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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9 | 연재 [수요포럼]
동성애는 찬성 반대의 문제가 아니다
성적소수자,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강미선(2017-09-19 10:59:38)



성적소수자, 그 용어에 대한 '이해'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퀴어' 동성애와 관련된 비슷한 말은 많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별 차이를 못 느끼고 사용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성적소수자에 대한 이해는 용어부터 시작된다.
"저는 성적소수자라는 용어를 써요. 보통은 성소수자라고 쓰죠. 대부분 퀴어 퍼레이드를 많이 들어 보셨을 테니 '퀴어'라는 단어가 익숙하실 거예요. 그리고 동성애자, 다른 말로 게이, 레즈비언 등 조금만 더 공부하시면 용어 자체에 대한 혼란도 오게 되죠"
사회적으로 '동성애'라고 말하면 부정적 인식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 현실이다. 동성애에 찬성한다고 말하면 "너 동성애자야?"라는 반문이 돌아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급조차 꺼리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한채윤 이사는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게 됐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동성애자는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라는 논쟁을 많이 벌여요. 이 질문을 돌이켜서 이성애는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라고 했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만약 이성애가 선천적이고 동성애자가 후천적이면, 이성애가 무려 후천적이기까지 한데 동성애가 생기는 거예요. 그럼 둬야죠. 그리고 사람들의 '동성애'에 대한 논쟁 자체의 구도가 동성애에 대한 태도를 다뤄요. 동성애가 선천적이면 하지 말자, 후천적이면 내버려 둘 것인가, 존중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불행한 인생에 빠지지 않고 이성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인가. 동성애에 대한 태도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에 놓치는 것이 많아요. 그리고 '이성애가 훨씬 많으니까 자연스러운 것이다'라면 우리는 동성애를 알기 위해 이성애를 공부해야 해요. 그럼 기존에 동성애에게 했던 질문을 바꿔 던져 봐야죠. 이성애는 어쩌다가 생긴 걸까, 이성애는 선천적인 걸까?"



1920년 처음 들어온 '동성애', 편견과 함께 인식되다
동성애라는 단어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1920년도로 그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동성애'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19C 후반이 되면서 한꺼번에 '동성애',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등의 용어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혼란이 생겼다. "'동성애'라는 단어는 처음에 독일어로 만들어졌고, 독일어가 영어 번역 된 것이에요. 그리고 영어로 번역된 게 우리나라에 들어온 거죠. 그래서 질문을 '동성애자가 있나요?'라고 하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동성끼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나요?'라고 하면 있다는 거죠. 이런 질문이 왜 다르냐고 말씀드리는 거냐면 왜 19C 중반 후반에 갑자기 동성끼리 사랑하는 두 사람을 연인 부부 커플 이런 용어가 아니라 동성애자야 라고 부르고 싶어졌을까를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 배경에는 17C~19C 사이에 크게 발전한 해부학이 숨어있다. 그 이전까지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과학적 접근이 아닌 '종교적 접근'을 하면서 이해를 해왔는데, 해부학이 발전하며 인간을 분석하려고 시도한다. 한채윤 이사는 "그것이 잘못 해석되어지면서 인간의 성적 행동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눠, 낙인찍었다"고 말한다.
