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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악기를 만드는 것은 좋은 소리를 찾는 여정입니다
현악기제작자 박경호
이세영 팀장(2014-12-02 10:27:43)

지난 10월, 서울숲 커뮤니티센터에는 이색 전시회가 열렸다. ‘나무에 새긴 선율’을 주제로 독특한 모양의 창작 현악기 선보인 것도 그렇지만 그 악기들을 누구나 켜볼 수 있었다. 악기연주자들은 ‘한반도’라 이름 붙여진 낯선 악기로 아리랑을 연주하기도 했고 유치원 아이들은 악기 만드는 과정을 체험하기도 했다. 현악기 제작자 박경호(45)의 첫 번째 전시였다. 

소리가 날까 싶은 모양의 바이올린을 보며, 이 독특한 악기를 만드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부안에 손수 지은 집을 작업실 삼아 악기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한 대의 악기를 만드는 것은 고행의 길과도 같았다. 득도한 고승의 그것처럼 모든 생각을 버리고 자그마한 조각도에 기대어야만 하나의 악기가 탄생한다. 그리고 그는 악기를 통해 세상과, 자연과 소통을 한다. 



그의 삶을 

통째로 바꾼 ‘나무향’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 9대째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그는 어린시절 천방지축 마을을 뛰놀았다.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주로 운동과 ‘동네 보컬’을 하면서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상경한 그는 남자들이 하지 않던 패션 공부를 했다. 학원에서 여성복 디자인을 배웠지만 그를 써주는 데는 없었다. 백화점 영업사원으로 들어가 4년 만에 고급 여성복을 디자인을 할 수 있는 회사로 옮길 수 있었다. 

디자인에 이력이 붙자, 그는 작게 가게를 열었다. 백화점에 납품하며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사업은 3년 만에 가진 돈을 다 탕진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심신이 피곤했다. 여행이나 한번 가자는 생각에 이탈리아 행 비행기를 탔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하던 패션 공부를 계속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패션 학교를 알아봤다. 3년과정 학교인데 경험이 있으니 1년 정도면 학위를 주겠다는 학교가 있었다. 내심 학교를 정해 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와 악기 만드는 공방 구경을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나무향에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산세가 좋은 소도시였는데, 느낌이 내 고향 부안과 같았어요. 나무향도, 마을의 분위기도 저에게는 정서적으로 맞았던 것 같아요.” 

그곳이 그가 현악기를 배운 ‘이탈리아 굽비오 국립 현악기 제작학교’였다. 아내도 한국에 두고 금방 다녀오마 하고 갔던 이탈리아에서 그렇게 그의 운명을 만났다. 때마침 신입생 면접을 보고 있어, ‘시험이라도 한번 보라’는 권유에 면접을 봤다. 같이 간 친구가 통역을 하고, 평생 처음으로 끌을 잡고 나무를 깎았다. 설마 언어도 안되고, 나무한번 깎아보지 못한 그가 합격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귀국하고 나서 합격통지가 왔다. 나중에서야 그가 굽비오의 꼴등 입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내에게는 패션공부를 하러 간다고 거짓을 말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향했다. “패션에 지쳐있었던 때였다 보니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듯해요. 나무의 향기, 고향의 냄새, 자연의 냄새가 저를 자극했던 거죠. 그때 찾아간 곳이 굽비오가 아니었다면 지금은 아마 다른 것을 만들고 있을지도 몰라요.”

이탈리아인도 감동한 

그의 열정


재주꾼이었던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를 제외하곤 나무도, 악기도, 이탈리아 땅도 그에게는 모두 처음이었다. 배울 게 너무 많았다. 미친 듯이 했다. 새벽에 일어나 언어공부를 하고, 학교가 끝나면 근처 공원으로 가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며 언어를 배웠다. 학교공부를 제외하곤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했고 나무를 깎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집에 와서도 신들린 듯 악기를 깎는 일을 했다. “말이 안 통하니 나무와 대화를 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어요. 많이 외로웠죠. 향수병에 시달렸어요. 그러나 그 고독한 시간이 지금 나의 철학을 만들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어요.”

