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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 | 칼럼·시평 [문화시평]
백제의 이야기를 모악산 자락에서 듣다
백제의 재발견, 현대미술 리포트
최정환(2016-02-15 10:48:06)

 

 

30여 년 전 중국은 발해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였다. 당시는 중국이 개방화 되지 않았던 탓에 발해가 중국사라는 중국 역사학계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세계의 상당한 역사서는 중국의 견해를 반영하여 기술하고 있다. 또한 2004년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이라는 기관이 주도하여 고구려사를 중국역사로 규정하는 동북공정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한국의 거친 항의에 중국의 주장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 보이지만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의도대로 간다면 우리역사는 반 토막이 되고 동북아 정세에 미칠 부정적 현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것도 우리가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 것이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지난해 7월 독일 본에서 열린 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으로 최종 선정하였다. 이는 우리 정부의 계획적인 노력의 결과로 우리나라는 총 12건의 세계유산을 등재하게 되었다. 백제문화권에 기반하고 있는 우리지역도 경사스런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전북도립미술관 역시 백제의 문화와 유적을 바라보는 미술가들의 시선을 한곳에 모으는 전시를 기획하였다. <백제의 재발견전>은 20명의 초대작가들이 익산, 공주, 부여 등의 백제유적지를 현장 답사하고 강의와 토론의 과정을 거쳐 작품을 제작하여 이를 전시하는 일종의 리포트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제 1전시실에는 물이 담겨진 투명한 원구 안의 OHP필름이 전시실 바닥에 투영되는 방식의 <시간을 담다>라는 정운학의 설치작품이 전시되었다. 
제 2전시실에는 박하선, 서기문, 서용선, 박인현의 작품이 선보였다. 박하선은 서산 마애불과 해체되기 이전의 미륵사지석탑, 왕궁리 유적지 등 황량한 벌판의 유물을 흑백사진으로 담았다. 특히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의자왕 무덤자리는 옥수수 밭으로 변하고 덤불 속에 작가가 놓은 듯한 술병은 역사의 흥망과 영욕의 단면을 느끼게 하였다. 다소 초현실적 성격의 서기문의 <찬란한 여명>은 나룻배 위의 뱃사공의 얼굴을 서산 마애불의 온화한 표정으로 치환시키고 있으며, 배위에 실린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여명의 빛에 반짝인다. 박인현은 오방색의 방위를 토대로 무왕의 왕궁터를 중심에 두고 동쪽에 제석사, 서쪽에 쌍릉, 남쪽에 만경평야, 북쪽에 미륵사지를 표현하였다. 서용선은 작가 특유의 거친 스트로크를 살려 무왕을 주제로 그의 성장과 사랑, 미륵사의 창건설화를 대형 화폭에 담았다.
제 3전시실에서 이상조는 발굴된 백제유물의 이미지와 유물에 대한 텍스트를 콜라주하고 이를 흐릿하게 지우는 방식으로 시간성을 표현하였다. 김윤식은 사실적 수묵담채기법을 이용해 소나무와 함께 유적지의 인상을 담았다. 척박한 풍토에서 뿌리를 내리고 모진 세파를 견뎌온 소나무가 질박한 우리의 역사와 중첩되었다. 박경식은 산동반도를 넘나들며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백제의 이미지를 나뭇가지를 이용해 고래로 형상화하였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의 선적인 요소는 백제관련 문장을 즉흥적으로 투박하게 써내려간 최재석의 작품과 자연스럽게 연계되었다.  
제 4전시실에는 만나는 이희춘은 <화양연화>연작을 선보였다.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의미하는 말로 왕가위 감독의 영화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왕궁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철제 솥의 형상에 나이프로 그린 꽃과 새들을 담았다. 임동식은 계백을 비롯한 백제의 충신을 기리는 삼충제에서 유래한 백제문화제의 인상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세태의 변화를 이야기하였다. 이철규는 전통공예기법인 '개금기법'을 이용하여 비단위에 유물의 형태를 투영하면서, 여러 겹의 비단사이로 흐릿한 수묵의 형상을 양면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하는 입체작품을 선보였다. 윤남웅의 경우 나무, 흙, 볏짚 등을 이용해 이 땅의 민초들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원색적 색채와 거친 표현은 투박하지만 흥겹게 살아온 이들의 삶에 대한 에너지와 이어진다.
제 5전시실에서 박방영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나 미륵사지석탑 해체과정에 나온 금제사리봉안기 등의 내용을 글과 그림을 병용해 서술적 구조 표현하고 있다. 김범석은 땅속에 묻혀있는 유물의 이미지를 통해 백제인들의 삶의 파편을 끄집어내고 있다. 이성원은 답사과정에서 채취한 서로 다른 나뭇잎을 이용해 A4크기의 시멘트에 눌러 <민초>라는 설치작품을 제시하였고, 김인경은 장구하게 흘러간 역사의 영속성이라는 주제를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배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설치작품으로 구체화하였다. 이승우는 사찰의 꽃살문의 인상을 드리핑 기법으로 표현하였으며 이진경은 정보의 파편을 임으로 나열하고 이들이 다시 하나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철량은 유적지나 유물에서 파생된 이미지의 파편이나 기억, 인간들의 모습을 먹을 이용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개개의 작업방식대로 재해석된 작품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또렷한 논점을 가진 전시회는 아니었다. 하지만 미술관의 역할중 하나가 지역문화 발전의 방향성 제시라는 측면에서 긍정적 의미로 이해된다. 아무리 융성한 문화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질 때 역사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간과할 수 있는 지역 문화유산의 가치를 상기시키고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전시기획이라 여겨진다.
한편으로 전시를 둘러보면서 작품을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작품의 경향이나 내용별로 묶어 소주제를 정하고 관람객들에게 제시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지만 이를 좀 더 관람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과정은 미술관의 몫이 아닐까 한다. 또한 작가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하여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게 되고 기존의 작품과 연계된 작업을 선보일 수밖에 없다. 일부 작품은 기왕의 작품을 할당된 전시공간에 나열한듯한 인상을 주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 H. CARR, 1892-1982)는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재해석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건도 새로운 생각과 상상력으로 재구성될 때 새로운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자신의 생각과 상상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역사가와 화가의 역할은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오랫동안 역사는 다양한 장르와 형태로 창작의 모티프를 제공하여왔다. 조형적 시각화를 목적으로 하는 미술 역시 작가의 주관과 상상력이 창작의 주요한 토대를 형성하게 된다. 모악산 자락에서 20인의 작가는 한반도의 남서부의 지역을 기반하여 전개되었던 백제의 이야기를 가지고 서로 다른 목소리로 관객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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