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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 | 연재 [전호용의 음식 칼럼 <자급>]
풍천
아홉 번째
전호용(2019-09-17 11:29:06)



밤새 비 내린 어스름한 새벽, 하늘 가득한 잿빛 구름에 옅은 주황빛이 감돈다. 다시 눈을 감으면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 흘러가는 길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세골세골 모여든 빗물이 도랑을 타고 흘러 골짜기로 모이고, 골짜기로 흐르던 물이 개천을 타고 흘러 강으로 모인다. 밤새 내린 빗물이 강으로 모여 주황색 바다로 넘실넘실 달려간다. 나는 그 끝, 주황색 바다와 잿빛 바다가 만나는 갯마을에서 낳고 자라 여태 코를 박고 살고 있다.


군산시 옥구읍 오곡리. 오른편으로는 너른 들을 품은 수산리가, 왼편으론 너른 갯벌에 안긴 어은리가 자리해 있다.  수산리, 오곡리, 어은리 모두 만경강이 낳은 땅이다. 수산리 앞의 너른 들은 만경강을 막아 간척한 땅이고, 오곡리 앞의 염전 또한 만경강을 막아 만들었다. 어은리는 만경강 갯벌에서 나는 것들을 잡아먹고 살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이다. 강은 살을 헐어 그 땅에 이름을 주었고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낳고 키우고 살리고 돌려보냈다.
 어린 시절, 요즘처럼 비 내리는 장마철이 되면 동무들과 함께 오곡리에서 어은리로 흐르는 개천으로 나갔다. 개천은 흘러 어은리 앞 만경강으로 빠져나갔는데 밀물에는 바닷물이 들어와 머물렀기 때문에 흙은 짜고 흐르는 물은 싱거웠다. 우리는 개천의 흙에서 모시조개를 캐고 게를 잡았고, 물에선 모기장으로 만든 뜰채를 펼쳐 실장어를 걷어 올렸다. 이것들을 잡아 집에 들고 가면 어미는 모시조개로 국을 끓이고, 게는 장을 담고, 실장어는 말려 조림으로 만들어 먹였다. 지금은 세계적으로도 구하기 어려워 kg당 몇 천만 원을 호가한다는 실장어를 멸치조림하듯 조려먹었다. 그렇게 실장어를 많이 잡았는데도 모기장을 빠져나간 치어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모양이다. 흐르는 물을 타고 올라간 실장어는 개천에서, 저수지에서, 도랑에서, 때때로 깊은 산속 맑은 계곡에서도 어엿하게 장어로 자라 그 검은 몸을 휘감으며 반짝거렸다. 


내 어미는 수산리의 오른편에 위치한 월연리에서 낳고 자라 내 아비의 고향인 오곡리로 시집왔다. 어미의 유년기 기억도 나와 크게 다리지 않은데, 월연리 또한 만경강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땅이기 때문일 것이다. 강에 나가 조개 캐고 게 잡아 반찬 삼았고, 수로에선 장어, 메기, 가물치 따위를 잡아 국을 끓여 먹었다. 어미는 60년도 더 전의 일을 화색이 되어 어제 일처럼 회상하신다. 


"여름이 장마 지믄 강에 살던 장어 새끼들이 똘(개천)물 따라 안 올라오냐. 그렇게 올라온 장어들이 논바닥이고 또랑이고 똘이고 간에 득실득실혔어. 그렇게 가을까지 큰 장어가 때 되믄 바다로 내려가는디, 그 길목을 막고 물을 빼문 그 안에 장어야 메기야 가물치야 뭐야 그득그득 안허냐. 그러믄 느그 외삼촌이랑 동네 남자들이 똘로 들어가서 그것들을 잡어내는디 뱃대지 누런 장어가 니 팔뚝만 혀. 가물치는 니 장단지만 헐 것이다. 맛은 장어가 제일 좋지. 그놈을 큰 가마솥이다 그득 넣고 폭폭 끓여서 장어탕을 끓이면 기맥히게 맛있었니라. 찐득찐득 허니 입에 짝짝 붇는 게 별미 중에 별미였어."


어미는 먹는 방법을 아비는 잡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개천 바닥을 콘크리트로 정비하기 전에는 대부분 진흙이었다. 장어는 물 아래 진흙에 구멍을 내고 몸을 숨긴다. 구멍은 앞뒤로 두 개가 나 있다. 한 쪽은 꼬리가 한 쪽에는 머리가 향해있는 구멍이다. 가만히 보면 머리 있는 구멍에서 작은 거품이 올라오는 게 보인다. 기다란 장대 끝에 낚싯바늘 모양의 갈고리를 달아 거품이 올라오는 구멍에 살며시 넣고 앞으로 잡아당기면 장어가 뀌어 나온다.


실장어로 만든 조림을 먹었던 기억, 장대로 장어를 낚았던 기억 모두 10세 이전의 일이다. 그 후로는 실장어가 눈에 띄지 않았고 물이 탁해져 개천 바닥이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 아비와 어미가 물려준 땅에서 농사짓는다. 한때 살충제, 제초제로 뒤덮였던 땅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 논에는 우렁이가 기어 다니고, 물벼룩이 통통거린다. 개구리도 폴짝거린다. 모 때우는 손 등에 거머리가 늘러 붙어 피를 빤다. "내 이놈"하며 거머리를 털어내고 허리 펴고 고개 들어 멀리 만경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풍천. 강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밀물이 드는 시간인 모양이다. 그 밀물 타고 올라온 실뱀장어 내 논에 들어 물벼룩, 거머리, 우렁이, 피리, 개구리 잡아먹고 검은 등, 누런 배 반짝거리며 유유히 헤엄칠 날 오려나. 그러나 그 소망 요원하다. 모든 땅에 우렁이, 개구리, 거머리 득실거려도, 모든 수문이 열려 강물이 들락거리고 진흙이 들어찬데도 장어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저 아래 거대한 방조제에서 밀물이 막혔으니 바닷물과 장어도 그 언저리에서 휘돌다 고개 숙이고 돌아갈 것이다. 그 방조제 넘어설 수 있는 바람이나 겨우 풍천 행세를 할 테지. 


작년 여름, 기력이 쇠한 어미가 몸져누워 밥술을 뜨지 않았다. 뭐라도 입에 맞는 걸 먹자며 장어탕 한 그릇 하러 나서자니 두 말 않고 털고 일어났다. 장어탕으로 유명해서 사시사철 문전성시를 이루는 식당이었음에도 어미는 장어탕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런 것도 장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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