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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 | 연재 [여행유감]
터덕터덕 낙타 등에 몸을 싣고 사막을 가던 날이 있었네
내가 나에게 준 선물
윤지용(2018-02-07 17:16:44)



10년쯤 전에 프랑스의 어느 퇴직 언론인이 쓴 여행기를 읽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였다. 그는 60대 중반의 나이에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까지, 1만2천 킬로미터가 넘는 실크로드의 전 구간을 4년여에 걸쳐 도보로 여행했다.  안 그래도 그 무렵 어느 인터넷매체에 연재되던 실크로드 이야기에 빠져있던 터였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 혼자서 객지생활을 하면서 팔자에 없던 일을 하던 시절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이 내 한가한 인생 중에서 가장 각박하고 고단한 시기였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였다. 몇 년 동안 열정을 쏟았던 일에서 좌절과 환멸만 얻고 나서 쓸쓸하게 빈둥거리고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술자리에서 실크로드 여행을 제안 받았다. 나는 정말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열렬히 찬동했다. 지금이야 가끔 여행 다니면서 SNS에 하도 자랑을 해대니까 남들은 내가 여행깨나 다녀본 사람으로 알지만, 사실 그때까지는 업무상 출장으로 제주도 몇 번 가본 것 말고는 제대로 여행 한번 못해본 무지렁이였다. 더구나 ‘실크로드’라니, ‘딸라 빚’을 내서라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누군가 “여행은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난생 처음 여권이라는 걸 만들고 비행기를 탔다. 2012년 여름이었다. 중1짜리 아들과 함께 떠났다.
예로부터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던 도시 시안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시안(西安)은 1936년 중국 국민당 집권자였던 장개석이 항일전은 뒷전으로 하고 공산당 토벌에만 몰두하는 것에 반발하여 군벌 장학량이 장개석을 연금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던 ‘서안사변’이 일어났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한(漢)나라부터 수(隋)나라, 당(唐)나라까지 중국의 여러 왕조들이 수도로 삼았던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였다. 널리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사건을 두고 흔히 ‘장안의 화제’라고 하는데, 그 ‘장안(長安)’이 바로 시안의 옛 이름이다.
여러 왕조들의 도읍지답게 많은 역사유적과 볼거리들이 있었지만, 시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회족거리’와 ‘병마용갱’이다. ‘회족(回族)’은 당나라 무렵부터 중국 각지에 정착한 아라비아인들이나 투르크족(돌궐족)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종교적으로는 주로 무슬림들이다.
시안 외곽지역 진시황릉 근처에 있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죽은 진시황을 호위하기 위해 만든 ‘흙인형 군대’가 묻힌 곳이다. 수백 마리의 말과 수천 명의 군대를 실물 크기와 모양 그대로 흙으로 빚어 땅에 묻었는데, 2천년도 더 지난 1974년에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기원전 200년 무렵 중국에 철기문명이 막 도입되었던 시절의 낮은 생산력으로 그런 큰 역사(役事)를 벌였으니 얼마나 가혹한 수탈과 강제노역이 있었을까? 하기야 그 절대권력으로 살아 있는 진짜 병사들을 순장(殉葬)시키지 않은 것이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안에서 이틀을 묵은 후 기차를 타고 둔황으로 갔다. 기차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거리라서 침대칸에 탔다. 차창 밖으로 계속 똑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무지. 말 그대로 ‘대륙’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둔황(敦煌)은 먼 옛날 한나라 시대부터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당나라 때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 서역을 정벌하기 전까지는 이곳이 중국의 서쪽 끝이었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스님도 둔황을 거쳐 갔다고 했다. 둔황 남쪽에 있는 ‘막고굴’은 바위산 단층 절벽에 굴을 파고 불상을 모셔둔 석실들이 천 개에 이른다고 해서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부른다. 나는 별 감흥이 없어서 밖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제복을 입은 안내원이 와서 한참 동안 훈계를 들었다. 중국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역사문화유적지라서 금연구역이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막고굴 근처에 명사산(鸣沙山)이 있었다.  박남준 시인이 “세상에 지친 이들이 여기 올라 모든 울음을 묻고 갔으리 / 안으로 울음을 묻고 묻어 산을 이룬 모래산”이라고 했던 그 명사산이다. 수백만 년 동안 바람이 날라다준 고운 모래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모래언덕(砂丘)이다. 바람이 빚은 부드러운 모래곡선들이 아름답다. 모래언덕이라고는 하지만, 동서로 40㎞, 남북으로 20㎞, 면적이 800㎢라니 사막이나 다름없었다. 아들과 함께 모래썰매를 타고 낙타도 탔다. “터덕터덕 낙타 등에 몸을 싣고 사막을 가던 날이 있었네”(박남준 시 ‘명사산을 오르다’ 중)
둔황을 떠나 투루판으로 향하던 날, 둔황에서 묵었던 유스호스텔 입구의 방문자용 게시판에 쪽지를 써서 붙였다. “아들 윤모세와 아빠 윤지용, 2012년 여름 실크로드를 걸었다. 7.31~8.1 둔황에 머물다” 그때 중1이었던 아들은 나중에 자기가 대학생이 되면 혼자 배낭여행을 와서 그 쪽지를 찾아가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그 아이가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어쩌는지 두고 봐야겠다.
