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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 | 연재 [수요포럼]
낭만과 억압이 공존했던 그때 그시절
우리 대중문화의 뿌리를 엿보다
도휘정(2019-09-17 11:16:30)

2018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인기는 대단했다. 70년대 청년시절을 보낸 이들은 추억에 젖었고, 지금의 청년들 또한 천재 뮤지션의 강렬했던 삶과 음악에 뜨겁게 반응했다.


그러나 1970년대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금지곡이었다. '불건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곡이 우리나라에서 해금된 것은 1994년. 20년을 웅크리고 있다 느닷없이 나타나 대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노래. 이것이 대중문화의 힘이다.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뿌리는 60~70년대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정권 시절, 공장 굴뚝에 연기가 쉼 없이 피어오르던 시절에도 '낭만'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대중문화, 통기타를 치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던 청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 수단으로서 매스미디어 형성과 발전
'제195회 마당 수요포럼'을 찾은 김창남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서울대학교 노래패 '메아리' 출신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했고, '한국대중음악상 제정을 주도하여 1회부터 계속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낭만과 억압이 공존했던 그때 그 시절을 이야기했다.


"산업화시대, 박정희시대, 근대화시대, 냉전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절 음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로서는 유년기, 소년기를 거쳐 성인으로 성장해간 시기입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상태에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던 시기인 거죠. 저는 60~70년대가 한국의 현대, 이른바 모더니티, 현대적인 우리의 삶을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를 질문한다면, 가장 먼저 공부해야 할 시기죠. 지금 경험하는 다양한 문화 현상들의 뿌리가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저항한 4·19혁명 결과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지만 불과 1년 만에 5.16 군사 쿠테타로 무너지면서 60년대는 시작됐다.
1년 남짓한 시간 안에서도 다양한 문화적 시도가 이루어졌다. 초판 서문 '빛나는 4월의 함성이 가져다 준 자유'로 시작하는 최인훈 소설 『광장』과 지금까지도 '한국 영화사 걸작 10편'으로 손꼽히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매우 중요한 작품들이다. 특히 <오발탄>은 전후 한국사회 피폐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데, 5·16 쿠테타 이후 상영이 금지됐다. 그만큼 사회비판적인 작품이었던 것이다.


"군사정권은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면서 국가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약점을 극복하고 집권의 정당성과 반공,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매스미디어 체재를 정비합니다. 자기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데 미디어가 중요하다고 인식한 거죠. 이는 매스미디어의 성격과 한계를 결정짓는 굴레이기도 했습니다."


군사정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방송국을 세우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KBS 라디오와 종교방송인 CBS 라디오만 있었는데, 1961년 문화라디오, 1963년 동아라디오, 1964년 동양라디오가 각각 개국했다. 그런가 하면 1961년 KBS-TV, 1964년 TBC-TV, 1970년 MBC-TV가 개국하면서 TV시대가 열렸다.
그는 "이때 방송법, 영화법 등 미디어 관련 법과 제도들이 정비되는데, 정치권력에 있어 미디어란 언론이 아닌 오직 정권 홍보의 수단, 국민통합과 동원의 수단일 뿐이었다"고 설명했다.


60년대 향락주의적 대중문화로 서민들의 삶 지탱
라디오 드라마→영화→주제가. 오늘날 '원 소스 멀티 유즈'가 이미 60년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백아가씨>, <섬마을선생>, <불나비>, <맨발의 청춘>, <하숙생>. 모두 라디오 드라마이자 영화, 그리고 노래 제목이었다.


"60년대에는 라디오가 가장 중요했고, 그 다음이 영화였습니다. 아무래도 TV는 잘 사는 집에나 한두 대 있었지요. 온 가족이 저녁밥을 먹고 라디오를 둘러싸고 앉아 드라마를 들었죠.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를 얻게 되면, 영화로 만들어지고, 주제가가 담긴 음반이 팔립니다. 우리 세대에는 TV가 엄청난 욕망의 대상,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TV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러운 권력이었지요. 당시 영화 관객을 비하해서 '고무신 관객'이라고 했는데, 우리 어머니도 주말이 되면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손수건을 차고 '나 극장 구경간다'하고 나가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여자들의 삶은 고달팠다. 줄줄이 애를 낳고, 남편은 술 마시고 주정하기 일쑤였으며, 시집살이는 당연했다. 그렇게 살다 주말이 되면 신파조(新派調) 영화들을 보며 펑펑 울고 여자들은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카타르시스.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던 것이다.


"당시 수많은 작품들이 도시 남자에게 버림받은 시골 처녀의 이야기였습니다. 산업화가 사실 도시화죠. 사람들은 가난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옵니다. 공장 노동자가 되고 식모살이를 하고, 그게 산업화의 풍경이죠, 농촌은 끊임없이 빼앗기는 현장이 되고 도시는 값싼 노동력으로 산업화를 일으킵니다. 신파지만 사회성이 들어가 있는 거죠."


그러나 도시를 다룬 영화들도 행복하지 않았다. 나라 경제가 성장하고, 땅값은 올랐다. 간혹 벼락부자들이 생겨났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욕망의 사다리에서 뒤처지고 패배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였다. 이것이 60년대 대중들의 공통된 정서였다. 라디오에서는 조국 근대화를 외치고 '잘 살아보세'가 흘러나왔지만, 실제로 대중들이 좋아하는 대중문화의 정서는 비극이었다.