그의 악기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일하지 않는 점심시간까지 악기공부로 채우게 했다. 굽비오의 교장인 마에스트로 스파다피와 각별한 인연을 쌓은 것도 점심시간이었다. 처음 교장을 찾아갔을 때 그는 “왜 내 쉬는 시간을 뺏는거야”하는 언짢은 표정이었다. 매일 점심시간 교장에게 궁금한 것을 물으러 오는 그를 “쟤는 원래 그런 앤가 보다”하고 받아들였다고 나중에서야 스파다피가 말했다고 한다. 6개월이 지나고 변하지 않고 악기제작에 열중인 그를 본 스파다피는 언제든 그를 찾아와 악기를 배우라는 허락을 받았다. 집까지 찾아가 개인교습을 받았다. 결국 그가 스파다피에게 기타 제작을 배운 최초의 학생이 됐다. “한국에서 온 꼴등 입학생을 무척 예뻐해 주셨죠. 처음 스파다피를 찾아갔을 때는 언어가 안 돼 그림으로 그려가며 배웠어요. 92세의 나이에도 저를 귀찮아하지 않았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스파다피에게 언제나 찾아가 배울 수 있는 특혜를 받았고,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의 욕심은 끝이 없어보였다. 3년의 학창시절,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기타, 활 만드는 것을 배우고 현악기 7대, 활 4대를 만들었다. 한국에 들어가면 스승이 없으니, 많이 만들고, 실험을 해봐야 된다고 생각했다. 계속 질문할 수 있고,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그를 가르쳤던 스승은 졸업 실기시험에서 유럽학생들을 제치고 1등을 한 그가 나폴리나 일본으로 가기를 원했다. 악기제작자를 인정해주는 곳에서 그의 재능이 꽃피기를 바라는 스승의 마음이었을 테다. 그러나 그는 한국행을 고집했다. 추천장을 써주는 것이 드문 이탈리아의 관례를 깨고 스승은 한국에 들어가면 필요할지 모르겠다며 추천장을 써주며 스승을 아쉬움을 달랬다. “스승의 말처럼 한국은 아직 악기제작자를 인정해 주지 않더군요. 그 추천장, 써먹지 못하고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내가 배운 것으로 한국적인 것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상처뿐인 

현악기제작자의 길


2002년 3년의 수학을 마치고 귀국을 했다. 돈은 없었으나, 이탈리아에서 싸온 나무가 있고, 열정은 넘쳤다. 창문하나 나있는 옥탑방에서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2003년 서울 방배동에 ‘경호 park 현악기연구소’를 열었다. 가르쳐 달라는 사람은 많았지만 악기를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새 악기를 쓰지 않는 한국의 현실에서 악기제작은 배고픈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악기제작에만 매달렸다. 죽어도 악기수리공이 되기는 싫었다. “악기를 만들 때 10년이상 건조한 나무를 어디서 벌목을 했는지 따지고, 소리도 듣고, 질량값도 계산하고 앞뒤판 궁합도 보고 결정을 해요. 그런데도 새 악기에서 생나무 소리가 난다며 싫어하죠. 새 악기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같은 올드한 소리가 나는 것이 맞을까요? 청년의 목소리는 창창해야 하지, 노인의 목소리가 나서는 안되잖아요. 새 악기를 몇 년만 켜면 자신의 음악에 맞는 소리가 나는데도 새 악기를 터부시하는 게 우리의 현실인 것 같아요.”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집세는 밀리고, 나무는 떨어졌다. 날품팔이 노동을 하며 나무를 구해 악착같이 악기를 만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친구는 그의 악기제작 일을 ‘고행의 길’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너무 배고팠고, 스트레스가 심했다. 2007년 결국 악기제작에서 손을 땠다. 2008년 아버지의 죽음은 그를 더욱 낙담시켰다. 부안에 내려와 어머니가 살 흙집을 지으며 농사꾼이 되리라 결심했다. 

2009년 여름 어느 날, 창고에 들어선 그의 발에 상자가 치였다. 녹이 절어 있는 조각도를 보는 순간, 뭔가 치밀어 올라왔다. 일주일 동안 녹을 벗기고, 거치대를 만들어서 연장을 걸었다. 그리고 작업대에 앉아 긁적긁적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그의 악기 인생 2막의 서장이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서울 방배동에 다시 짐을 풀었다. 하지만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내는 악기들에 싫증이 났다. 조금씩 변형을 시도하던 그의 악기는 모양마저 새롭게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왜 죽은 제작자들의 악기를 복원시켜야 하나 하는 허탈감이 들었어요. 한국에서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복원했네, 하며 죽은 사람들을 자꾸 불러내요. 죽은 사람은 죽은 상태로 둬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가 필요한 악기를 만드는 것이 악기 제작자의 사명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 시대가 필요한 악기는 무얼까, 그는 고민했다. 어느 날 밤, 별을 바라보던 그는 ‘별을 악기에 담으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될 것 같았다. 그 길로 도안을 그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악기가 만들어지고 부서졌다. 헤드 길이는 이만큼, 두께를 저만큼, 폭이 좁아 깽깽거리는 소리가 날 테니 베이스 바를 세 개로 나누면 좋겠다, 구상은 현실이 돼 갔다. 그렇게 2011년 각진 모양의 바이올린 ‘내 마음속에 빛나는 별’이 탄생했고 달을 닮은 악기 ‘달나라 여행’도 만들어졌다.

