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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 | 연재 [전호용의 음식 칼럼 <지금>]
도토리
전호용(2019-03-22 16:53:22)

사람의 혀는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을 느낀다고 한다. 이렇게 구분지어지는 오미는 내 몸 안에 존재하는 혀가 느끼는 맛이다. 반면 매운맛과 떫은맛은 혀에 분포되어있는 감각기관을 통해 느껴지는 맛이 아니라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입이 느끼는 자극이다. 그래서 맛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달리 말 해 나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입 안으로 들어온 물질의 작용으로 인해 떫거나 맵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 중 떫은맛은 오늘 이야기 할 도토리의 절대적인 특징이다. 떫은맛은 도토리뿐만 아니라 수많은 식물들이 가지고 있는 방어수단 중 하나이다. 대체로 포식자들로부터 후손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수단으로 떫은맛을 이용하는데 밤, 호두, 잣, 연자(연꽃의 씨앗)와 같은 견과류들은 속껍질에 타닌을 함유해 포식자들로부터 종자를 보호하고, 감, 살구, 자두와 같은 과실들은 종자가 단단하게 여물 때까지 과육에 타닌을 함유해 종자를 보호하다 종자가 단단해지면 과육을 당화시켜 포식자를 불러 모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런데 도토리는 모두 떫다. 단단한 과피도 떫고, 내피도 떫은데다 잘 익은 과육마저도 지독하게 떫다. 탐스럽다하여 한 입 깨물었다가는 입이 떫어 한참동안을 고생해야 한다. 이 떫음, 과하다 싶을 정도여서 대부분의 인류는 이것을 식량으로 삼지 않았는데 오직 이 조선 땅에서만은 예외였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음식의 특징은 기다림이다. 기다림 중에서도 '우러남'을 미덕으로 여긴다. 젓갈은 생선을 소금에 절여놓고 진액이 우러나길 기다려 먹고, 간장은 메주를 띄우고 말려 곰팡이가 생겨나길 기다렸다가 소금물에 절여 메주의 진액이 우러나길 기다리는 것이다. 김치도 익기를 기다리고, 장아찌 또한 익기를 기다렸다 먹는다. 극단적인 예로 복어알은 맹독을 품고 있어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만 소금에 절여 3년 이상을 기다리면 독은 사라지고 세상에서 맛 볼 수 없었던 진귀한 음식으로 다시 태어난다. 전라도에서는 이를 '우려먹는다' 라고 표현하는데, 떫은 감을 그저 항아리에 담아두기만 했다가 익기를 기다려 꺼내 먹는 행위 또한 '우려먹는다' 라고 말한다. 마른 멸치나 다시마를 물에 담가두거나 끓여 국물을 우려내는 것처럼 원재료에 있는 진액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만을 '우리다' 라고 하지 않고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행위 전체를 '우리다'라고 하는 것이다. 먹는 것에 대한 인식이 이러했으니 도토리 또한 못 기다려줄 만큼 독종은 아니다. 복어알도 먹는 사람들인데 그깟 도토리쯤이야 어떻게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다 익은 도토리는 저 알아서 땅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떨어진 도토리를 주어모아 볕이 잘 드는 바닥에 멍석을 깔고 펼친 뒤 오며가며 발로 밟으면 겉껍질이 깨지고 과육이 마르면서 자연스럽게 탈피가 된다. 도토리과육은 결국에는 분쇄하여 가루로 만들어야하므로 밤이나 잣처럼 온전하게 과육을 보전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예전에는 이렇게 발로 밟아가며 햇볕이 껍질을 벗겨주길 기다렸다면 지금은 도토리 겉껍질을 벗겨주는 정미기가 따로 있다. 산에서 주운 도토리를 들고 방앗간에 찾아가면 도토리 껍데기를 벗겨주므로 한 가지 기다림은 덜은 샘이다.


