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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7 | 칼럼·시평 [문화칼럼]
교황의 방한, 평화와 화해의 진정한 의미
호인수 신부(2014-07-03 11:29:49)

초등학교 시절에 내가 알던 교황은 천주교회의 ‘볼 수 있는 으뜸’이었다. 볼 수 없는 으뜸은 당연히 천주님(하느님 혹은 예수님)이었다. 주일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다. 작년 3월에 제 266대 교황에 선출된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자신의 이름을 기라성 같은 전임 교황들을 제쳐두고 가난한 이들의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서 따온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취임한 지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일약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그를 미국의 타임지는 ‘2013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가 다음 달에 우리나라에 온다. 귀빈 중의 귀빈이다. 우리 천주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범정부 차원의 준비도 시간이 빠듯하다는 말이 엄살은 아닌 듯하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교황의 초청인이 한국 정부냐, 교회냐?” 글쎄, 가톨릭은 분명 거대한 조직이지만 일개 말단 조직원에 불과한 나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교황은 전 세계 로마가톨릭교회의 으뜸이며 동시에 바티칸국의 원수이니 교회도 국가도 그에 걸맞은 예를 갖추겠지만 나의 관심사는 의전이나 접대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머무는 짧은 4박5일 동안에 보일 공식 비공식을 포함한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다. 

 얼마 전에 가톨릭신문사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한국교회에서 제일 시급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자그마치 응답자의 98%가 변화와 쇄신이라고 응답했다. 작금의 교회의 현실이 얼마나 암담하고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그 가운데 제일 많은 사람들이(44.08%) 성직자들의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를 그 요인으로 짚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한데 그간의 교황의 행적을 보면 그에게는 교황보다 교종이, 짐(朕)보다는 과인(寡人)이라는 지칭이 더 어울려 보인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면서 몸종으로 자처한 예수의 겸손이다. 나는 교황궁과 전용차를 마다하고 평범한 숙소에 기거하며 서민들과 똑같이 대중교통을 선호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한국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교황이 아시아 방문을 계획하면서 첫 번째로 굳이 한국을 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이 지구상에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은 분단의 땅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지구촌에 평화와 화해를 이루려 혼신의 힘을 쏟는 그의 노력이 남달리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지난 6월에 중동지역 분쟁과 갈등의 주인공들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두 정상을 비롯하여 유다인과 이슬람, 무슬림의 상징적인 대표들을 모두 바티칸에 초청해서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연 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와 열망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자신이 교황이 된 이유가 오로지 거기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우리는 교황청 대변인 롬바르디 신부의 훈수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서울주보>와의 인터뷰에서 교황을 영접하는 한국교회가 특별히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교황이 누구인가를 잘 알기 위한 공부라고 분명히 대답했다. 다시 말해서 교황의 소망은 황제 대우가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갈가리 찢기어 신음하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라는 것을 알라는 암시다. 매우 요긴한 지적이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도 유독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가 보이지 않는 내실보다 눈에 보이는 의전이나 행사에 치중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나 국가의 일부 권력자들이 이번 교황의 방한을 자신들의 권력 확장이나 유지에 교묘히 이용하려 든다면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절호의 기회는 그리 자주 오지 않는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주는 평소의 말이나 행동에서 롬바르디 신부의 말이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지금껏 나는 40년 가까이 사제생활을 하면서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예수의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산다는 것을 발견했다.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가 그렇다. 그것이 교회와 신자의 눈부신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는 이유다. 도법스님도 한국불교에 대하여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부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불자들이 많다고.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누구인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를 맞이한다면 단언하건대 우리는 풍성한 결실은 고사하고 엄청난 인력과 돈과 시간만 낭비하는 거대한 쇼 이상을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다. 수십만 명이 운집하는 광화문의 시복미사보다, 전국의 수도자들이 다 모여서 벌이는 꽃동네의 대규모 잔치보다, 그가 보고 싶고 끌어안고 싶어 하는 사람은 따로 있을지 모른다는 의문을 지금이라도 새롭게 제기해보자. 그리 어렵지 않게 정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우리나라와 교회에는 교황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과 의지가 녹아들어있는 <복음의 기쁨>을 읽고 공부했기 때문이다. 늦지 않았다. 그 답을 들고 교황이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리로 안내하면 된다. 의외로 소박하고 간단하다. 이게 바로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이루리라 다짐하는 한국교회의 변화와 쇄신의 첫걸음이다! 

 그곳과 그들은 과연 어디이며 누구일까? 어쩌면 우리는 교황이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정상을 불러 차를 한잔 나누고 강정에서 평화기원 미사를 드리고 팽목항에서 연도를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현 가능성이 1%도 안 되는 순진한 바람일까? 여전히 나는 만화 같은 꿈을 꾸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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