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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 | 칼럼·시평 [서평]
{괭이부리말 아이들}리얼리즘 동화는 아직도 펄펄 살아 있다
김종필 동화작가·교사(2003-03-26 16:51:19)

나는 동화를 소설이나 시보다 자주 접한다. 물론 좋은 동화를 쓰고 싶어하는 욕심에서 출발한 것이겠지만 그 간단명료함이 맘에 들기 때문이다. 대체로 소설은 호흡이 길고 몇 번의 반점이 찍히고 난 다음에야 온점이 나타난다. 그 온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짜증나기도 하고 적절치 못한 문장이라도 나타나면 책을 덮고 싶어진다. 시는 짜릿한 맛이 있긴 한데 정신을 여간 집중하지 않으면 핵심을 놓치기 일쑤다.
반면 동화는 온점 간격이 짧으면서도 핵심을 파악하기가 매우 쉽다. 꼭 내 수준이다. 더욱이 활자를 놓치더라도 그림이라는 매개체가 있어 글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어 좋다. 동화책을 사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좋은 동화책을 고르는 비결 중 하나는 반드시 그림을 자세히 보고 고르는 것이다. 동화에서 그림의 비중이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은 성인문학을 하는 사람들만큼 자신의 인세를 오롯이 챙기지 못한다. 화백의 몫을 챙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요즘 읽었다. 책을 읽기 전에 버릇처럼 그림부터 훑어넘겼다. 송진헌 화백이 연필드로잉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연필로만 그렸으니 밝을 리가 없다.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미 알아버린 셈이다.
창작과 비평사가 주최하는 제4회 좋은 어린이 책 공모 수상 작품집이다. 어린이라 함은 보통 초등학생까지를 말한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해서 중학교 일 학년까지를 가리킨다고 치자.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이나 등장인물을 볼 때 누가 보아도 청소년이 읽을 글이다. 여기에 창비의 상업성을 더하여 양장본으로 펴내면서는 활자의 크기와 그림의 흐릿함이 어린이용 책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말았다.
어린이 책 공모에서 상을 받았든 청소년 책 공모에서 상을 받았든 사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긍정적으로 본 것은 발로 뛴 사실주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아동문학 동네에서는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다행스러운 것은 문학 정치꾼들이 설쳐대는 추잡스런 싸움은 아니고 '한국 아동문학의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벌어진 논쟁이었다. 국민의 정부 이후 혹은 『해리포터』이후 벌어진 출판 시장에서의 '판타지 문학'의 큰 성장이 작가들을 헷갈리게 했다. 더욱이 동화는 판타지와 관계맺기에 얼마나 좋은 장르인가?
층은 얇으면서도 영향은 지대한 몇몇 아동문학평론가들이 이 싸움에 불을 당긴 것이다. '생활동화', '사실동화', '리얼리즘동화' 로 불리며 80년대 이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주류였던 동화들이 실효성을 의심받은 것이다. 난 이 싸움이 곤혹스러웠다. 다수의 새내기 작가들이 그들의 손끝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이 많은 선배 몇과 나는 고갤 흔들며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 주장의 가장 큰 근거는 독자들이 원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독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투철한 작가 정신과 세상을 바르게 보는 정확한 눈이라는 것을 『괭이부리말 아이들』과 『그리운 매화향기』(주중식, 미군사격장이 있는 매향리 문제를 다룬 작품, 제2회 어린이문학상 수상작)가 보여주고 있다.
둘의 공통점은 발로 쓴 작품이라는 것이다. 작가들이 작품 한가운데 뛰어들어 생활하고 관찰하고 느끼고 껴안아 만들어낸 작품이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인천의 가장 오래된 빈민지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글쓴이는 실제로 이 곳에 살면서 오랫동안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 찾기를 하면서 쓴 글이다.
줄글에는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주인공의 눈과 생각에 따라 내용을 이해한다. 그런데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다. 주변 인물이 따로 없다. 동화(소년소설)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구성이다. 어떤 신문기자는 쌍둥이 자매 숙자와 숙희가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책을 다 읽고 평을 썼는지 모르겠다. 독자들도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시라. 정말 그 둘만 주인공인지.
고등학교 중퇴생면서 본드에 빠진 동수와 그의 동생 동준이(초등학교 5학년이며 숙자의 친구), 동수의 친구이면서 어눌함과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집에서마저도 쫒겨난 명환이. 이들을 거두어 보듬고 사는 영호(스물여섯살 총각). 영호의 어린 시절 괭이부리말 친구이며 지금은 숙자의 담임인 명희. 이들 모두가 주인공인 동화이다.
하나같이 아픔을 갖고 있다. 가난의 대물림, 가정폭력과 끝없는 실직, 자식을 내팽게 치는 어른들의 가출. 이런 환경에 살면서 아이들이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미래는 없다. 씻지 않은 밥그릇에서 나오는 구더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는 아이들. 지금 당장 배고픔을 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미줄마냥 엉킨 괭이부리말 마을길처럼 도무지 현실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될 대로 되라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동수와 명환이가 선택한 다른 세상맛보기는 본드흡입이다. 이런 아이들을 누군가가 껴안아야 하는데 결코 다른 사람은 껴안지 못한다.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마을의 청년 영호가 그들을 껴안는다. 마음을 열지 않는 동수를 향해서 명희의 도움을 받아가며 끊임없이 그리고 조건 없이 가슴을 연다.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들을 필요로 해."
사랑을 무서워하던 동수도 드디어 마음을 연다. 되찾은 희망을 품고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봄,봄,봄,봄이 왔어요....'라고 콧노래 부르며.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주인공으로 삼다보니 호칭처리가 어색했다. 그리고 고등학생의 세계를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드러나서 초등학생이 읽기엔 좀 어려울 것 같다.
이 책은 모 방송 덕분에 유명해진 책이다. 독자들 대부분이 방송 때문에 책을 구입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책이라면 리얼리즘 동화의 실효성을 의심받는 시대에 '띄움을 좀 당해도' 예쁘게 봐줬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다.
2월 16일 ㅎ신문을 보니 작가는 인세로 벌어들인 수입 1억3천만원을 고스란히 미신고 복지시설에 기부했다고 한다. 발 딛고 있는 곳을 껴안고 가는 작가와 작품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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