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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3 | 칼럼·시평 [문화칼럼]
잃어버린 가톨릭의 양심, 평화방송 사태
고흥석(전북대 교수 농공학과)(2004-01-29 11:54:22)

“평화방송은 방송이 공공매체인 이상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당연히 맡아야하며, 더구나 종교방송은 가난하고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사람에게 더 큰 관심을 표명해야 한다.”

1891년 교황 레오13세는 『노동헌장』(Rerum Novarum)을 통해서 노동자의 결사권과 노동조합의 정당성을 분명히 주장하였다. 이것은1848년에 발표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서에 비하면 너무나 늦었다는 논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노동관계법이 세계어디에서도 제정되기 훨씬 이전에 발표되었고, 그러한 법제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노동헌장』에서 가톨릭 교회는 노동조합이란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조직하여 공동으로 생활환경과 조건을 개선하며 권리를 회복하려는 정당한 노력이고, 노동운동은 부당한 요구를 하면서 사용자의 재산을 강탈하고 그를 제거하려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부당한 처우와 침해를 피하면서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집합행동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노동조합은 노동계층이 대폭으로 확대된 현대사회의 불가분의 요소이며 사회질서를 결속하는 건설적인 요인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그뿐아니라 노동자의 훈련과 규율도 강화하는 조직이라는 점이 인식되어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노동헌장』발표 이후 가톨릭은 전세계적으로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이 부각될 때마다 사회회칙을 발표하였다. 특히『노동헌장』에 대해서는 노동자의 권리와 의무, 노동자의 존엄성에 합치하는 해결책을 노동자와 함께 강구하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자체적으로 부여하여, 1930년에는 교황 비오 11세가 『노동헌장』반포 40주년에 즈음하여 『40주년』(Quadragesimo Anno)을 발표하고 노동헌장의 주제를 새로운 사회적 상황에서 검토한 바 있다. 이 회칙은 사적소유권에 대하여 보다 비판적이고, ‘공산주의’를 거부하지만, ‘완화된 사회주의’는 기독교의 원칙과 약간의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양자를 구별하고 있다. 다시 1981년에는 『노동헌장』반포 90주년을 맞이하여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을 발표하고 노동문제는 사회문제의 관건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가톨릭 교회는 중세의 봉건성과 권위주의의 어둠으로부터 『노동헌장』의 발표를 전환점으로 새롭게 그 정체성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민주화의 역사에 부끄러움으로 기록될 평화방송 사태가 가톨릭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자부하던 『노동헌장』의 반포 100주년이 되는 해에 발생하고 말았다.
지난 1월 24일 평화방송 조덕현 사장신부는 사용자측의 보도국 기자 무더기 중징계와 보도국 기능 축소에 항의, 파업농성 중인 노조 조합원 29명을 공권력투입을 요청하여 연행하였다. 그 동안 조덕현 사장신부의 경영진은 순수 선교방송을 구실로, 『정의 구현 사제단』소석 신부등의 출연을 섭외과정에서 막아내고 방송내용도 사전 검열해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은 교체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조처를 취해왔고, 지난 해 10월말 교양프로에서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 선포에 대한 비판적 내용이 언급되자 담당부장이 이를 불방토록 하는 등의 조치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덕현 사장신부는“이번파업은 평화방송을 한겨레 신문보다 더 심각한 좌경매체로 만들어 가기 위해 보도국 간부들과 추종세력들이 계획한 고도의 작전”이랃고 노조의 파업을 왜곡하였다. 한겨레 신문을 좌경언론으로 규정할 정도로 극도로 편향된 언론관을 지닌 인물이 보도국 간부들에게 여러차례 요구하였다는 공정방송은 본래의 의미의 공정방송이 아니라 ‘정권의 구미에 맞는 방송을 하라’는 편파방송 지시임이 분명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현재 평화방송 노조는 노조원 60명 가운데 9명이 해고, 14명이 정직, 6명이 감봉처분, 3명이 구속된 사태로 진정된 실정이다. 이번 평화방송 사태의 본질은 정권의 언론 장악 음모와 가톨릭 내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결탁에 의한 정치권력 주도의 일련의 방송질서 재편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가톨릭은 『정의구현사제단』을 중심으로 유신과 5공의 폭압적 파쇼체제에서도 스스로 양심을 지키면서 노동자․농민 ․도시빈민들의 민중운동에서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깃발을 높이 치켜세웠고, 분단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의 주체로서 앞장을 서왔는가 마녀, 6월 항쟁에서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폭로하면서 변혁의 기폭제로서 불씨 역할을 다 하였다.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들까지도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양심의 보루로 인정받아왔다.
