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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깊은 침잠이 삶을 살찌운다
문화평론가 고길섶
이세영 편집팀장(2013-10-10 10:05:02)

그를 어떻게 소개해야할지, 처음부터 난감하다. 한 때 날카로운 언어적 유희로 뭇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책도 여러권 냈으니, 일단 그는 문화비평가다. 고향땅을 밟은 이후에도여전히 지역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 재평가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으니 문화기획자인가? 고향땅에서 벌어지는 소수자의 문제를 지원하고 있으니 인권운동가라고부를 수도 있겠다. 다 돈 버는일이 아니나, 그렇다고 백수라고부르기도 또 뭣하다. 스스로는‘잠수’ 중에 있는 시체와 같다하나, 마을에서는 교육사업을 하며 ‘선생님’으로 불린다. 정체 깜깜한 그의 ‘백수적’ 삶을 들여다봤으나, 여전히 어둠뿐이다. 그의 이름은 밭 매다 길섶에서 세상에 난 고길섶이다.

부안에서 꼬뮌놀이에 빠지다
그가 서울에서의 삶을 작파하고 고향 부안에 내려온 건 2002년이다. 자연에살아야 한다던가, 고향에 돌아와야 한다던가 하는 확고한 의지를 기대했다. 문화평론가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다. “어머니 집을짓고 혼자살기에는 큰 집이어서 내려왔어요. 서울에 있으나 고향에 있으나 백수이긴 마찬가지여서 바로 짐 싸서 어머니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허탈한 대답이었다. 고향이 부안인데, 거주하는 곳은 고창이다. 마침 고창에서도 부안면이다. 무슨 깊은 이유가 있겠지, 물었다.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여기가 살기 괜찮아 보였어요. 부안군이 아닌 부안면이니 작은 부안이잖아요.”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그리고 말을 끌어내려는 자와 말을 아끼려는 자의 긴 대화는 이어졌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살고 있어요. 시골에 박혀 살다보니 아, 지금 잠수중이구나 했고, 잠수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지금은 그럴지언정, 우습게도 백수를 자처하며 눌러 지내려던 부안은 그가 도착하자마자 폭풍의 핵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지점에 이르자 그의 말수는 부쩍 늘어났다. 2002년 그의 동네 줄포에 쓰레기 매립장 문제가 생기더니그 문제가 일단락되자마자 핵폐기장 싸움이 시작됐다. “서울에서 이론적 작업을 하면서 나름대로 사물을 보는 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부안이라는 현장에서도 그대로 작동되고 있더군요. 부안반핵 홈페이지에 그때그때 중요한 맥락이나 의미들을 문화정치적으로 접근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혈기왕성한 백수여서 그랬을까, 낮에는 현장에서 밤에는 하루의 사건을 그의 관점에서 정리해 나가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가 느꼈던 2002년의 부안은,직접민주주의가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서 자치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피어나는현장이었다. 그의 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했다. 그리고 전쟁같은 상황은핵폐기장 유치 반대와 새로운 부안군수의 당선으로 승리의 깃발을 꽂았다. 그러나, 부안의 동력은 거기서 와해됐다. 그는 ‘반핵지도부의 배신행위’때문이었다고 했다. 가만 있어도 그 권력을 이어받을 수 있었는데 욕심을 부린 탓에지도부도, 주민들도 동력을 다 모소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지도부를 비판하면서도 주민들은 같이 싸웠어요. 그렇지 않으면 사분오열됐을 판이, 주민들의 현명함으로 살아났다고 봐요.”
그리고 그 싸움의 과정을 관찰해온 그는 책 한권을 썼다. <부안 끝나지 않은노래>가 그것이다. 그는 “싸움의 과정과 주민들의 조직이 의미가 있다”고 봤고“그걸 정리하지 않고 묻어버리면 안될 것 같은 생각”에 기록을 했다고 했다. 더군다나 비록 패했더라도 그 싸움의 의의를 남기지 못한 새만금 반대투쟁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그리고 이 책에 그는 ‘코뮌놀이로 본 부안항쟁’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코뮌놀이와 부안항쟁은 그가 붙여낸, 부안의 정치문화적 맥락이다. 140여년전 파리를뒤흔들었던 파리 꼬뮌과 80년 광주의 항쟁의 절대공동체를 합해 놓은 것이 부안핵폐기장 반대투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부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치열한 현장을 ‘놀이’로 승화시켰다고 했다.