현악기에

철학과 사연을 담다


집 한켠에 자그맣게 만든 작업실에서 나무를 깎을 때면 어머니는 물었다. “맹글면 팔기리는 허냐?” 그는 멋쩍게 말했다. “아들놈이 좋것지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을 애써 덮으면서도 조각도를 들었던 그였기에 어머님 돌아가시고 6개월, 다시 조각도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2012년 다시 부안으로 내려와 2층에 작업방을 만들고 마음을 추슬러 악기를 만들었다. 어머니가 남기고간 곡식들을 수확하며 농사꾼 반, 악기제작자 반의 생활이 이어졌다. 농사는 그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줬다. 매일 흙을 밟으며 흙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에 빠지기도하고 위안을 받기도 했다. 땅에서 곡식이 자라듯, 나무의 본질도 결국 흙이라는 생각을 했다. 흙으로 악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이러한 연유다. 자연과 함께 하며 그는 자연에서 얻어지는 재료에 가장 알맞는 소리가 가장 좋은 소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가 악기를 만들고 좋은 소리를 찾아가는 지향점이다. “아직 어떤 소리가 좋은 소린지 몰라요. 오히려 초창기에 악기 만드는 것이 쉬웠어요. 만들면 소리가 나니까 재미가 있었지요. 그런데 가면 갈수록 소리가 뭔지 모르겠고, 어려워져요. 그래도 만들고 싶은 소리의 방향은 있어요. 모든 물체에는 소리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소리를 다 뽑아내고 싶은 욕망이 있지요. 나무의 형상을 소리로 변화시킨다고 할까요?” 

그의 의심은 “지금의 바이올린 소리가 가장 좋은 것인가”하는 것에 다다라 있다. 비올족에서 바이올린족으로 넘어 온지 400여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처럼, 바이올린에서 다른 소리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의심. 그는 그 의심을 붙잡고 새로운 악기들을 만든다. 

그래서일까, 그의 악기는 한 가지 사연을 담고 태어난다. 밭에서 일하다 들은 은은한 종소리는 바이올린 ‘종소리’가 되고, 남과 북이 하나 되는 날을 생각하며 한반도 모양의 바이올린 ‘한반도의 꿈’이 만들어졌다. 한참 제작중인 ‘노동자의 노래’에는 이 시대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고 있다. 철탑 위에 올라 생사를 걸고 싸우는 노동자들. 그들의 애환과 한을 악기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며 나무 위에서 조각도가 움직인다. “‘노동자의 노래’를 만들면서 앞판을 실수로 깨먹었어요. 새 판을 만들까 생각하다 그대로 때웠지요. 우연히 깨진 앞판의 아픔이 상처받고 다치는 이 시대 노동자들의 현실을 표현하는 것 같았어요.”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은 악기가 완성되면 그는 노동자들이 즐길 수 있는 곳에 이 악기를 보내 그들을 위로하려고 한다.

악기를 완성시키는 것은 

세월과 연주자


이제껏 그가 만든 악기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생각한 소리가 악기에서 날 수 있었던 것은 돈에 욕심 부리지 않는 덕이다. 그저 그가 원하는 소리의 악기를 만들고 싶은 욕망에 그는 조각도를 든다. 이름을 알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에게는 죽어서도 남을 악기가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나무를 살돈과, 그의 악기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악기를 만드는 것은 제가 원하는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한 사람이라도 내 악기를 좋아하는 연주자가 있다면 저는 그 소리를 찾아 갈 생각이에요. 그래서 이 시대의 악기제작자들이 자신의 소리를 만들고 함께 공유하고 연주자들이 제 악기를 켜고 함께 연구해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커요.”

지금은 그의 악기가 주인을 찾지 못할지라도 나무가 없어 악기를 못 깎을 때 어디선가 그에게 나무가 생겼던 것처럼, 그의 악기도 주인은 생길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언젠가 생길 악기의 주인을 위해 그는 하나의 악기에도 온 정성을 쏟는다. 그만의 철학을 악기에 담는다. 악기 제작자는 기본적인 공명통을 만드는 것이고 악기가 명기가 될지 아닐지는 세월과 연주자의 몫이니 그는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악기에 담을 뿐이다. “한 장인이 죽으면서 말했데요, 알만하니 죽는다고. 15년 악기를 만들고 있지만 저도 여전히 소리를 알지 못해요. 아니, 알고 있다면 만들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하면 이 소리가 날거야, 하는 희망으로 악기를 깎고, 실험을 계속하는 거죠.” 

여전히 그는 소리 이야기를 하면 딜레마에 빠진다. 좋은 소리에 대한 호불호가 확연하니 좋은 소리의 정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모르겠다. 어떤 악기를 만들 거냐보다, 새로운 소리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 길로 간다. 아직 배울 것이 천지다. 제자를 두지 않는 것도 아직 배울 처지에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묵묵히 2년 후 만들어질 악기 한 대를 위해 나무를 깎는다. 


한 길을 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별종 악기제작자이자 비주류라 손가락질을 해도 꿋꿋이 한 길을 가는 사람. 장인도 되지 못하고 목수가 되버린 박경호가 그렇다. 그 자신도 죽기 전에 좋은 소리를 정의내릴 수만 있다면 별종이건, 비주류 건 그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별 총총 뜬 이 밤, 스트라디바리우스보다 다양한 소리를 가진 그의 바이올린이 공명을 일으켜 만드는 음악을 문득 듣고 싶어진다. ‘개 짖는 소리’를 담아낸 악기 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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