이렇게 겉껍질을 벗겨낸 도토리를 너른 대야나 항아리에 담아 물을 부어 놓고 떫은맛이 빠지기를 기다린다. 이 때 수시로 물을 갈아줘야 하는데 갈색 물이 모두 빠지고 말강물이 나올 때까지 물을 갈아주면 떫은맛이 사라진 도토리가 남는다.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개울이 옆에 있다면 도토리를 자루에 담아 개울물에 하루나 이틀 동안 담가두면 물을 갈아줄 필요도 없이 흐르는 물에 떫은맛이 씻겨가니 한결 수월하고 사람의 손으로 물을 갈아준 것 보다 깔끔하게 떫은맛을 제거할 수 있다. 산에서 개울물을 마시다 보면 물맛이 조금씩 다르다. 소나무숲에 흐르는 물은 조금 달고 떫은맛이, 바위산은 맑고 알싸한 맛이 난다면 참나무숲에 흐르는 물은 색이 검고 떫은맛이 나는데 참나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타닌 때문이다.


떫은맛을 우려냈다면 다음부턴 일이 수월해진다. 도토리과육을 믹서기에 갈거나 방앗간에 찾아가 빻아서 물과 혼합 한 뒤 면포에 담아 국물을 쥐어짜면 걸죽한 국물이 나오는데 그 안에 전분이 포함되어 있다. 물이 다 빠져나가면 다시 물을 부어 쥐어짜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을 서너 번 반복하면 면포 안에는 섬유질과 속껍질만 남고 짙은 갈색을 띈 국물이 모아지는데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바닥에 도토리전분이 가라앉는다. 가라앉은 전분을 남기고 윗물을 따라내면 비로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도토리가루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얻은 도토리전분을 곧바로 끓이면 도토리묵이 된다. 묵을 끓일 때 소금을 조금 넣어주면 잘 엉기고 탱탱한 묵을 만들 수 있다. 가라앉은 도토리전분을 말려 수분을 제거하고 절구에 빻으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도토리가루가 된다. 이 가루에 밀가루를 더해 국수를 만들거나 전을 부치기도 하고 쌀가루를 더해 떡을 만들기도 한다. 도토리묵을 가늘게 썰어 볕에 널어 말려 묵말랭이를 만들기도 한다. 묵말랭이는 도토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다림의 정점이다. 말린 묵을 다시 삶아내면 탱탱하고 쫄깃한 식감을 느낄 수 있는데 사뭇 펜네나 푸실리와 같은 파스타면과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깊고 풍부한 맛을 낸다. 묵말랭이는 나물처럼 볶거나 무쳐 요리하고 잡곡처럼 밥을 지을 때 얹어 먹는 부식으로 활용되는데 파스타요리법 그대로 묵말랭이를 활용해 파스타를 만들면 그 맛이 매우 훌륭하다. 토마토소스 보다는 크림소스나 간단한 오일파스타용으로 적합하고 다양한 버섯들과 조리해도 좋다. 스튜에 넣어도 불거나 퍼지지 않고 쫄깃한 식감을 유지하므로 활용하기에 좋다. 뿐만 아니라 여름철에 시원한 콩국에 삶아 식힌 묵말랭이를 면을 대신해 넣거나 냉국에 고명으로 넣어도 씹히는 식감과 풍미가 일품이다.


'떨떠름하다'라는 표현이 있다. 마음에 내키지 않거나 불편함을 느낄 때 표현하는 말이다. 떫음은 입이 느끼는 맛이지만 달콤하다거나 씁쓸하다는 표현처럼 마음의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떫음은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느끼는 자극이다. 떨떠름함은 관계를 통해서 생겨난 마음이다. 자식이, 부모가, 상사가, 부하가, 남편이, 아내가 혹은 누군가가 오늘따라 유난히 떨떠름하게 느껴질 때가있다. 그래서 밀쳐내고 화내고 내던지고 돌아섰다면 다시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나를 떨떠름하게 만든 그는 스스로 지켜야하는 매우 소중한 씨앗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그 떫음을 우려내고 독기가 사그라질 동안 기다려줘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이리도 기다림에 익숙했던 민족이었는데 오늘날은 음식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너무나 성급하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지 못하고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도토리묵처럼 사람도 그렇게 살아온 지난 삶을 생략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어떤 사람이 도토리보다 덜 떫을라고. 부디 이 땅에서 기다림과 우러남을 미덕으로 여기는 관념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묵말랭이를 우물우물 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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