그의 책에는 부안항쟁에 담긴 숫한 이야기들이 있다. ‘달리는 홍보요원’ 반핵택시의 활약과자신의 주장을 올바르게 밝힐 줄 알게 되었다는 학생들, 삼보일배의 현장에서 만난 군민들과 시위대와 진압부대원으로 만난 부자의 이야기까지 3년여의 시간을 담고 있다. 그는 나에게 하지 않은 멋있는 말로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부안항쟁을 코뮌놀이로 읽어나간다면 두려움이 아니라 즐거움을, 경계심이 아니라 모험심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 역시 부안 사람들처럼 나의 시선과 방법으로 투쟁을 창조하는 능동적 활동으로 코뮌놀이에 빠져 들었습니다.”

어울려 살 수 있는 무던함을 기르다
거기서 그도 동력을 잃어 버린 것일까, 현란한 단어로 괴롭히기보다 긴 질문뒤 짧은 대답은 계속됐다. 아무래도 그와의 대화가 쉽지 않다. 질문자의 질문이 더 긴 인터뷰를 해야 하는 고충은 안당해보면 모르는 일. 스스로 알아낸 그의 과거행적부터 밝혀야겠다. 그는 동양철학을 전공했다. 언어학을 부전공으로도 하지 않은 그는 알튀세르에 꽂혀 대학을 보내며 수많은 책을 통해 언어학을 깨우쳤다. 언어적 관점에서 <우리시대의 언어게임> <문화비평과 미시정치><스물 한 통의 역사진정서> 등을 펴냈고 소수자들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소수문화들의 정치학> <어느 소수자의 사유> 등을 펴냈다. 그리고 그의 고향 부안이 전국적 관심사로 떠올랐던 핵폐기장 반대 투쟁의 이야기를 담은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도 펴냈다. 월간문화연대 편집실장, 문화과학 편집위원을 지내며 강연에도 곧잘 불려 다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부안에서 점차 희미해져만갔다.
그리고 어렵사리 그의 사고 진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1단계, 서울에서비평 작업을 할 때 그는 기본적 철학을 유지했다. 수위조절하지 않는 예리한 글쓰기와 이론적 원칙이 있었고, 한번 사고의 흐름을 파고들면 끝까지 중간 타협없이 거침없이 나아갔다. “사물과 현실에 인식을 할 수 있으면 극단까지 밀어붙여 발전시키고 진화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죠. 그것이 내 글쓰기의 즐거움이었고, 발견이었고 편견되지 않는 것이었고요. 문화와 문화정치를 연구하는저에게는 중요한 가치였고 그 때의 작업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봅니다.”그러던 그가 부안에 내려와 2단계에 다다른다. “내 철학적 관념 안에서 사안이 있을 때는 적아가 분명한 것이었는데 시골에 살다보니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가는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론적, 인식적으로는 좌파와 우파가 분별되지만 삶 속에서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은 부안항쟁을 겪었기에 가능한 사고의 진화였다. 시골의 삶은 같이 어울려야 사는 세계이고 개인적 가치와 철학을 유지하면서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다른 방식을 취할 수 있게됐다. 이런 바탕 위에 ‘어떻게 변화가 가능할것인가’ 오랫동안 고민하게 됐다. 이 과정을넘어 ‘잠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3단계가 발현했다.
“공간적인 자유로움, 환경의 여유로움, 자연 속에서 묻혀 사는 시골에 있다 보니 두루뭉술해지고 사고의 진화가 안됩니다. 문화의 재발견도 사고의 진화를 통해 탐구되는 것인데, 지금은 그런 탐구를 하는 것도 아니죠. 그저 그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즐기는 것이 좋습디다.”

지역의 문화가치에 주목하다
그래도 시골에 왔으니, 사고는 무뎌졌을망정 서울의 삶과는 뭔가 다른 것을 느꼈을 법하다. 생활 속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해왔으니,이를테면 시골 삶에 대한 문화적 평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마저도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이론적으로 탐구할 때와는 달리 중간정리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 삶의 결에 따라 풀어지고 맺어지고 끊어지고 하는 것이여기의 삶이니까요.” 역시 쉽지 않다.