투루판은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인데, 지형이 분지라서 몹시 더웠다. 우리가 도착한 날 숙소 로비에 있는 온도계를 보니 섭씨 47도였다. 투루판 근교에 있는 화염산은 말 그대로 화염(火焰) 속처럼 뜨거웠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기온이 높아서 화염산이 아니고 그 일대의 지질이 붉은색 사암이라서 멀리서 보면 불붙은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서유기>에 나오는 산이라는데 입구에 삼장법사와 손오공 등 일행의 동상이 있었다. 옛날에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는 길목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투루판 근교에 교하고성(交河古城)이라는 유적지가 있다. 두 개의 강물이 만나는 곳에 있던 성이라서 ‘교하(交河)’라고 한다는데, 우리말로 하면 ‘두물머리’일까? 기원전 1세기경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번성했다는데, 지금은 옛 토성의 잔해만 일부 남아 있다. 폐허가 된 성터를 뙤약볕 아래 거닐다가 엉뚱하게도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시조가 떠올라 갑자기 허무해졌다.
투루판이 ‘오아시스 도시’라기에 어딘가에 물이 샘솟는 연못 같은 것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천산산맥에서 흘러내린 물을 인공수로로 끌어와서 사막을 농경지로 바꾸고 농사를 짓는단다. 그것도 사막의 뜨거운 볕에 물이 증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하에 수백 킬로미터의 수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려 천년 전에! 그 지하수로가 지나는 곳곳에 구멍을 뚫어 만든 우물을 ‘카레즈’라고 하는데 이 카레즈들 덕분에 투루판 사람들은 풍성한 과일이 넘쳐나는 농경지를 일구어냈다. 특히 포도가 많이 나는데 포도의 종류만 수십 가지가 넘고 시내 곳곳의 노점상들도 모두 갖가지 포도나 건포도들을 팔고 있었다. 강수량이 거의 없고 일조량이 많아서 그런지 달디 달았다.
투루판을 떠나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를 향했다. 나에게는 생소한 지명이었지만 인구가 300만 명이 넘는 현대적인 대도시였다. 우루무치는 몽골어로 ‘좋은 목초지’라는 뜻이라는데, 북서쪽에 있는 몽골이 지난날 대제국 시절에는 이곳까지 지배했던 모양이다. 우루무치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바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내륙 한가운데에 있어서 ‘대륙의 배꼽’이라는 별명도 있다고 한다.
우루무치를 비롯한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오랫동안 투르크 계열 위구르족의 땅이었다. 신장이라는 이름 자체가 ‘신강(新疆)’의 중국식 발음이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새로 점령한 강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본래는 인구비중도 위구르인들이 절대다수였다. 지금은 한족들의 이주를 장려하여 한족의 비중이 위구르인에 육박한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정책의 일환으로 한반도에 이주해온 일본인들,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한 이스라엘 정착촌들이 생각났다.
