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쟁이 중고생, 마술하던 육군병장, 호기심 많은 경영학도, 하다 보니 서른. 그 사이 앨범 두 장 내고 몇 개 공연 만진 오지‘래퍼’. 공연기획자 임정민씨(30)의 간추린 이력이다. ‘고도프로덕션’ 대리. 그의 페이스북을 보면 알 수 있는 첫 번째 정보다. 그런데 “음악도 하고 영상도 하고 사진도 하고 마술도 하고 살아갑니다”라는 소개글을 보면 조금 갸우뚱하게 된다. 그의 인터뷰를 추천한 사람도 “하는 일 많고 재밌게 사는 청년인 것 같긴 한데…….” 하며 말끝을 흐린다. 누구나 한번쯤 그를 눈 여겨 본 것이 틀림없는데도 정확한 직종은 모른다. 온라인의 한계일 수도 있다. 낮에는 영상회사 제작팀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공연기획에 빠져 산다는 그의 정체(?)는 직접 만나고서 알 수 있었으니.

‘재밌겠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TV에서 댄스가수들의 군무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집에서 열심히 따라하던 그는 무작정 동네 무용학원을 찾아갔다. 청소를 할 테니 빈 연습실을 쓰게 해 달라고 했다. 용감무쌍했다. 그는 무용학원에서 나 홀로 열심히 춤을 췄다. 당시 동아리문화가 바람을 몰고 온 익산, 춤 깨나 춘다는 아이들은 모두 ‘청소년 문화의 집’에 모여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로 갔다. 복도에 고무판을 깔고 유리문을 거울삼아 춤을 췄다. 열심히 한다고 꼭 잘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대회에서 상은 못 탔지만 대학축제에서 쌀은 탔다. 춤추다 보니 랩을 해보고 싶었던 것은 당연한 과정이었을까. 아니면 댄서를 작파한 아쉬움일까. 어찌됐든 춤을 시작할 때처럼 랩이 재미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십년 가까이 힙합을 가까이 두고 앨범까지 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혼자 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친구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음악 하는 동갑내기. 말도 잘 통하고 무엇보다 힙합코드가 잘 맞아 둘은 친해졌다. 두 사람은 안지 1년만에 ‘제론’이라는 힙합듀오를 결성했고 익산 무대들을 누볐다. 그리고 4년 만에 첫 디지털싱글앨범을 냈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르지는 못할 터. 썩 마음에 드는 작업은 아니었다는 둘은 다시 곡 작업에 돌입했다. 새로 만들고 다듬어 6개월 뒤 두 번째 디지털싱글앨범‘아메리카노’를 내놨다. 반응은 전보다 훨씬 괜찮았다. 무엇보다 익산에서 활동하는 래퍼팀이 앨범을 두 장이나 냈다는 것에 놀랐다. 두 앨범 모두 뮤직비디오까지 직접 출연하고 만들었으니 대단할 법도 하다. “익산에 춤꾼들은 많지만 랩 하는 팀은 희귀하거든요. 어려운 상황인데도 꿋꿋이 잘해주고 있어서 후배들에게 본보기도 되고, 또 누구보다 즐기니까 보기 좋지요.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는 귀한 친구입니다.” 그의 고교선배이자 익산 한국공연문화예술연구소장으로 활동하는 여형일 씨의 말이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게 많아요”
그 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공연 기획에 간간히 행사 사회도 보는 정민 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금은 잠시 음악활동을 쉬면서 본업에 충실하고 있다. 낮에는 영상회사인 고도프로덕션에서 영상제작과 편집일을 하고, 퇴근 후엔 쉼터이자 놀이터인 한국공연문화예술연구소에서 공연기획을 한다. 한국공연문화예술연구소는 익산에서 열리는 굵직한 공연을 연출하고기획하는 익산의 비영리단체. 비보이팀을 포함한 힙합댄스, 랩, 가수, 스포츠 예술팀 공연전문엠씨 모임으로 약 150명의 사람들이 활동 중이다. 정민 씨는 이곳에서 지난해부터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그는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무대로 걸어 나왔다. 2011년 전국스트릿댄스대회 기획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공연기획자의 길을 걷는 중이다.“입대하기 전, 서울에서 2년 정도 살면서 많은 걸 보고 느꼈어요. 이렇게 많은 공연이 있다는 것에 한번 놀라고, 이런 공연을 늘 가까이 두고 있다는 것에 두 번 놀랐죠. 서울은 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도시란 생각이 들었어요. 지방이라고 이처럼 못할 거 없단 생각이 들더군요. 자연스레 익산에서 공연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가진 장점을 보게 됐어요. 특히 익산은 아마추어 댄스팀이 강하거든요. 전국 대회를 휩쓸고 다니죠. 이젠 어느 정도 선배구실을 해야 할 시기가 되어서인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그중에서도 좋은 무대를 만들어 한바탕 놀 수 있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커요.”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특권
지난해에만 공연, 문화기획, 이벤트공모까지 합쳐 4개의 기획을 해냈다. 몸담고 있는 한국공연문화예술연구소에서 주관한 익산 댄서 추모 기획공연에선 위원을 맡았고, 그가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체크한 ‘JM힙합뮤직페스티벌‘은 익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여름 익산 솜리예술회관에서 성공리에 마쳤다. 익산서동축제가 공모한 시민아이디어에 채택된 ‘서동요러브메신저’나, 익산시 찾아가는 문화프로그램 기획을 맡은 것은 공연뿐만 아니라 문화기획에도 가능성을 보여준 자가검진이었다. 그의 꿈은 고향 익산에서 선후배 친구들과 살 부비며 오랫동안 공연하는 것이다. 지금은 햇병아리 기획자지만 되도록 많이 배우고 직접 부딪치려고 한다. 퇴근 후 짬짬이 공연기획서를 쓰거나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하고 행복하다는 그는 자신이 뭘 잘하고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안다. 잠시 스친 것도 단숨에 제 것으로 만드는 축지법. 자기 앞에 떨어진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그는 진짜 ‘논다’
정민씨는 ‘일’을 놀이처럼 대한다. 누군가는 “놀고 있네”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진짜 ‘논다’. 놀 때도 놀고, 일할 때도 논다. 이것이 바꿔치기의 기술이자 다르게 볼 줄 아는 임정민표 낙천이다. “시간을 놀리지 말고 시간을 놀아야 한다”는 것은 그가 찌른 1급 정곡이다. ‘딴 짓’도 잘하면 무엇이 될 수 있고, 계속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 무엇을 언제 줍고 어떻게 담을 지는 우선 놀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