백수라도 소일거리는 있지 않을까, 그를즐겁게 하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몸부림이있지 않을까 꼬치꼬치 캐물었다. 부안을 문화인류학적으로 관찰한 작업들이 그것이라고했다. 부안에 살면서 지역적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부안여지도’라는 결과물로 나타났다. 부안21에 꾸준히 연재한 부안여지도는 부안의 가치와 자산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단순히부안이라는 지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 삶의 인문적, 생태적, 문화적,공간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지역사회를 새로운 가치로 발전시키고 진화시킬 수있게 하는 작업이었다고 했다. “단순히 지역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지역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새로운 가치를 통해 변화를 싹틔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작업을 시작했죠. 변명같지만, 먹고사는 것과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 힘들어 중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부안의 문화적 가치를 발굴하는 문제는 그의 계속된 과제다. 부안여지도의 연장선상에서, 생활관광지도를 만들어 관광객과 지역주민에게 도움이되는 지도를 만들어보겠다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다. 작은 길 하나, 건물 하나까지 다 확인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까지 포함시킨 인문학적 백과사전을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부안군 전체를 일일이 밟아가며 해내야 하는 작업이라 만만치 않지만, 이 지도가 완성되면 부안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변산반도 99Km를 걷고 해안선을 중심으로 글을 쓰려고 하고 있다. 부안마실길을 빙자해서, 정리한 글들을 새롭게 다듬어 책을 낼까고민 중이기도 하다.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무사태평 백수의 삶이 지난해 한 번 요동쳤다. 근래 몇 년 동안 ‘살아가는 대로 그대로 살자’는 생각에 긴장상태에서 손을 놓았다,생생함과 긴장감이 있는 현장과 마주친 것이다. 그가 항상 주목하고 있던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부안 시내버스 노동자들이었다. 약자인 버스 노동자들은 지역 언론에서도 부안군에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부안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나”하는탄식을 흘리던 때라 그의 결합을 고마워했다.늦게 결합했지만 날카롭게, 이 사안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두 번의 지역신문 기고를 끝으로 기고가 거부됐다. “노동자들과약속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시내버스 문제를 신문으로 만들어 냈어요. 제가 글 쓰고편집까지 해야하는 힘든 작업이었지만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군민들이 알아야 하고, 문제의 원인을 군민들과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수자들에 대한 관심은 올해, 그가 사는 마을로도 이어졌다. 그가 ‘선생님’이라 불리는 ‘구현골 글쓰는 마을의 탄생’사업이다. 삼년째 살고 있는 마을에서펼쳐지는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은 그가 평생 가졌던 문화적 실현방법과 맞아떨어졌다. “자기 글 한편 남기지 못하고 죽는 건 서글픈 일이잖아요. 글써본 경험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의외로 문맹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됐죠. 그래서 정부 돈 받아다 쓰는 게 골치 아픈 줄 알면서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마을보다도 더 낙후된 그의 마을에는 20여명의 어른들이 문맹이거나문맹에 가까운 수준이다. 마을인구의 50%에 가까웠다. 그들은 이때까지 글쓰기를 배워본 적이 없었다. 글쓰기반만 만들려던 것에서 한글반도 개설해 한글을 가르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날품팔이 밭일을 나가지 않더라도 수업에 참여하는 어른들이 있을 정도로 수업은 인기다. 수업을 통해 마을의 커뮤니티도 살아나고 벽화그리기, 시 쓰기를 통해 인문학적 체험도 가능해졌다. 마을잔치,마을지 등을 만들어 함께 어울리는 기회도 더 만들 생각을 그는 하고 있다. “삶의 질을 이야기하는데, 사실 우리는 문맹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아니, 문맹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꺼려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문맹을 이야기하지 않고 삶의 질을 논할 수 없다는 걸 이번 사업을 통해 알게 됐어요.”
그런데 이 사업도 내년에 안하게 될지 모른단다. 백수정신의 발로다. 성과가좋아 보이니 계속 하는 게 어떠냐 했더니, 내년 가봐서 생각해본단다. 은둔주의자, 현실 회피주의자도 아니라하고 더욱이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 상태를 유지한다. 마치 성장을 멈추고 자연사하는 생물처럼. “그렇다고 사회에 투항한 것은 아니에요. 내가 사는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현장이나를 필요로 하다면 합류할 겁니다.”
그가 기억한다면, 그를 기억한다면 그는 현장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를기다릴 것이다. 그 깊은 잠수를 마치고 단숨에 물 위로 올라 어떤 소리를 내지를지, 그를 만나보는 재미도 쏠쏠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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