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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 | 연재 [SNS 속 세상]
인류세(人類世)
오민정(2019-09-17 11:27:27)

엄마랑 TV를 보고 있다가 우연히 홈쇼핑에서 다이어트에 좋다는 크릴새우 오일 광고를 보았다.

"넌 저거라도 좀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라는 질책에 "전 세계 비만인들로 인해

곧 크릴새우 씨가 마를 거야. 인류세의 비극이 이런 건가."라고 푸념하다 결국 엄마에게 리모콘을 뺏겼다.

"넌 왜 그렇게 애가 부정적이야. 그리고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몇 년 전부터 SNS로 본 융·복합 전시소식에서 '인류세'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며칠 전에도 SNS를 통해 한 작가가 '인류세'를 주제로 전시를 연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 표현이 낯선 듯, '인류세'에 대해 물어보는 댓글들을 심심치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인류세(人類世)_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진입했다
'인류세'란 인류가 지구 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켜 만들어진 새로운 지질 시대를 뜻한다. 처음에 정확한 뜻을 모르고 이 용어를 들었을 때는 '너무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정확한 뜻을 알고 나자 그런 의구심이 사그라졌다. '인류세'는 인류가 지구의 지층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지질학적 용어로, 인류의 활동이 소행성 충돌, 지각판 운동에 맞먹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 영향이 좋은 쪽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재앙에 가깝다.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네덜란드의 화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이 2000년 처음 주창한 '인류세'는 이제 비단 과학계의 담론만을 넘어섰다. 지질학을 비롯해 생물학, 과학철학 등 인문·사회과학 분야까지 논의되고 세계적으로도 '4차 산업혁명'보다 많이 검색된, 2019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담론 중 하나다.


닭 뼈와 플라스틱
닭은 전 세계적으로 한 해 650억여 마리가 도살 되고 있다. 삼계탕, 다이어트용 닭가슴살, 치킨 등 우리는 돈만 내면 주위에서 너무도 손쉽게 수많은 닭 요리들을 접할 수 있다. 그만큼 닭은 인간이 가장 많이 먹는 가축이며, 그래서 우리가 공룡의 뼈로 중생대를 판별하듯이 후세에는 닭 뼈로 '인류세'를 감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예측한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닭을 소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환경을 교란하고 파괴해 왔는가? 실제로 몇몇 과학자들은 전 세계 육상동물 중 인간과 가축이 97%에 육박하며 종내에는 인간과 닭 등 소수의 가축만이 남게 될 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인류세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인 '플라스틱'. 플라스틱 과잉 소비 시대, '제로 플라스틱', '플라스틱 프리' 등 최근들어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자는 운동과 정책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강력한 소재 중 하나인 플라스틱은 지금도 지구 전역에서 퇴적되고 있다. 이렇게 퇴적된 플라스틱은 미래에는 화석이 되어 지층에 남아 '기술 화석'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또 이에 그치지 않고 미세 플라스틱이 생물들의 생체에 퇴적되어 고통을 받고 있으며, 결국 먹이사슬을 통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인류세'이거나 '자본세'이거나
이와 같은 '인류세'에 대해 한편에서는 다른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세계생태학연구 네트워크의 제이슨 W.무어는 이와 같은 현상에 '인류세'라기 보다는 '자본세'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이렇게 암울한 미래를 초래하는 원인이 '인류'가 아니라 오랫동안 아무런 대가 없이 과잉채굴하고 남용해 온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문제로 인해 종말을 맞는 것은 이러한 경제 전략일 뿐 인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로 인한 문제의 책임을 인류 전체로 돌려 온 '부르주아적인 구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류세'이거나 '자본세'이거나, 인간의 이기심과 무분별한 개발이 지구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철저한 자기반성도 중요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자본주의도 결국은 인간이 개발한 것 아닌가. 과잉소비, 난개발, 과잉채굴, 삼림파괴 등은 각종 자연재해와 생물다양성의 감소라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제 우리의 미래까지 위협하고 있다. '인류세'의 시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책임이 인류인지 인류가 개발한 경제 시스템인지가 아니다. 내 생활의 편리함을 조금 양보하더라도 환경을 위해 행동하는 작은 실천, 그것이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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