"그 전까지는 인간을 '신이 만든 것'이라고 정의하며 탐구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해부학이 발전하면서 정자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 이전에는 정액만 알았죠. '하얀 액체가 들어가면 애기가 만들어져서 나와!'하면서 신기해했는데 17C 초에 정액이 아니라 정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17C 후반에 가면 이걸 어떻게 이해하게 되냐면, 정자 하나에 조그만 소인이 들어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죠. 남자의 정자가 여자한테 들어가면 여자가 인큐베이팅 해서 낳는다는 인식이 생기죠.  근데 이렇게 설명하면 여자는 아무 역할이 없어요. 보관역할만 하는 거죠. 이로 인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위치, 여성이 남성을 대할 때의 사회적 태도 등이 많이 바뀌죠.  이런 식으로 잘못 해석되어지는 것 때문에 정신의학과 심리학이 발전하게 됩니다. 19C에는 인간의 성 행동을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려고 하고, 낙인을 찍습니다. 인간의 성행위, 성행동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걸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려고 해요. '그거 이상하지 않아?', '비정상 아니야?'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게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이 발전하게 되는 계기인데, 비정상인 것들을 먼저 뽑아내는 거에요. 낙인을 찍으면, 낙인 찍히지 않은 것들은 자동으로 정상이 되기 때문이죠"
앞서 말했듯이 1920년대에서야 처음으로 한국에 동성애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 온지 100년도 안된 '동성애'가 이슈가 되고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한채윤 이사는 "동성애에 대한 개념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사람과 사람 간에 동성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라는 것에 홀린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성애가 처음 들어왔을 무렵의 기사를 보면 '동성애에 희생된 두 처녀'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해석하면 두 사람이 동성애를 한 게 아니라, '동성애가 두 처녀를 홀려서 죽게 만들었다'라고 말하는 거죠. 80년대가 되면 사람들이 에이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에이즈가 동성애와 함께 엮입니다. '에이즈라는 무시무시한 병이 있대, 붉은 반점이 생기고 치료제도 없대. 그런데 그건 동성끼리 섹스하면 걸리는 병이래'라는 식으로요. 한 방송에서는 '한국에는 에이즈 감염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성애자가 없기 때문이죠'라고 말합니다. 한국에는 원래 없던 것이라는 태도로 보려고 합니다. 전통적이고 좋은 것이 아니라 그 편견과 함께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해방 후 국가가 재건될 때를 이야기 하면, 그 시절엔 게이바라는 단어를 쓰진 않았지만 이미 서울에 게이바가 있었습니다. 전쟁 이후에 도시화가 되고, 그 도시에 사람들이 모이죠. 예전에는 무조건 모든 사람은 다 결혼해야 하는 시대였는데, '결혼을 언제 할 것인가'가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되고 '자유부인', '이혼' 등의  새로운 이야기들이 들어옵니다. 이 때는 게이, 레즈비언 이라는 단어가 들어오진 않았지만, 같은 여성을 사랑하는 모임은 있었어요. 그중에 하나가 '여성운전자 모임'이었죠. 모두가 여성운전자는 아니었지만, 그 시대에 여자가 돈을 제일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여성운전자라서 그렇게 불렀었죠. 요즘에도 '레즈비언 모임'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여성주의 모임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잘 먹히는 것처럼요"
그는 '동성연애', '호모'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말한다. "연애라고 하면 젊은 시기에 잠깐 뭐한다고 느껴지는데, 사랑한다고 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인생이 어떻게 꾸려질 것인가' 이런 느낌이 듭니다. '호모'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호모새끼'라는 말과 같이 쓰여서 정말 상냥한 말투로 '호모야'라고 불러도 기분 나쁜 말이 될 수 있어요. 92년도 시사저널 표지를 보면 개념 구분도 잘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남성으로 태어난 여성들의 세계' 이때만 해도 성전환자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고 게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았죠.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가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았어요"


'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과 '퀴어문화축제'가 만들어지다
"91년도에 주한레즈비언 모임인 '사포'가 만들어집니다. 사포를 처음에 인터뷰를 했는데, 한국에 처음 들어올 때 '아 여기가 레즈비언 천국이구나'라고 생각 했대요. 여자들이 손잡고 다니니까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게 아닌 거예요. 레즈비언이라고 하면 엄청 기겁하고 그러니까 우리만의 숨구멍을 만들자 해서 주한 레즈비언 모임이 만들어지게 됐죠. 외국인 모임이라고 하지만 그 외국인의 한국 친구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이 모임에서 서로 서로를 알게 됩니다. 이런 식에 힘입어서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 '초동회'가 만들어지죠.