신장위구르지역은 유독 해가 늦게 저물었다. 밤 열시가 다 되어서도 날이 환했다. 우루무치는 북경과 경도가 30도 가까이 차이가 나서 실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두 시간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북경표준시를 쓰고 있다. 그러니 북경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해가 뜨고 지는 것이다. 이것도 어쩌면 ‘중화주의’ 탓인 듯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우루무치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타클라마칸 서쪽 끝에 있는 도시 카쉬카르(카스)로 갔다. 이번에도 꼬박 하루 동안 기차를 탔다. 현지의 위구르인들은 대부분 기차 안에서 파는 음식을 사먹지 않고 각자 가지고 탄 ‘란’으로 끼니를 때웠다. 이 지역에서 가장 흔한 음식이 란과 양고기였다. 본래 육류를 즐겨 먹지 않는데다가 양고기 같은 ‘낯선 고기’를 두려워하는 나는 여행 내내 란과 과일로만 연명했다.
카쉬카르부터는 중국인(한족)들이 드물고 주민 대부분이 위구르인들이었다. 그래도 곤봉과 자동소총을 들고 무리지어 골목골목 순찰하면서 무작위로 검문검색을 하는 중국 인민무장경찰들은 오히려 더 많이 눈에 띄었다. 마치 ‘식민지’같은 분위기였다. 카쉬카르 기차역 근처에는 높이가 수십 미터 되는 초대형 동상이 우뚝 서서 시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마오쪄뚱이었다. 마치 “여기도 중국땅이니 까불지들 말고 복종해라” 하는 듯 위압적인 자세가 거슬렸다.
카쉬카르의 첫날에는 시내에 있는 ‘그랜드 바자르’와 ‘향비묘’를 둘러보았다. 중앙아시아 일대의 유목지역과 인도 등에서 시장을 ‘바자르’라고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자선 바자회’ 등에 쓰는 bazar가 여기서 유래한 것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카쉬가르 근교에 있는 향비묘(香妃墓)는 위구르 출신으로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첩으로 갔던 여인의 묘라고 알려져 있다. 몸에서 향기가 나서  ‘향비(香妃)’라 했다는데, 사실 이 건물은 향비의 묘가 아니라 위구르의 지도자였던 아팍호자의 가족묘당이라고 한다.
카쉬카르 서쪽으로 산맥처럼 드리워진 봉우리들이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파미르고원이다. 카쉬카르에서 대절한 승합차로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200킬로미터쯤 달려서 파미르고원 기슭의 카라쿨호수에 갔었다. 이 호수를 지나서 더 가면 중국과 파키스탄의 국경인 쿤자랍 패스(Kunjerab Pass)라기에 ‘파키스탄 입국비자도 받아올 걸’하고 후회했다. 빙하가 흘러내린 물로 만들어졌다는 투명한 호수에 발을 담가보려다가 물이 너무 차가워서 포기하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 호숫가에 키르키즈족 유목민들이 ‘유르트’라는 천막을 치고 양떼를 기르고 있었다. 마을에서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었는데, 열 살쯤 되는 형이 어린 동생을 낡은 회전의자에 앉혀놓고 놀이기구처럼 빙빙 돌려주고 있는 모습이 정겨웠다.



카쉬카르를 떠나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의 호탄에서 이틀을 묵고 밤샘버스로 사막을 종단해 다시 우루무치로 돌아왔다. 호탄은 황옥의 산지로 유명하다는데 과연 거리 곳곳마다 옥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타클라마칸은 위구르어로 ‘돌아올 수 없는’이라고 한다. 장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막을 건너려다 모래땅에 묻혀 불귀의 객이 되었을 텐데, 에어컨이 달린 버스를 타고 잠을 자며 지나는 것이 약간 미안하기도 했다.
우루무치에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22일 동안의 여행을 마쳤다. 나중에 구글지도로 확인해보니, 국제선 항공이동을 빼고 현지에서 육로로만 편도 4천 킬로미터가 넘는 긴 여정이었다. 그래봤자 실크로드 전체로 보면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주로 신장위구르자치구의 타림분지를 반 바퀴 돈 셈인데, 동양에서 보면 실크로드의 초입 구간이고 서양인의 입장에서는 실크로드의 마지막 구간에 해당한다.
지금도 가끔 그해 여름을 떠올려본다. 소박하고 서글서글했던 위구르 사람들, 파미르고원의 눈 덮인 봉우리들, 투명했던 카라쿨 호수의 자잘한 물결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의 총총했던 별들이 생각난다. 나로서는 생애 첫 여행이어서, 게다가 오랫동안 설렜던 실크로드여서, 무엇보다 아들과 함께였으므로, 오래오래 잊지 못하는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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