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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 | 연재 [전호용의 음식 칼람 <자급>]
먹방
네번쨰
전호용(2019-04-16 13:06:21)



먹방이 유행한지 10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기성의 시선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저급한 포르노수준으로만 여길 뿐 문화현상으로 해석하거나 의미를 간추려내려는 시도는 없어 보인다. 단 현 편의 먹방은 포르노일 수 있으나 수 만 편의 먹방이 만들어지고 수천만의 사람들이 수 억 번의 공유를 반복하며 사그라지지 않고 10년을 이어간다면 그것은 하위문화의 한 장르로 여겨야하는 것이 마땅하다.


넷상에서 유행하는 말 중에 '병맛'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처음 들어본 사람도 있을 테고 그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불편해하거나 반대로 키득거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병맛'이란 '병신 같은 맛'의 줄임말로 언어적으로만 접근한다면 장애인비하 발언이므로 주류언론이나 심의가 가능한 방송을 비롯한 지면에서는 발설할 수 없지만 넷상에서는 다른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널리 사용된다. 누군가는 '병맛'이란 말을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해 보려는 시도로 무민(無mean)이라는 신조어(무민이라는 만화 캐릭터에서 따온 말이기는 하지만)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그 방대한 함의를 겨우 '의미없어'로 축약하거나 대체할 수 없었으므로 사용되지 않는 말이 되었다.

'병맛'이란 말은 디시인사이드의 웹툰에서 시작되었는데, 조잡한 그림으로 말도 안 되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도 어려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비아냥거리며 '병신 같은 맛'이라고 댓글을 달았고 그 말을 줄여 '병맛'이라고 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조잡하고 말도 안 되는 만화를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오고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더럽게 재미없는데 이상하게 웃기네' 라는 모순적인 반응이 네티즌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병맛'이란 말이 부정적 의미보다는 긍정적의미로 1%정도 역전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후 병맛 웹툰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고 질적 성장도 거듭하게 되었다.

나는 이 과정을 지켜보며 70년대 유행했던 펑크문화를 떠올렸다. 영화 <우리들의 20세기>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펑크음악에 심취해 질풍노도를 해쳐나가는 아드님을 바라보던 엄마는 조잡하고 시끄러운데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이기까지 한 이야기를 전하는 저 노래가 뭐가 그리 좋은 거냐고, 예쁜 음악을 듣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한다. 그러자 아들과 아들의 친구는 이렇게 대답한다.


"예쁜 음악은 사회부정과 부패를 숨기는 수단이에요. 밴드실력은 형편없지만 느낌이 있잖아요. 음악적 기술 같은 건 원치 않아요. 그게 잼있는 거에요. 열정이 표현수단보다 훨씬 큰 경우에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가 나오거든요."

다시 말해 오늘날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생성되고 소비되는 병맛스러운 카툰, 동영상, 음악, 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행위들은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낯선 것, 인터넷이 낳은 포르노와 같은 사생아가 아니라 기존부터 이어져오던 저항이란 행위를 현세대 나름의 형태로 표현해낸 새로운 저항이자 놀이인 것이다. 세대는 다르지만 저항의 본질은 비슷하다. 다만 현세대에겐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영토가 주어졌고 펑크세대에겐 기성세대와 같은 영토를 공유해야 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를 만드는 갈림길인데, 펑크세대의 저항은 결국 기성과의 공존이었으므로 위악적으로 보일지라도 인정투쟁이었던 반면, 현세대는 인터넷이라는 무한의 영토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기성과의 공유나 인정을 갈구하지 않는다. 기성세대에 비해 현세대는 오프라인에서 매우 유순해 보인다. 기성의 눈으로 보자면 예의바르고, 질서정연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애들을 참 잘 키웠어'라고 자뻑 할 만큼 말도 잘 듣는다. 이러한 태도는 기성이 오프라인에서 요구한 것이었고 그러한 요구에 저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기성이(부모나 선생이)요구하는 가이드라인을 준수하기만 하면 온라인접근권한 및 오프라인에서 필요한 의식주를 비롯해 학점까지 해결해 주는데 구지 딴지 걸 필요가 뭐 있을까. 오프라인에선 대단히 실용적인 선택을 하는 것에 불과하고 인터넷에 접속하면 오프라인에서의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넷 안에서는 예의바르지도 않고 타인을 배려할 생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윤리라는 코르셋도 가볍게 벗어던지고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를 표출하며 살아간다.