그 다음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라고 낙인찍히는 것도 문제지만 레즈비언의 경우, 여자가 여자답게 살지 않는 것, 여자라고 월급도 적게 주고, 남성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여성으로서 삶의 억압도 있어요. 이걸 '이중억압'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어떻게 위로하고 살아남을 것인가 고민하면서, 남성 동성애자와 여성동성애자의 갈 길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 서로 나눠지게 되는데 그게 '친구사이'와 '끼리끼리'입니다"
"95년대에는 대학 내 동성애자 모임이 만들어지는데, 이 때만해도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SKY에서 동성애자 모임이 만들어지니, '저렇게 똑똑한 애들이 만드는데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면서 진지하게 다가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96년도에는 pc통신 천리안 하이텔 등에서 청년운동인권모임이 만들어지고, 97년도가 되면 처음으로 거리로 나와 집회를 하게 됩니다. 퀴어문화축제가 시작되는데요. 서울 퀴어영화제라는 행사를 97년도에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하려고 하는데, 연세대 동문회에서 영화제 개막한 날 전원 스위치를 내려버리는 일도 발생했죠..이런 어려움 속에서 2000년도에 서울 퀴어 영화제가 처음으로 기금을 받아요. 저희 입장에서 처음으로 의미있는 행사를 해야하지 않을까 해서 토론회, 전시회, 공연 등을 갖춘 문화축제를 하자고 결론이 납니다. 이틀짜리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를 했는데, 독립예술제를 차 없는 거리에서 하려고 하는데, 아주 우연히 저희도 같이 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날 비가 온 겁니다. 퍼레이드 한다고 한 단체가 하나도 안 왔어요. 그래서 대학로 그 길을 단독으로 성적소수자 50명 정도가 행진을 한 거에요. 첫 번째 퍼레이드를 우연히 그렇게 하게 됐죠. 우연히 들어간 퍼레이드가 가장 큰 행사가 된 것이구요"
한채윤 이사는 올해 열린 퀴어문화축제에서도 페레이드기획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는 오늘의 퀴어문화축제가 있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퀴어문화축제에서 무대 공연을 하는데, 보컬 분이 얼굴이 안 보이게 천을 뒤집어쓰고 공연을 했어요. 공연은 해야겠고, 자기가 성적 소수자라는 걸 알리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까봐 두려웠던 거죠. 사실 그렇게 까지 해서 무대에 올라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한 번은 퀴어퍼레이드를 진행해야 하는데 종교단체에서 차로 막더니 퍼레이드로 지나가야 하는 길을 의자로 막으셨어요. 지나가던 분들은 다리 아프니까 앉아서 구경하고 이러다 보니 앉고, 결국은 퀴어퍼레이드가 저녁에서야 진행됐죠" 기독교보수단체의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최근 들어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한 채윤이사는 "보수 정권과 보수 개신교에서 세력을 키우는 수단으로 '반공'을 내세웠는데 시대 변화에 따라 효과가 약해지자 '동성애 반대'를 내세워 세력을 공고히 했다"며 동성애자 문제를 정치세력화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2000년대, 커밍아웃으로 바뀐 세상
2000년대 의도치 않게 커밍아웃을 했던 연예인 '홍석천'은 현재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커밍아웃 이후 방송계에서 퇴출당했다고 말할 정도로 힘든 생활을 했다. 당시 홍석천의 커밍아웃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성 소수자가 자신을 목소리를 내게 되는 첫걸음이자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하리수'가 트랜스젠더로 알려지고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씩 변하게 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 연예인 '홍석천'과 '하리수'가 각각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로 알려지게 되요. 스포츠 신문에 '홍석천 호모다'라고 실렸는데, 사실 그 커밍아웃은 의도 했던 건 아니에요. 여성중앙하고 인터뷰를 했는데, 일간 스포츠 기자가 우연히 들은 얘기를 기사로 내 버린거에요. 아무런 인터뷰를 안하고, 호주에 가있었는데 기사가 실린 거죠. 커밍아웃 되고 대한민국 동성애자가 모든 동성애자가 한 명 생기면서 이게 성 소수자들에게 역사적인 힘이 되죠"
"2001년도에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CF로 데뷔한 하리수가 트랜스젠더로 알려져요. 이건 한 번 생각해 봐야 해요. '남자 여자 성역할을 지키지 않는 변태들!'이라고 생각했던 대중들이 왜 똑같은 변태인데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어 하면서 하리수씨는 받아들이고, 홍석천씨는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말이죠. 홍석천, 하리수의 등장은 한국사회가 여전히 고루한 사회라는 걸 보여주기도 합니다. 원래 기존의 역할, 남자로 태어났어도 아주 예쁘기만 한다면 받아들여 준다는 거죠. 아주 큰 진보이기도 하고, 한국사회가 고루하다는 걸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성 소수자 '법안제정'을 두고 싸우다
2007년도에 들어서면 성 소수자들은 차별금지법의 '법안제정'을 두고 싸우게 된다. 차별금지법은 성별, 학력, 지역, 인종,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예방하는 취지로 발의돼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부터 추진됐으나 당시 보수기독교 등의 반대에 부딪혀 장애인 차별금지법으로 개정돼 통과됐다.