그러나 멀리는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서 신사참배등으로 반민족성을 드러냈고, 근래에 와서는 제 5공화국 초기에 사제가 국보위 입법회의에 참여한 사실, 부산 성분도 병원과 대구 파티마병원 노동쟁의 발생하였을 때 폭력경찰 투입으로 노동조합을 탄압한 사건, 문규현 신부의 방북을 둘러싸고 『정의구현사제단』과 주교단의 엇갈린 해석과 더불어 교황청 대사인 이반 디아스 주교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데모크래지'로 비유한 망언사건, 11개의 가톨릭 재단 학교에서 28명의 전교조 가입교사에 대한 해고 조치, 지난 해 정부의 우민화 정책과 쟁점 희석 전략에 편승한 ’내탓이오‘운동, *90년 수원 원곡성당 소재 반월 노동 사목 폐쇄 사건, 마치 5공의 조찬기도회를 연상케하는 김수환 추기경과 노태우 대통령의 오찬모임 등을 미루어 보면 평화방송사태 역시 이러한 가톨릭 내의 일련의 보수화 경향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필리핀 민주화의 선봉이 되었던 ‘라디오 베리따스’와 로메로 대주교의 재임기간의 엘살바도르의 라디오 방송 “YSAX'와 같은 방송을 기대하면서 한푼 두푼 성금을 모아 설립된 평화방송에 공권력이 투입되어 기자들을 구속하고 해고시키는 사태에서 가톨릭 내부의 보수․진보의 진통은 이제 올 때까지 온 듯한 느낌이다.
평화란 성서적, 히브리적 개념으로는 샬롬(shalom)이며 이는 긍정적 차원인 ‘안전하다’ ‘전체적인’이라는 뜻인데 반하여, 그리스적 개념의 평화인 이레네(Eirene)와 로마적 개념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힘과 법률의 자유의 균형상태, 지배질서에 의한 평화라는 부정적 차원을 나타낸다. 완전한 평화는 진정한 정의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지고, 힘의 균형과 지배질서에 의한 평화는 단지 힘에 의한 지배를 긍정함으로써 생긴 현상적 고요를 뜻하는 거짓 평화인 것이다. 참 평화가 민중의 평화라면, 거짓평화는 지배계급만의 평화인 것이다. 스스로 평화를 추구하는 ‘평화’방송은 힘과 지배질서에 의한 거짓 평화와 권위주의를 배태시키고 사회와 교회의 경직화를 유발하는 제도적 교회로서의 비민주성을 이번 사태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말았다. 보수화된 교회는 단지 억압자를 위한 냉정한 안위요 현실상태에 대한 관점을 은폐하는 부수현상일 뿐이다.
평화방송은 방송이 공공매체인 이상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당연히 맡아야 하며, 더구나 종교방송은 가난하고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사람에게 더 큰 관심을 표명하여야 하고, 유신시대와 5공 시절 카톨릭이 양심의 촛불을 밝혀 비신자들에게도 하느님의 정의를 실감케 했던 사실을 계승한다는 점에서도 구속․해고된 노조원들을 원상회복시키고 종교이기주의와 권위주의에서 껍질을 깨고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속살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저버리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가톨릭 교회가 역사적 요구를 무시하고, 자신의 역할을 독재권력의 동반자로 제한하면 교회의 민족 간의 괴리를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하여 민중의 돌팔매를 면치 못할 것이다. 잃어버린 가톨릭의 양심이 회복되기를 평신도로서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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