어떻게 그렇게 이중적일 수 있느냐며, 마치 그것이 죄악인양 묻겠지만 생각해 보시라. 인간은 누구나 이중적, 삼중적, 혹은 '23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던가. 말하자면 우리는 '병신 같은 새끼'라는 말을 입이나 마음에 담고 살아가면서도 '병맛'이란 말에 윤리를 덧씌워 불편해 하는 이중성을 보이지 않던가? 결국 우리가(그러니까 기성이)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율배반적으로 살아왔던 삶을 현세대는 인터넷과 오프라인에서 우리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며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까지는 미리 예단하지 말자. 백날 예견해봐야 알지 못한다. 80년대로 넘어가면서 펑크는 사망선고를 받고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이 낳고 기른 90년대 얼터너티브, 포스트모던과 같은 기조는 오늘날의 우리를 있게 했으니까.

다시 먹방으로 돌아가서, 먹방을 단순히 먹는 포르노로만 바라보면 현세대가 그것에 열광하는 이유를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다. 먹방은 기성이 강요했던 웰빙, 웰메이드, 잘 사는 새끼들, 잘난 새끼들, 강요된 윤리, 뭔가 가르치려는 자세에 대한 저항이자 놀이이다. 아주 병맛스러운, 무슨 이유로 저걸 저렇게 먹는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이상하게 재미있어서 키득거릴 수 있는 그들만의 재미이고, '혹시 당신들도 이걸 보고 재미있으면 웃어보던지' 라는 비아냥 같은 것이다.

현세대는 1차적인 니즈를 해소하기 위해 먹방을 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집에서 키우는 짐승 마당쇠(개)는 화면에 보이는 음식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실제하는 음식에만 반응을 한다. 사람이어서 포르노나 먹방을 보며 반응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을 달리 해석해 입으로 느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먹방은 동물적인 니즈를 해소하려는, 먹고 싶은 걸 대신 먹어주는 게 즐거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잘 꾸며진 방송 말고 날 것 그대로, 먹기만 하는 모습이 병신 같아 보이지만 어쩐지 재미있어서 먹방에 열광하는 것이다. 기성은 그 재미라는 것을 너무나도 간과하는 듯하다.


나는 먹방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기성의 말처럼 먹방이란 것이 욕망을 자극하고 해소하는 문화라면 VR기술(가상현실)이 그 방향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어서 헤드기어를 쓰고 먹방을 보면 그 맛과 냄새, 온도, 촉감까지 느껴지지 않을까. 그러나 과연 그러한 기술이 실생활에 도입된다면 먹방이란 것이 계속해서 유지될까. 그렇게 된다면 먹방이라는 것 자체가 필요치 않게 되는 것 아닐까. 구지 남이 먹는 걸 감상하며 자위할 필요도 없이 컵라면 하나를 먹으며 제이미 올리버가 만든 음식의 맛과 향, 포만감까지 느낄 수 있는데 뭐하러 남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겠는가. 아마도 기성은(지금 말하는 기성은 미래의 현세대일 것이다.)그 욕망을 충족시켜 한 몫 챙겨볼 요량으로 맛과 냄새, 촉감, 온도까지 느껴지는 VR기술을 발전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현세대는 또 다른 병맛을 찾아 나설 것이다. 기성의 요구에 반하는 어떤 즐거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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