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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 | 칼럼·시평 [이십대의 편지]
슈퍼맨이었던 여대생
박솔희(2014-08-01 16:08:57)

슈퍼맨이었던 여대생


나는 몹시 아팠다. 원인 모를 피로와 두통이 하루 종일 덮쳐대는 바람에 하루 종일 자야 했다. 온갖 약과 이런저런 치료에도 소용이 없었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위염. 하지만 단순한 위염이라기에는 증세가 복잡했다. 결론은 과로 그리고 스트레스였다. 처음엔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신경외과 소개장을 써주는 의사선생님께 “저 스트레스 안 받는데요?”라고 반문했다. 분명 스트레스 지수가 높게 나온 검사 결과를 보고도 나는 믿지 않았다. 내가 무슨 스트레스를 받는담!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슈퍼맨이었기 때문이다. 슈퍼맨은 아플 수 없었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아야 했다.

나는 슈퍼맨이었다. 대학을 다니며 수많은 동아리 활동을 병행했고 때로 임원도 맡았다. 대학생 신분으로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하루쯤 밤을 새워도 커피 두 잔이면 끄떡없었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하루 한 끼만 먹었다. 한창 학교를 다니며 책을 쓸 때는, 극심한 수면 부족으로 수업 중 화장실에 가서 토한 적도 있었다. 그러고 나서는 멀쩡한 얼굴로 강의실로 돌아와 남은 수업을 들었다.


그 와중에 서울은 물론 지방에까지 강연을 하러 다녔다. 사람들은 ‘재학 중 두 권의 책을 쓴 대학생 저자 박솔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나는 나의 ‘열정’을 팔았다.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고 학교 생활과 집필을 병행하면서도 장학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레 떠들었다. 청중은 경탄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내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왜 슈퍼히어로의 이야기를 좋아할까. 인간의 능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 아닐까. 인간의 몸으로 감히 슈퍼맨을 꿈꾼 결과 내가 얻은 건 위염, 불면증, 척추측만증을 비롯한 온갖 스트레스성 질환이었다. 학교를 다니는 중에는 악으로 깡으로 버티느라고 아픈 줄도 몰랐는데, 졸업을 하고 나자 그간의 긴장이 싹 풀리듯 나는 아팠다. 병은 내게서 슈퍼맨 망토를 빼앗아갔다. 나는 그저 덜 자란 인간일 뿐이었다. 엄마가 필요했고, 잠이 필요했다. 나는 엄마 곁에서 오래오래 잠을 잤다. 그리고 나서야, 슈퍼맨이 아닌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오찬호 선생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에서 나같은 대학생을 슈퍼맨이 아 닌 ‘괴물’이라 부른다. “모 자기계발서에서 가장 충격적인 일화는 공모전 6개를 동시에 준비하기 위해 커피믹스를 몇십 개씩 씹어 먹으면서 밤을 지새웠다는 이야기다. 취업 준비를 위해 당연히 위장병이 걸려야 하는, 그리고 그것조차 이겨내야 하는 괴물이 취업하는 사회를 어떻게 ‘좋은 사회’라 할 수 있겠는가.”


그 괴물은 나였다. 열정이라는 이름의 마약을 맞은 듯, 벌게진 눈으로 하루 열두 시간씩 파워포인트를 들여다보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던 나였다. 환각에 취한 듯 신이 났고 스스로의 성취에 들떴다. ‘부럽다’고 말하는 또래를 속으로 경멸했다. 나는 정말로 내가 슈퍼맨인 줄 알았고, 그렇게 살다보면 지구를 구원할 수도 있는 줄 알았으니까.


이것은 비단 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와 비슷하게 살던 친구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모습을 본다. 대학원에 다니는 친구는 며칠 밤을 새다 픽 쓰러지는 바람에 강제 휴학을 하고 한 달이나 입원치료를 받았다. 이십대 초중반의 꽃다운 나이에 내장기관의 혹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거나, 심지어 암에 걸려서 휴학하고 치료를 받는 친구들도 봤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들 강도 높은 슈퍼맨, 혹은 괴물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 정도는 다를지라도, 많은 이십대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내 주변에는 “쉬고 싶다” “일폭탄” 같은 말들을 입버릇처럼 하는 또래가 많이 있다.


왜 이십대는 괴물이 되어야 했을까? 다시 한 번 오찬호 선생의 말을 빌려오자면, 그건 밑 빠진 독처럼 ‘열정’을 재는 깡패 같은 시스템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열정’을 평가받겠다는 건 그 자체가 퇴행적이다. 열정, 의지, 성실성… 이런 건 지극히 주관적 영역에서 평가되는 것이기에, 본원적으로 객관의 잣대를 들이댈 성질이 아니다. 즉, 겉으로는 ‘시간관리’겠지만 사실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든 결국 그 평가는 이를 ‘열정’이라 인정하고 받아줄 권한이 있는 누군가의 주관성에 기초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관절, 무엇을 위한 열정이란 말인가?


박솔희

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청춘, 내일로』와 『교환학생 완전정복』을 쓴 대학생 저자로 알려졌지만 현재는 졸업 후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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