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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8 | 칼럼·시평 [[문화칼럼]]
흐르는 강물 따라 타박타박 이야기 속으로
황풍년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2021-08-10 10:30:57)

흐르는 강물 따라 타박타박 이야기 속으로

황풍년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



광주천을 따라 타박타박 걷기 시작한 6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시간이 강물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맵찬 겨울바람에 옷깃을 세우고 종종대며 출근을 서둘던 기억이 벌써 희미해졌다. 


앙상하던 버드나무에 움이 트고 물이 오르나 싶더니 치렁치렁 늘어뜨린 가지마다 초록 잎사귀가 미어졌다. 엊그제 장마철에는 붉덩물이 무섭도록 거세게 출렁이며 흘러내렸다.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는 아예 가뭇없고 작은 나무들은 우듬지만 밖에서 흔들거렸다. 며칠 동안 걷기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빠지기만 기다렸다. 


어느덧 불덩이처럼 뜨거운 태양이 자글거리는 여름이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더위에 걸음에도 땀이 줄줄 흐르지만 아직은 걸을 만하다. 이따금 강물을 훑고 한줄기 바람, 먹잇감을 찾아 겅중겅중 걷는 왜가리, 가까이 다가가도 좀체 사람을 피하지 않는 비둘기들, 우북하게 자란 풀숲과 하늘거리는 풀꽃들, 발에 채는 돌멩이 하나까지, 정겨운 길동무다.   


걸어서 출퇴근을 하게 광주문화재단이라는 새로운 직장만큼이나 변화였다. 업무 공간과 시간이 엄격한 속에서 이뤄지면서 익숙했던 일상을 완전히 바꿔야 했다. 산과 , 바다를 향해 자유롭게 내달리던 습관을 접었고 시간도 무척 빠듯해졌다. 게다가 돌림병이 수그러들지 않는 시절인지라 걷기만큼 자연스러운 거리두기 운동도 없었다.


새로운 직장과 업무, 낯선 관계와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를 쓰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도 졸아드는 같다. 아마도 3 임기를 무사히 채우려거든 발걸음을 멈춰서는 성싶다. 


걷기 혁명 체감하는 날들, 광주천을 걷는 즐거움이뜻밖에도쏠쏠하다. ‘걸으면 비로소 보이더라 예찬이 절로 나온다. 날마다 새로운 발견의 연속이다.


학림교, 남광교, 학강교, 양림교, 금교, 서석교, 부동교, 중앙대교, 광주교, 광주대교. 우선 걷는 구간에 걸쳐진 10개의 다리 이름을 저절로 있게 되었다. 얼핏 비슷한 듯해도 강폭에 따라 길이도 너비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언제 어떤 연유로 다리를 놓게 되었는지, 양쪽으로 어떤 동네들을 잇고 있는지, 다리에 붙여진 이름들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날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궁금증과 이야기들을 곱씹는다. 새삼 내가 딛고 사는 도시에 새록새록 무장무장 정이 붙는다.  


도심을 흐르는 대부분의 하천이 그렇듯 광주천도 직강공사로 모습을 잃은 오래다. 여름철 우기를 제외하고는 거대한 모래톱들이 군데군데 펼쳐진 건천(乾川)이었는데, 상류 쪽으로 올린 물을 내려보내면서 연중 마르지 않는 개천이 되었다. 지금이야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의 자료사진을 보면 광주천 주변으로 숲정이가 울창하고 곳곳에 정자들이 어우러진 빼어난 풍광을 자랑했었다.


개천 좌우로 둑길 너머 동네들을 올려다보면 도시 전체가 재개발 사업으로 분주하다. 


이미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데도 광주천을 따라 높다란주상복합건물들이 아득하게 솟구치는 중이다. 9명의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붕괴사고의 현장도 광주천변 재개발지구다. 올망졸망 집들과 작은 가게들, 마을공동체의 정취들이 금세 폐허로 변한 곳이다.


허물어진 집집이 잔해로 뒤덮인 동네마다 살풍경이다. 잠시 눈길에도 가슴이 저릿해진다. 저기에 깃들어 사는 동안 흐드러졌던 애틋한 사연들과 빛나던 추억들도 끝내 잊히고 말지니…. 묵은 이야기들이 쓸려나간 자리에 어떤 이야기들이 채워지려나. 이야기가 문화를 지탱하는 힘인데, 걷는 기쁨을 위협하는 걱정거리도 자꾸만 발끝에 들러붙는다. 역시나 모든 완벽하게 좋은 일이란 없는 모양이다.  


어느 지역이든 세월 따라 겉모습은 바뀌고 더러는 지워지더라도 반드시 품어내고 지켜야 소중한 이야기가 있다.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이, 특히 문화를 일삼는 사람들에게 부여된 소명이다. 지역의 특정 장소에 얽힌 인물과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은 결코 과거에 머물자는 퇴행이 아니다. 굽이굽이 파란의 역사의 속에서도 민중 속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는 이야기란 딛고 현재를 가늠하는 잣대요, 나아갈 미래를 가리키는 깃발이다. 


광주천에도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마냥 무수한 이야기가 스며있다. 그나마 원형을 솔찬히 간직하고 있는 광주 최초의 근대공원인 광주공원과 주변은 이야기의 보물창고다. 


광주공원 아래쪽 광주천의 널따란 모래사장은 오일장이 섰던 자리다. 구한말 왜놈들이 호남의병장을 죽인 처형장이요, 1910 3·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3 10 광주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광주공원은 일제강점기 신사로 오르던 계단이 남아있어 치욕의 과거사를 일깨워준다. 그러나 자리는 4·19의거의 탯자리요, 1980 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들의 집결지였다. 80·90년대를 관통하는 지난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민주시민과 열혈 학생들이 독재에 항거하는 투쟁 의지를 북돋우던 집회 장소였다.  


자리에 뿌려진 조상들의 피와 , 정의로운 저항의 정신을 흐르는 강물인들 어찌 지울 있으랴. 공원 앞에 늘어선 포장마차를 드나드는 시민들도 마땅히 알아야 역사다.


걷기에 이력이 붙을수록 함께 걷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걷기나 자전거 타기가 편해지도록 도로 형편과 교통정책도 획기적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 아침도 폭염, 홍수, 산불, 변이 바이러스 창궐 같은 우울한 뉴스를 들으며 생각한다. 개개인의 일상을 바꾸고 오래된 세상의 질서를 뒤엎을 만한 파격 없이는 인류에게 닥친 재앙을 막아낼 재간이 없지 싶다. 


전국의 도로를 절반으로 줄이고, 전기차만 운행허가를 내주면 어떨까? 직원이 걸어서 출근하는 회사에는 놀랄 만한 감세 혜택을 준다면? 공연 전시 문화예술 현장에서 쓰레기를 완전히 없애는 공모사업을 해볼까? 주차장도 없고 마이크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축제를 해보자, 대한민국 전역에서 아파트건축 스톱 선언은? 나무 그루 베기에도 엄격한 허가제를 시행한다면….’ 

걷다 보니쓰잘데기없는 생각과 오지랖도 늘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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