한채윤 이사는 차별금지법을 언급하며 보수 정권, 보수 개신교에서 세력을 키우는 수단으로 반공을 내세웠는데 시대 변화에 따라 이 같은 구호가 힘을 못 쓰자, '동성애'를 희생량으로 삼아 세력을 공고히 했다"고 말한다. 덧붙여 "국교가 없는 나라에서 선거 때만 되면 왜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보수정권과 보수 개신교 세력이 강한 거겠죠. 차별금지법도 대기업 뿐만 아니라 보수정권, 보수 개신교도 같이 반대를 해서 결국 통과가 못됐죠"
"2007년도 싸움이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심플합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는 국민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다', 그래서 선진국이라고 하는 것을 그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문화적으로 인권 선진국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 하면서 추진한 게 '차별금지법'입니다. 차별금지법은 인권선진국의 기본법이에요. 선진국은 다 있습니다. 정부에서 차별금지법을 만들려고 하죠. 그 이전에는 억압과 차별이라고 하는 것이 대학 어디 나왔어? 라는 식의 삶의 특징을 가지고 불합리한 대우를 하는 거거든요. 모든 사람이 어떤 조건에 놓여 있건 간에 가장 많은 차별이 일어나는 부분이 '취업할 때'에요. 그러다 보니 차별금지법을 통과시켜야 하는데 대기업에서 노무현 정권 내내 반대하는 거예요. 정권 끝나기 전에 차별금지법 만들어야 하니까 기업들이 싫어하는 법안 다 빼고 통과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못 만들어졌습니다. 기업이 반대하던 걸, 보수 개신교에서 반대하는 거죠. 차별금지법에 성적지향이 들어갔다고 반대하는 거죠. 성적지향을 차별하지 않는 다는 것이란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데 어떤 성별이던지 차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보수 개신교 쪽에서는 '동성애자 교인이 오면 어떡하냐'라는 식으로 반대를 했는데, 과연 이 이유 하나만으로 반대했을 지는 아무도 모르죠. 어쨌든 너무 어마어마하게 반대해서 법무부가 급하니까 성적지향을 빼고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성적지향만 빼면 너무 티 나잖아요. 자기들 덜 민망하려고 더 빼는 겁니다. 그래서 학력, 가족 형태, 병력, 출신국가, 언어 등이 빠져요. 이유는 딱 하나에요. 성적지향만 빼면 눈치 보이니까. 24개가 있는데 법안에서 빠진 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운동주체가 없습니다. 이게 뭐냐면 법무부가 만만한 거 뺀거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운동단체가 없는 것일 텐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저는 동성애는 찬성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동성애를 찬성하고 반대하는 것을 다룬다고 한다면 한국사회가 동성애 혐오하는 건 괜찮아요. 혐오는 학습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회 특정그룹에서 혐오가 많은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 입장이에요. 이를 테면 동성애에 찬성하면 '너 동성애자라서 찬성해?'라는 식만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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