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8.2 | 칼럼·시평 [서평]
'미완의 개혁'에서 오늘의 개혁을 배운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지음, 푸른역사)
이재규 (자유기고가)(2015-06-09 13:38:55)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장르별 구분에 따른다면 인물평전에 속한다. 역사상의 구체적 인물에 대한 본격 평전은 우리에게는 낯선 장르인데 여기에는 잘못되어 온 역사교육이 끼친 영향이 크다. 역사는 두말 할 것 없이 사람의 이야기다. '역사'하면 떠올리게 되는 여러 제도나 문화재도 다 사람들이 빚어낸 결과물인데 지난 우리의 역사공부는 사람을 빼놓은 채 진행되었다. 그래서 남의 나라 인물인 나폴레옹이나 처칠은 잘 알아도 우리 역사상의 위인전기는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정도에, 그것도 충효의식 고취 목적의 관변 캠페인에 적합한 식으로 왜곡된 인물평정이 주를 이루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이처럼 빈약한 우리 인물평전에 좋은 전범으로 남을 만한 저작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지은이 조유식의 대단한 필력에 몇 번이고 글을 읽어가던 호흡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여말 선초 격동의 정치과정을 들여다보는 서술자의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이는데 정도전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되 당대 정치사와 사상조류를 교직시킴으로써 단편적인 잡기 수준을 크게 뛰어넘고 있다.

 조유식의 이 글을 통해 삼봉 정도전의 풍모와 사상이 사후 6백여년만에 어두컴컴한 지하의 섹에서 비로소 본격적인 조명을 받게 되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물론 이 책이 갖는 인물평전이라는 한계 때문에 정도전의 정치철학과 당대 정치환경에 대한 입장 등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여러 영역이 다소 가벼운 일변에 그친 아쉬움이 있긴 하다. 하지만 역사의 본류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저자의 직관력에 탄탄한 지식이 뒷받침되면서 정도전의 진면목을 당대 현실의 흐름 속에 제 위치시켰다는 점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필자는 이러한 성취가 가능한 요인을 사료와 실제 현실 사이를 좁힐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의 힘이라고 보는데 저자 조유식이 정치학고 출신이자 우리시대 대표적 진보언론인「말」지 기자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변화를 갈망하는 개혁론자의 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러면 조유식이 그토록 옹호하고 있는 정도전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일반인에게 새겨진 삼봉 정도전의 이미지는 태조 이방원의 정적으로서의 모습이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용의 눈물> 초반부에 비춰진 정도전의 모습도 예전보다 훨씬 격상되기는 했지만 그러한 자리매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용인 이방원이 주역이라면 정도전은 조역에 그치는 배역을 설정받았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의 현장에서는 어떠했을까. 정도전은 그 자신을 한나라 유방을 황제의 자리에 올린 장량에 비유했듯이 역성 혁명을 성공시키고 조선이라는 새나라의 설계를 담당한 개혁주체의 중심 중의 중심인물이었다. 뛰어난 유교이론가이자 정략가, 군사지휘자였던 정도전을 통해 성리학은 조선시대 지배이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새 도읍지인 한양의 도심 설계 및 이름도 유교정치의 이념에 따라 정도전이 구상한 대로 시행되었다. 이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던 정도전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00년전인 1398년 음력 8월 26일 이방원 일파의 기습을 받아 '반란 예비음모죄'를 뒤집어 쓰고 목이 잘렸다. 그 후 5백년간 정도전은 조선 왕조 주류의 역사에서는 만고역적으로 남아 있다가 고종 2년 대원군 대에 와서야 복권되었는데 복권뒤에도 주류 역사의 해석에서는 여전히 변방에 홀로 누워 있어야 했다.

 풍운아의삶을 살다 간 정도전의 일대기를 통해 우리는 좌절된 개혁의 역사 그 한복판을 만난다. 고려말에 개혁파의 정치학교였던 이색 문하에 들어감으로써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몇차례 겪어야 했던 불우한 유배시절, 그를 통해 얻게 된 밑바닥 민중과의 교감, 자신의 개혁사상에 현실의 힘을 더해준 이성계와의 동지적 결합, 우여곡적 끝의 역성혁명 성공, 권력의 2인자가 되어 재상중심의 철인 정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정상의 시절, 요동정벌을 놓고 명나라 주원장과 벌이던 긴장의 시간들, 한순간의 방심으로 허사가 되고 만 '미완의 개혁'.

 이 드라마틱한 사건의 연속을 통해 우리는 난세를 살아가는 실천적 지식인의 한 전범을 만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유교이상사회를  꿈꾸며 그것을 실현할 주체로 실천적 지식인(사대부)을 제기했던 정도전은 권력의 실질적 구심점과 그것의 행사방식에서 이방원과 결정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정도전의 재상중심주의는 조선조 말 왕의 주변에 빌붙어서 권력을 농단했던 세도정치류와는 분명 격을 달리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경제문감』에 쓴 재상의 역할론에서 "먼저 자기를 버린다. 무릇 자기를 버릴 수 있어야 사(私)가 없게 되고, 사가 없은 연후에라야 공(公)에 이를 수 있으며, 공에 이른 연후에라야 능히 천하를 자기 마음으로 삼을 수 있다."고 썼다.

 그러나 사대부의 현실참여를 축으로 신권중심주의를 주창했던 정도전의 운명은 권력획득을 위한 투쟁에서 남다른 감각을 보였던 이방원의 왕권중심주의와는 숙명적인 대결장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정도전이 이 숙명적인 대결에서 패배함으로써 이성계-정도전 연합세력이 추구했던 정치개혁, 철저한 민본주의 사상, 평민적이고 실용적인 성리학 해석, 장쾌한 대륙전략은 역사의 뒤안으로 밀려나고 이후 지속적인 이데올로기 정책에 따라 정도전의 삶과 사상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마치 바로 어제의 일인 듯 그 때 정도전이 살았던 격동의 역사를 대하는 흥분과 긴장 속에서 이 책을 꼼꼼히 읽은 독자라면 신돈·공민왕- 정도전-조광조-정조-실학파- 대원군- 해방직후-4·19로 이어지는 개혁운동의 흐름에서 근세 5백년간 우뚝 솟았던 개혁정치가로 정도전을 내세우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독자 한 사람이 고려 봉건사회의 일대혁신을 위해 몸을 일으킨 이래 단 한 순간도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살지 않았던 실천적 지식인 정도전을 역사의 법정에서 결코 패배하지 않은 사람으로 판결하는 순간, 그의 개혁사상은 오늘의 새로운 지혜로 되살아나게 되리라.

 덧붙여서 -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실패한 개혁의 역사>와, <한국역사와 개혁정치>, <세계의 개혁, 한국의 개혁> - 서울대 사회발전 연구소에서 김영삼 정부 하에서 공보처의 의뢰를 받아 연구서로 펴낸 이 책들은 개혁이라는 주제에 맞추어 우리 역사와 세계 각국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면서 현실적 방안을 제시하는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특히 정도전의 개혁사상이 우리 역사에서 어느 자리쯤을 차지하는가 진단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새로운 전환의 시기를 맞고 있는 이 때, 개혁정치의 현실적 출발점을 찾고자하는 분들은 꼭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