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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이휘현(2019-07-17 11:10:22)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 유하는, 애초에 영화보다는 시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무림 일기> 등으로 1990년대 한국문단에서 그는 꽤나 알려진 젊은 시인이었던 것이다.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는 그가 시인으로서 제법 인지도를 쌓았으나 영화감독으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던 1990년대 중반 한국출판계에 선보인 제법 괜찮은 에세이집이다.
대학시절, 나는 이 책을 꽤나 아껴 읽었다. 내 이전 세대들, 그러니까 196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에 십대 성장기를 보낸 그들의 아련한 정서가 이 에세이집에는 가득한데, 그렇게 채워진 문장들이 제법 내 심장의 여러 곳을 두드려대었기 때문이다. 올리비아 핫세, 진추하, 이소룡 등 추억의 고유명사들이 1970년대라는 내 먹먹한 유년의 기억을 파고들어 나를 자꾸만 짙은 감성의 그늘로 데려다 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린 적이 있다. 시인 유하처럼 나도 내 동년배들과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책 하나 쓰게 된다면 타이틀을 무엇으로 해야 할까. X세대에 바친다? 혹은 서태지 세대에 바친다?
197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성장과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1990년대에 대학이라는 광장에서 나름의 자유를 만끽했던…, 그러나 IMF라는 빙벽 앞에서 취업문이 굳게 닫혀 안절부절 못하던 내 동년배들의 추억을 한 번 공유해 볼 수 있다면 내 심장이 얼마나 뛸까. 허나 세월은 무감하게 흘러 이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나는 88만원 세대라는 내 후배들의 탄식을 넘어 밀레니얼 세대로 명명되는 1990년대 생들을 분석한 책을 손에 들고 있다. 아, 시간은 깡패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이 영상매체를 다루는 곳이다 보니, 비록 다양한 연령대를 염두에 둔 콘텐츠를 만들어낸다고는 해도 나와 내 동료들은 결국 요즘 젊은 친구들의 사고방식과 문화행태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TV보다는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보고, 책으로 정보를 습득하기 보다는 스마트폰 검색창을 두드리는 친구들에게 우리 기성세대는 그저 혀를 끌끌 차며 바라만 볼 것인가? 오랜 시간 진화를 거듭해온 인류에게 드디어 '퇴행'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탄식할 것인가?
이미 '올드 미디어'가 되어버린 TV매체의 종사자로서, 나는 젊은 세대들의 감각과 문화,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싶다. 그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그 접점을 찾아 젊고 감각적인 킬러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싶다. 굳이 TV콘텐츠가 아니어도 좋다. 나는 영상매체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예를 들자면 유튜브 채널 같은 곳에 내 미래를 걸어보고 싶기도 하다.
첨단 정보에 대한 목마름으로 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목도하고 싶었고, 이 욕망이 내가 <90년생이 온다>를 집어 드는 데에 큰 원동력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 경로로 책을 구입해 집에서 가만히 읽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내 첨단 정보의 출처라는 게 또 책이로구나!! 아… 올드하다, 정말 올드해!!'


저자 임홍택은 1990년대 생들의 특징으로 크게 세 가지를 주목한다. '간단하거나', '재미있거나', '정직하거나'.
1990년대 생들은 호흡이 긴 것은 참지 못한다. 유튜브에 게시된 영상물들이 대개 3분에서 5분 정도의 짧은 것 위주로 소비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유튜브에 게시된 영상물 앞이나 사이에 붙는 광고는 5초다. 15초 광고를 붙이는 네이버가 유튜브에게 죽 쑨 이유 중 하나가 이 광고의 길이에 있다. 단체 대화방에서 이들의 대화는 수많은 단축어와 이모티콘을 통해 빠르게 소통되며, 수많은 은어들이 가상과 현실 속에서 젊은 세대들 사이에 무리 없이 오간다. 그 언어들을 이해할 수 없으면 아재고, 이해할 맘이 없으면 꼰대다.
이렇게 짧은 것을 즐겨 소비하는 1990년대 생들이 가진 또 하나의 행태는 재미를 좇는 것에 있다. 재미야 고대 인류부터 즐겨 찾아 온 동서고금의 인생 조미료 아닌가? 다만 이들이 갈구하는 재미는 '간단함'에 대한 갈증과 맞물려 좀 더 심플한 것을 추구한다. 재미 속에서 의미를 찾던 시대는 갔다. 의미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이를 대표하는 단어가 바로 '병맛'이다. B급 정서에 바탕을 둔 병맛이 젊은 세대들의 콘텐츠 소비에 주요한 자원으로 떠올랐고, 또한 그들은 이러한 취향과 정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가벼운 사람' 취급하지는 말자. 자신의 취향에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 자신 혹은 '개인'에 대한 가치가 기존 세대들에 비해 훨씬 그 비중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상업광고를 통해 등장한 X세대가(바로 내 동년배들!!) 대한민국 사회 최초로 '개인의 의미'를 쟁취한 세대인 것처럼 포장되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세대의 첫 출현은 정치적 권위주의가 본격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 태어난 이들의 전리품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바로 저자 임홍택이 바라본 1990년대 생들의 세 번째 특징 '정직하거나'와 맞물리는 게 아닐까?
우리 사회에 '공정'이라는 화두가 전면에 나서게 된 것도 1990년대 생들이 성인의 문턱에 들어설 즈음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난 세기 한국사회를 요동치던 '각개약진'의 성공신화가 끝나가고 계급의 대물림 현상이 확고해지면서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공정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세대가 또한 1990년대 생들이다. 제도적으로 공정성이 보장된 공무원시험이 이들 1990년대 생들에게 여느 세대보다 더욱 인기 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그 이면에 대한 차분한 이해 없이 '공시족'이니 뭐니 하며 "요즘 젊은 것들은 꿈도 없고 야망도 없어!!"라는 말 함부로 내뱉지 말자. 꼰대가 되는 데에는 별다른 자격증이 필요치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1990년생이 온다>가 잘 쓰여진 책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정보의 밀도가 낮고 읽는 재미도 별로다. 이런저런 자료들이 꼴라주처럼 엉겨 붙어 있어서 책의 구성이 탄탄하게 설계된 느낌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가 사회의 주류로 부상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인류의 역사는 이런 세대교체의 끊임없는 반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 투박한 책이 전하는 메시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바야흐로 꼰대문화는 이제 역사의 격류에 휩쓸려 저 뒤 안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할 것이다, 이렇게.


"1990년생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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