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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 | 칼럼·시평 [강준만의 문화비평]
미래학과 현실 정치의 '걷도는 만남'
강준만(전북대 교수 신문방송학과)(2015-05-26 11:00:51)


 평소 워낙 글 싸움을 많이 하고 살다보니 새삼스럽게 '논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글 싸움이든 말 싸움이든, 싸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건 '차원의 괴리'라는게 내 생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해 열시히 말싸움을 하다가도 나중에 꼭 '왜 반말해? 너 몇 살이야?' 코스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싸움은 그걸로 끝나는 거다. 힘이 세거나 빽이 센 사람이 이기에 된다.

 엉뚱한 길로 빠지는 그런 일이 보통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지식인들도 곧잘 그런다. 「한겨레, 97년 12월 10일자 」

아주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려있다. 기사 제목은 "정치학회 토론회 엉뚱한 발언 빈축"이다. 한국정치학회가 '대통령의 조건'이라는 주제로 연 학술토론회에서 일부 정치학자들이 엉뚱한 발언을 해 참석자들로부터 빈축을 샀다는 것이다.

 이정희 외국어대 교수는 엉뚱하게도 대선 경쟁에서 탈락한 이홍구 전 총리를 치켜 세우면서 책을 많이 읽는 것을 리더쉽과 연관지었다고 한다. 이정복 서울대 교수는 정치 지도자의 자질을 정치구조나 거시적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서울대의 학교장 추천 입학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논술 시험에 포함된 정치인의 도덕성 관련 문제에 대한 답을 거론하면서 고등학생의 인식 수준에서 평가했다고 한다. 또 신명순 연세대 교수는 '각계 각층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후보자가 새 지도자가 돼 한다'고 강조해 특정후보를 염두해 두고 한 말이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짧은 기사라 이 기사만으로 세 정치학 교수의 생각을 비판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신문에 칼럼을 쓰거나 TV에 출연해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교수들의 수준도 이 기사에 소개된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모두들 말 자체는 백번 옳은 말씀들을 하시는데, 문제의 본질이나 핵심과는 전혀 겉도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곧잘 하더라는 게 나의 감상평이다.