"60년대 윤정희, 문희, 남정임이 영화계 트로이카로 불렸습니다. 1968년 한 해 남정임이 혼자 58편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윤정희는 50편, 문희가 40편 찍었습니다. 요즘은 송강호같은 스타도 1년에 1편 찍으면 대단한 거죠? 영화제작 편수는 점점 늘어서 1969년 정점을 찍습니다. 한 해 동안 229편이 제작됐고, 관객이 1억7,800만 명이었습니다. 당시 3,000만 인구 시절인데, 애들, 노인 빼고 나머지 국민이 한 달에 1~2번은 영화를 본 거죠. 그런데도 이때 영화 필름이 거의 남아있지않습니다. 방송도 마찬가지고요. 보존하고 기록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던 거죠."


산업화로 인해 노동계급이 성장하면서 새로운 취향의 집단이 형성되고, 주간지가 등장했다. 1968년 나온 『선데이서울』은 최고 인기의 대중지였다. 수영복 입은 연예인 사진, 온갖 스캔들, 요즘 '낚시 기사'라고 하는 것의 원조였던 셈이다.


팝 스타일의 대중음악도 새롭게 등장했다. 60년대는 여전히 정통 트로트가 주류 음악이었지만, 최희준, 패티김, 윤복희, 현미, 조용필처럼 미군을 상대로 공연했던 이들이 대중들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한국 대중음악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록의 대부'라고 불리는 신중현이 이끈 애드 훠를 비롯해 키 보이스 등 록 밴드의 출현은 적극적인 팬 집단을 형성했다. 젊은 세대들의 취향은 점점 서구화됐으며, 1969년 클리프 리처드 내한공연은 여대생이 속옷을 벗어 던졌다는 소문과 함께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어느 시대나 대중문화를 앞장서서 이끌어가고 수용하는 것은 젊은 세대입니다. 항상 젊은 세대가 보여주는 문화적 문법이 기성세대는 낯설고 새롭고, 자기들에게는 불온하게 느껴지는 거죠. 그래서 억압에 들어가고 낙인찍기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게 70년대가 개막했다.


70년대 청년문화에 대한 통제와 규제
"1970년대 젊은 세대가 서양음악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대한민국 젊은 세대가 그런 음악을 하게 됐죠. 6·25세대 이후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은 부모와 미국식 문화를 교육받고 좋아하는 자녀들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죠."


여전히 많이 팔리는 음악은 이미자, 나훈아, 남진이었지만, 청년세대들은 김민기, 송창식, 이장희, 한대수, 신중현을 좋아하고 소비했다. 특히 당시 소수 엘리트층이었던 대학생들이 향유했던 청년문화는 당대 주류문화가 됐던 최초의 사례였다.
청년세대들은 통기타를 치며 우리는 부모 세대와 다르다고 말했다. '저항'이라기보다는 '차이'였지만, 군사정권은 이것조차 용납하지 못하고 억압하기 시작했다.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 단속이 대표적인 사례다.


"1975년 대마초 사태가 터집니다. 많은 가수들이 대마초를 펴서 구속되고 활동이 정지됩니다. 그런데 당시에 한국에는 대마초 단속법이 없었어요. 그래도 그냥 잡아다가 금지시킨 거죠. 대마초 관련 법은 76년에 입법해 77년부터 시행됩니다. 박정희 시대니까 가능했던 거죠."


1975년 연말 대대적인 금지곡들이 떨어진다. 223곡이나 됐고, 그 이후로도 금지곡은 계속 쌓여갔다. 송창식의 '왜 불러'는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신중현의 '거짓말이야'는 불신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에서 금지됐다. 여자 가수들의 비음 섞인 노래, 남자 가수들의 탁한 샤우팅은 창법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비틀즈의 '레볼루션'은 불온,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불건전을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70년대 전반은 60년대 분위기가 남아있었으나 후반이 되면서 완전 유신체재가 됐죠. 박정희 시대지만 유신 전과 후가 문화적으로 다릅니다. 1975년 이후 TV에서 팝송, 청년문화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영화도 검열이 심해져 대중문화 암흑기가 시작됐죠. 영화는 엄격한 검열의 틈바구니에서 질 낮은 하이틴물이나 호스티스물이 주를 이루었고, 대중가요도 다시 트로트 시대로 회귀했어요. 그때 저는 고등학교 때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나 노래는 안나오고 트로트만 나와서 귀를 틀어막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도 모르게 트로트를 흥얼거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대중문화의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공기처럼 나도 모르게 나의 감성과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대중문화의 힘이고 영향인 거죠. 바로 그것 때문에 권력자가 대중문화를 통제하려고 합니다."


1978년 대학에 들어간 김창남 교수는 거기서 산울림, 정태춘의 노래를 가뭄에 단비처럼 만났다. 70년대 말부터 대학가에는 노래패가 만들어졌고, 이는 80년대 민중가요로 이어졌다. 통기타 하나 가지고 술집에 모여서 노래를 부르고, 불법 무단 복제를 환영한다고 쓴 테이프를 제작해서 배포하며, 다시 진지하고 의식 있는 청년문화를 마주한 것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권력의 간섭과 통제는 대부분 향락주의를 배격하고 엄숙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모아졌다. 그는 "유신체제가 내세우는 엄숙주의 문화란 결국 유신체제에 대한 이념적 홍보의 차원이거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복고주의적 가치에 근거한 것으로 사실상 저질 대중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방향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한국 대중문화는 60~70년대를 겪으며 산업적인 틀과 정서적인 틀을 형성했다.


김교수는 "옛날에는 대중문화의 핵심적 가치가 저항이었다면, 지금은 다양성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돌 위주의 상업주의 패배 속에서도 인디음악이 존재하고, 천만 관객시대 블록버스터 영화 틈에서도 작은 영화가 꽃피울 수 있는 다양성. 그는 우리의 대중문화가 시장주의 안에서도 다양성을 회복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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