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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7 | 칼럼·시평 [문화시평]
그래서 저녁식탁에 앉았다
서신갤러리의 <천년의 얼굴-젊은 초상>전
유근오 전북대 강사, 미술과(2003-07-04 14:59:38)
오뉴월의 온화한 기후와 수목의 푸르름, 이 상큼한 자연의 유혹을 이겨내려는 몸부림은 나른한 봄날 식후의 졸림만큼이나 버겁다. 여러 가지 사회적 여건이나 구색 좋은 변명으로 이 자연의 부름에 즉(卽)하지 못할지라도 일상적 상념을 떨쳐 버리고 문화적 사유를 즐길 만한 다양한 ‘꺼리’가 있어 이 계절이 좋다. 전람회가 열리는 화랑이나 미술관을 관람하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림에 문외한일지라도 전통의 계승과 외래 이념의 비판적 수용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동양화와 현학적 ‘글발’과 난해한 형상으로 ‘매무새’를 내고 있는 현대미술과 한번쯤 통성명하고 마주하는 것도 공포 영화나 에로 영화 한편 감상(?)하는 흥미에 버금간다. 요즈음은 작가들이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긴 겨울의 음습한 추위를 견뎌내며 갈구해 낸 작품들을 전시하는데 좋은 때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이 시기-전시 장소를 섭외 하기도 쉽지 않은-에 대학(원)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전시공간을 할애하는 서신갤러리의 기획은 화랑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쉬운 일도 아니며 어느 정도 용기와 모험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천년을 이끌어 갈 새로운 ‘자화상’을 통해 ‘작업 경향성과 태도’, ‘젊은 미술의 속도와 방향’을 가늠해 보려는 기획 의도는 바람직한 측면도 있고 신선하다. 그러나 기획의도와 그 결과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으니. 유월의 날씨로는 무더운-섭씨 32.5도를 오르내린 오후에 전시장을 찾은 필자의 눈에 기획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당혹감으로 다가온 몇 가지 의혹을 집고 넘어가려고 한다. 우선 대부분의 전시 작품들이 ‘자화상’이란 작가의 신체, 특히 작가의 얼굴 주변 부에만 국한한다는 ‘약속’되지 않은 미적 규범을 충실하게 따르는 준법정신에 놀랍고, 자화상이라는 독특한 양식의 제약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현대적 형상성은 재현적 코드(code) 위에 추상적 얼버무림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일 것이라는 몇몇 전시자들의 공상적 연출도 기이하다. 그런 태도 속에는 선행하는 양식들에 대한 천착이 있을 수 없고 독창적 유형의 형상성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여기에는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형상과 추상 그리고 오브제라는 혼합식 적당주의(후기 모더니즘식의 절충주의와는 다른)가 난무할 뿐이다. 이런 현상은 전시자들만의 허물은 아닌 듯 싶다. 바로 우리 대학 미술교육의 ‘자화상’을 간단없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전시 참가자들에게 일정하게 주어진 65×53㎝의 규격의 제한 속에서, 아직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론이 구축되지 않은 학생들에게, 그리고 이번 전시가 처음일 수도 있는 다수의 전시자들에게 주문되는 기대와 요구는 우리의 성급함이나 과욕의 소치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전시 포스터 상의 참가자 수와 전시 작품 수간의 엄청난 차이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시대의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라면 이 전시회는 분명 ‘성공’한 것이다. 동?서양 미술사는 두루 섭렵한다 해도 작가의 초상화는 각 시대의 주요 고객인 왕족, 귀족, 부르조아, 수집가, 화랑 그리고 메세나의 주문 대상이 아니며 정치?종교?경제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작가 자신의 고유 영역이었으므로 그 그림의 본질이 비합리적이고 왜곡으로 둘둘 포장되어 있던, 작가의 농지거리였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화가의 초상을 메를리 퐁티(M. Ponty)의 ‘밖을 보는 것이 안을 보는 것이고, 안을 보는 것이 밖을 보는 것’이라는 변증법적 절차의 시선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말은 곧 ‘자화상’이 他者(autre)와 대면한 自我(je, ego)의 탐구를 넘어, 작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구조의 변화와 미술양식의 반영을 넘어 때로는 작가의 소심함이나 나르시스 콤플렉스에 기인한 자기 기만의 과잉 포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시각적이고 감각적 체험 대상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우리들은 그것을 보아 왔다. 자아의 발견과 함께 자아를 포기해야 하는 램브란트의 자화상에서, 당대의 초상화와는 다르게 평상복인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관복인 오사모를 쓴 특이한 도상을 취함으로서 조정(朝廷)과 산림(山林)을 다같이 선망하는 선비들의 보편적 양면성을 표암 강세황의 자화상에서, 자아가 자아로서 존재할 수도 없고 또 포기할 수도 없는 불길한 징조의 고흐의 자화상에서, 서구의 고질적 이원론 즉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불안한 신음소리인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샤갈의 자화상에서, 도상과 지표의 나란한 중첩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미지와 말하기의 단절을 뒤샹의 자화상에서, 전쟁과 가난의 절망 속에서 삶의 마지막 연결 고리인 토속적 그리움과 가족애를 부둥켜안는 박수근과 이중섭의 자화상에서, 거울과의 대화를 통해 ‘나’와 ‘너‘ 그리고 다시 ‘나’로 돌아오는 퇴행적 형식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비디오 아티스트 비토 아콘치의 자화상에서 우리는 ‘그것’을 보았다. 따라서 ‘자화상’은 작가들의 여타 작품들과는 다른 부인할 수 없는 흡인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 전시회에서도 즐거움은 있다. 갤러리 입구를 들어서면 보이는 유다희의 자화상은 사진전사물과 오브제의 적용을 통해 회화의 평면성과 깊이, 작가의 초상과 현실간의 간극을 드러내면서도 완결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소비만능사회의 상징물인 팰트 용기를 사용하여 우리시대의 병마를 적나라하게 도려내면서 치유하는 애정어린 감수성은 지금을 사는 우리자신들의 초상을 보는 것 같다. 그 기괴스런 산업폐기물의 집적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분명하게 보인다. 예쁘기도 하다. 신명식, 최유리, 임현채의 자화상에서 보이는 재현묘사의 기량은 주목되나 사실주의적 양식들의 혼재로 한 양식의 극단적 탐구를 볼 수 없으니 실망과 안타까움이 공존한다. 이 밖에도 몇몇 전시 작품이 시선을 자극하나 여기에서의 언급은 허허롭다. 탄식과 울렁거림 속에서도 이 즐거움과 가능성 때문에 젊은 작가들의 전시회는 계속되어져야 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녁식탁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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