 이 글이 인쇄돼 나올 때 쯤이면 이미 맥빠진 이야기가 돼버리고 말겠지만,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으니 97년 11월 29일에 방영된 KBS「심야토론」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프로그램을 열심히 메모하면서 본 나로선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그 날 토론회에서 내가 유심히 관찰한 인물은 한양대 공성진 교수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언론매체에 자주 출연하고 학술 이벤트를 벌려 꽤 유명해진 교수다. 그는 미래학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간 미래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해왔고 그 이야기 가운데엔 파격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참신한 점이 많아 나는 오래전부터 그를 주목해왔다. 그런데 그 날 토론회를 지켜보고 내린 결론은 '미래학자는 현실 정치에 관한 공적 논의 마당에 끼어들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 날 토론회의 주제는 대선에 관한 것이었다. 각 정당에서 선거 책임을 맡고 있는 당직자들이 한명씩 출연했다. 그들은 토론이 시작되자마 뜨거운 설전을 벌였다. 국민회의 박상천 의원과 반박하는 그런 설전이었다. 선거 때인데 그런 정도의 설전이야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 다음 발언 기회는 공 교수에게로 왔다. 그는 '거북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진행이 돼서 제가 걱정이 됩니다.' 라고 말한다, 그 이후에도 박희태 의원과 박상천 의원의 설전이 벌어지자 그는 심판 역할을 자처하는데, 그거 유감스럽게도 양비론이다. 그들의 설전 내용이 「월간조선」의 지상 토론회에 그대로 나와있는 내용이라고 지적하면서 거기에도 한치도 못 나간게 답답하다는 듯이 두 사람에게 면박을 준다. 그는 아무런 갈등의 소지도 없는 미래학 담론의 교환을 예상하고 그 자리에 나왔던 걸까?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역시 곧 거북할 정도로 적나라한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먼저 TV토론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영어로 '텔레디마크러시' 운운하는 말은 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 그는 그게 '정치학자들이 쓰는 전문용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엔 그건 그냥 영어지 무슨 전문용어란 뜻일까? 그는 TV선거의 맹점을 지적하면서 그게 잘못되면 '선동가, 데마고그를 뽑게 된다' 고 우려했다. 시청자들이 '인상이 좋구나', '젊어 보이는 구나' 하는 발언은 이인제 후보를 겨냥해 한 방 먹일려고 했던 건 아닌지 좀 위험한 발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별로 말은 안되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국민신당의 박범진 의원이 언론의 불공정 보도를 문제삼는 발언을 하고 나서부터가 문제였다. 사회자는 토론의 교통정리가 어려워지면 공 교수를 부르곤 했는데 공교수가 사회자의 보조로 나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사회자와 죽이 잘 맞았다. 사회자가 의원들을 가리켜 '상호비방'이 난무하고 서로 헐뜯기에 바쁘다고 개탄을 하면서 공 교수에게 눈을 돌리자 공 교수는 그게 바로 '후진국 정치'라며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언론의 불공정 보도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공 교수는 큰 일 날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언론도 얼마든지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 특정 후보를 지지할 수 있다는 거다. 그건 당연하다는거다. 이 사람이 미국 사람인가?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미국처럼 신물들이 사설을 통해 특정 후보 지지를 밝힐 수 있게 해야한다는 주장은 있지만 그건 아직 실현되지 않는 거다. 선거법도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신물들도 손님 떨어져 나갈까봐 그걸 원치 않는다. 그런데 공 교수는 서기 2010년에나 통용될 엉뚱한 논리 하나로 언론의 불공정 보도를 문제삼는 박범진 의원에게 면박을 주니 그것 참 별 일도 다 있다. 박범진 의원은 TV토론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인 것 같다. 그는 무언가 억울한 표정을 짓더니만 순간 발언 기회를 얻지 못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이 토론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 하나가 미래학자의 기상천외한 이야기 하나로 그냥 묻혀 버리고 만 것이다. 공 교수는 갑자기 아무개 후보가 자주 외쳐대는 구호라 할 '정직'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하멜 표류기엔 "한국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 한다"는 말이 쓰여 있다나? 그는 그걸 전적으로 수긍하면서 외환 위기도 우리 사회가 정직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열변을 토한다. 그의 결론은 그래서 '정직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거 참 이상한 냄새가 계속 나네 그려. 사회자가 대선과 관련해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자 그는 약간 당황해 하며 '그건 모른다'고 이실직고 하면서 토론자로 나온 여성 민우회 이경숙 대표가 잘 알거라고 말한다. 내 생각이지만 그는 선거법 한 번 읽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침묵한 건 아니다. 자신은 '구조적'으로 이야기 하겠댄다.

 그리고 나서 공 교수는 자신의 전매 특허라할 '21세기', '세계화', '정보화' 등과 같은 단어들을 열거하면서 '대통령은 박정희식의 들쥐와 같은 산업생산형으론 안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민주 투사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건가? 천만의 말씀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인격'이랜다. 국민에게 배신감을 주지 않고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느낀 건 공 교수가 미래학엔 꽤 조예가 깊은 유능한 학자일든지 몰라도 현실 정치에 대해 토론을 하는 자리엔 전혀 적합하지않다는 것이었다. 그의 정치적 편향성에 대한 의혹은 제기하지 않겠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그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인 대선과는 차원이 맞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 늘어 놓음으로써 토론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겉돌게 하는데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어떡하다가 공 교수를 사례로 삼아 이 글을 쓰게 됐지만 우리 사회엔 공 교수와 같이 '거대 담론'으로 현실문제에 개입해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다. 시인 김지하씨나 소설가 박경리씨도 그런 지식인에 속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 여기서 제기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한번 다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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