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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 | 연재 [여행유감]
치열했던 지난날, 바쁜 일상에 쉼표를 찍고
산정호수
도향원(2019-10-15 14:16:00)



나는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 남들은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마음이 들떠서 잠 못 이룬다는데 나는 거기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여행이 고된 삶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게 해주거나, 일상을 잠시 멈추고 삶을 되돌아볼 자기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연한 기회로 가게 된 산정호수 둘레길 여행은 내게 앞만 보던 바쁜 일상을 벗어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큰 구름이 산을 타고 오르는 장엄한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고 복잡했던 생각을 멈추거나, 잔잔한 호수에 비해 요동치는 내 마음 한구석을 보살피는 시간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산정호수에 갔을 때 마침 보슬비가 내려 공기 중에 물 내음이 짙었다. 땅과 흙을 딛고 둘레길을 걷다 보니 발바닥과 무릎을 통해 걷는 행위에 대한 감각이 새로이 들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내가 언제부터 이 감각을 잊고 지냈을까?


산정호수를 둘러싼 산을 새하얀 구름이 무겁게 누르며 오르고 있었다. 경계가 흐릿한 구름이 내뿜는 몽환적 분위기를 타고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를 회상했다. 나는 대학 시절에 내가 원하는 건 못 이룰 것이 없다고 자신했다. 각종 토론대회에서 수상하고 장학금도 받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아르바이트로 생활고를 견뎌내면서도 학업에 열중했고 하루가 모자라게 시간을 쓰는 그런 학생이었다. 하지만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 나도 남 일 같았던 취업 고민을 하게 되었다. 자신했던 채용 면접에서 수차례 낙방했음에도 큰물에서 꼭 성공해 돌아오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2015년 10월 말, 나는 몇 벌의 옷만 챙긴 채 무작정 서울에 올라왔다. 당시에 내 수중에는 학교에서 장학금으로 받은 300만원이 전부였고 지인에게 얻은 오래된 여행 가방은 바퀴가 고장이 나서 관절염이 있는 노인처럼 덜덜거리며 나를 따랐다. 나는 강남역 근처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한 평 남짓한 고시원에 방을 얻었다. 서울에 처음 왔던 그날 밤은 이불이 없어 그 긴긴밤이 추웠고 그래서인지 더욱 내 신세를 한탄했다. 방음이 안 되는 고시원에서 옆방에 혹시나 들릴까 밤새 소리 죽여 울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서울 생활의 정점을 찍었던 곳은 내가 처음 입사했던 건강기능식품 회사였다. 나는 홈쇼핑 영업부에 배치받아 거기에서 만난 내 사수였던 '김 과장'을 잊을 수 없다. 김 과장은 성격이 고약해서 회사직원들이 그 앞에서 벌벌 떠는 존재였다. 지금 생각하면 똥이 무서워 피하겠냐 만은 신입사원이었던 내게 김 과장은 두려운 사람이었다. 당시에 회사는 김 과장에게 영업실적에 대한 많은 부담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업무의 과부하로 인해 추가 인력을 요청했고 하필이면 내가 바로 그 직원이었다. 김 과장은 나름대로 신입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 같다. 하지만 담배도 못 피우고, 운전도 못 하는 여자 신입이 와서 오히려 그의 입장으로는 돌봐야 할 게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그는 한동안 그 스트레스를 나를 윽박지르며 풀었다. 한 번은 퇴근하려는 데 김 과장에게 연락이 왔다. 홈쇼핑 방송을 코앞에 두고 차가 막혀 본인이 촬영장에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으니 나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스튜디오에 가 있으라는 명령이었다. 나는 퇴근을 하다 말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핸드폰이 배터리가 닳아 꺼지고 말았다. 전화를 제때 받지 못하면 김 과장이 얼마나 난리를 칠지 몰라서 나는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 넘어졌어도 상처를 살펴보지 못하고 방송국까지 뛰어가야 했다. 다행히 방송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김 과장은 내게 욕을 하며 영업직원이 어떻게 핸드폰이 꺼져있을 수 있냐며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그날은 홈쇼핑 판매가 잘 되었고 업무를 마친 시간은 새벽 1시였다. 아직 저녁도 못 먹은 나와 김 과장은 근처 국밥집으로 가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는 갓 나온 국밥에 코를 박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게 그의 첫 끼니였던 모양이다. 김 과장의 밥 먹는 모습은 내게 세상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이만큼 치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드라마 '미생'이 따로 없던 나의 영업부 신입사원 시절은 지금 다시 살라고 하면 못 살겠지만, 무작정 서울 생활에 몸을 담근 내게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쓴 가르침을 주었다.
산정호수를 걷다 보니 비가 점점 거세졌다. 다행히 찻집을 하나 만나서 발길을 멈췄다. 따뜻한 얼그레이 차를 한 모금 머금고 그 향기를 음미해본다. 호숫가에 공기도 비를 머금었고 호수의 물결은 잔잔하다. 이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낮은 항아리에 피어있는 수중 식물이었다. 이름 모를 그 식물은 동그란 잎새를 물 위에 띄웠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는 내 인생이라는 물 위에 무엇을 띄워놓았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강물이라 비유했을 때 나는 그 위에 내가 원하는 것을 띄워놓을 수 있고 또는 잠기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날이 좋지 않아 물결이 거세지는 날에는 내 의도와 다르게 강물 위의 모든 것이 물에 잠길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내 마음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생각도 마음도 어린 나는 많은 시간과 경험을 겪어야 했다. 그 시간 중 한동안은 어차피 안될 것을 뭐하러 노력하나 하고 거친 생각과 회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국 나는 물 위에 띄워놓을 것들을 좀 더 튼튼하게 만들자고 결정했다. 그래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내가 가진 것들을 잘 엮어 열심히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한 생각이 들었다. 내 꿈은 무엇이었나? 아 시인이 꿈이었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글쓰기를 퍽 좋아했다. 지금은 회색빛으로 보이는 세상이 어린 시절에는 참 알록달록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시인이셨던 국어 선생님이 교내 백일장에서 내가 쓴 '미륵사'라는 시를 보고 내게 시인을 권했던 게 대학 전공으로 국문과를 택하도록 이끌었다. 내친김에 나는 찻집에서 펜을 집어 들고 시를 써보기로 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기안문만 작성하다가 갑자기 감성을 깨우려니 이 녀석이 단단히 삐져있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몇 분을 그렇게 있다가 항아리에 핀 이름 모를 수중 식물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산정호수는 호수도 호수이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경관이 참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길옆에 푸른 것들이 초록 내음을 뽐내며 자연을 그대로 보여준다. 눈, 코, 귀와 피부 등 온몸의 감각기관이 협주곡을 연주하듯 자연경관에 동시에 반응했다. 나는 그 숨 트이는 곳을 좀 더 느끼고 싶어서 느리게 걸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느리게 걷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하철을 환승할 때처럼 자꾸만 빨라지는 다리를 달래어 천천히 한 발씩 내디뎠다. 다리가 무거워질 때쯤 폭포를 만났다. 아주 큰 폭포는 아니었지만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에 내 마음도 시원했다. 만성적으로 얹힌 피로, 미움, 답답함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폭포수에 실어 보냈다. 내일이면 다시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전 운동을 하고 직장생활에 녹초가 되어 퇴근하고 또 다음날의 출근을 준비하는 반복된 일상에 돌아가야 하겠지만 괜찮다. 일상의 권태와 피로가 쌓일 때 그것을 비우는 방법을 알았으니 말이다.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될지 기대하며 산정호수에서 쉼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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