 젊은 남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독어 통역을 해줬다. 갑자기 나타난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그는 나를 커피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하면서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왜소한 몸집에 착한 표정을 지었는데 금발에 파란 눈이 매력적이었다. 그는 부모의 경제난으로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고 일찍부터 여러 직장을 돌아다니다 자습으로 국가시험을 통해 고등학교 자격증을 딴 뒤 베른과 취리히 대학에서 신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는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8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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