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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 | 칼럼·시평 [문화칼럼]
1973 진흥법에서 벗어나야 지역문화가 생기를 찾는다
김상철(2019-11-15 10:03:59)

최근 문화예술계에 흥미로운 움직임이 보인다. 지난 정부에서의 문화예술인 배제 정책인 블랙리스트에 저항하는 예술인들이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라는 초 장르적 단체를 만들어서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에서부터 주요한 가해자의 면죄부에 대한 비판을 지속하고 있다. 최근 계원예술대 총장으로 임명된 송수근 씨에 대해 별도의 대책기구를 만들어서 블랙리스트를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과정에 연루된 이가 예술대학의 총장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문화도시 추진과 병행하여 이와 같은 정책이 반복적인 하향식 정책으로 머물지 않고 문화예술의 지역성을 회복하고 자율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문화예술활동가-문화기구종사자들의 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이름은 다양한 문제의식을 꿰어 쓸모를 만들겠다는 의미에서 구술담론이라고 한다. 지난 9월 담양에 이어서 최근 대구에서 개최되었고 조만간 춘천에서 같은 이름의 연속 토론회가 개최된다. 지난 대구까지 참여한 문화예술활동가 및 문화기구종사들이 100명을 넘어섰다고 하니 이 역시 특별한 일이다.


앞서 블랙리스트에 대한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이나 구술담론이라는 형태로 지역별 연속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는 흐름이나 공통적으로 대상을 삼는 것은 '문화예술 정책'이라고 부름직한 것이다. 새정부의 문화정책이 문화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가 되고 예술정책이 새예술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나 실제 현장에서 느끼는 변화는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실제 몇몇 사람들의 일탈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라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온다. 지난 담양에서의 토론회에서는 수년 전의 문제의식이 시의성을 잃지 않고 유효하게 받아들여지는 현상을 기이하게 비평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런 현상을 피상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는 혁신의 박리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마치 때밀이를 하듯 논란이 되는 표현이나 몇몇 세부사업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사업의 방식이나 이를 평가하는 성과의 지표들은 변화하지 않아 느끼는 진부함과 같은 감각이다.


이를 조금 분명히 한다면 최근 정책 현장에서 발견되는 협치니 소통이니 하는 말로 회자되는 거버넌스 구조에 대한 문제가 놓여 있다. 협치니 소통이 강조된다는 것은 기존의 거버넌스가 협치와 소통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기존의 거버넌스라 하더라도 협력이나 소통이 없지는 않았다. 아마 지역 문화정책 생태계에서는 더더욱 다소 세력의 교체가 있을지언정 꾸준한 협력적인 장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이제 또 협치니 소통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기존의 것을 강화한다는 문제의식보다는 '기존의 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에 더욱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새삼스럽게 거버넌스가 아니라 여전히 거버넌스라는 반응의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행정에서의 현재 체계는 예술의 산업화와 예술의 성취에 대한 우선적인 지원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한류나 국제화와 관련된 담론과 각종 비엔날레 등과 같은 컨벤션 사업들의 등장은 전자의 경향을 보여준다. 후자의 변화는 공모사업으로 나타났다. 많은 경우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사업은 구체적인 성과중심의 지원 공모구조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예술인들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개선하기보다는 창작지원금이라는 형태의 개인화된 지원구조를 통한 정책으로 강화되었다.


이런 문화정책의 거버넌스 구조는 한국의 문화행정에서는 특히 강력한 경향성을 가진 흐름으로 만들어졌다. 1973년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면서 형성된 1973년 체계는 '제도-재원-운영조직'이라는 일직선의 구조가 핵심이다. 법에서 정한 장르 체계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이런 구조는 이후의 장르별 지원체계라는 형태를 구축한 배경이 된다. 잘 보면 이런 구조가 실제로 지금까지 변화했는가라는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일반화된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지원배제 사건의 핵심은 특정한 정권의 속성과 특정한 인물의 전횡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작동할 수 있는 '구조'에 있는데, 바로 1973년 체제라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문화행정의 거버넌스는 독재정부에서 만들어진 권위주의적 통제수단으로서의 지원구조와 1997년 이후 사실상 시장화된 문화정책의 흐름과 합쳐져서 형성된 한국형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문화기본법 제정 이후 장르별로 분법화된 법률의 등장이나 외려 장르별 지원구조를 답습한 지역문화, 생활문화에 대한 제도화가 진행되었다. 여기에 소위 거버넌스의 전환이 있었을까, 협치였다면 어떤 협치가 있는 것일까? 과연 지역의 문화/예술 현장은 이런 문화행정의 흐름에서 벗어난 대안적인 흐름을 만들고 있는가?


현재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블랙리스트가 작동할 수밖에 없는 개별사업의 공모사업이 축소되거나 변화하기는커녕 예술인에 대한 지원강화하는 명목으로 외려 확대되는 풍경이다. 문화행정의 업무를 위탁 혹은 대행하는 기구로 전락한 문화기구들은 그 성격을 유지한 채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각종 문화재단들이 등장하고 이런 저런 센터들이 전달하지만 이 기구는 정부의 문화정책을 실어나르는 택배회사에 가깝지 문화예술인들의 허브와는 거리가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해 방향성은 옳은 것이 아니냐고, 문제는 그 내용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라는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할 수도 있겠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의 문제 아니냐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까지 지역문화재단의 '자리'를 둘러싼 갈등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이 문제다'라는 것은 문화행정의 정언명제가 된 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얼마나 착각인지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다른 행정영역에서의 거버넌스 변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미 2011년부터 지역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참여예산제가 시행 중이고 주민들이 필요한 사업을 주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참여제도의 실질적인 의미를 찾기 어려운 사례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운영상의 문제를 말하려면 참여예산제 정도의 거버넌스 변화를 전제로 할 때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아예 지역주민들이 동주민센터의 행정업무를 일부 이관받아 운영하는 주민자치회 모델은 시범사업을 거쳐서 최근 지방재정법 개정을 앞두고 있다. 문화행정과 같이 그 대상과 영역이 한정되어 있는 현장에서 그만큼 권한의 배분과 역할의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어쩌면 문화예술인을 자처하는 모두가 거대한 지원사업 구조의 '공모 카르텔'에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진짜 생기가 흐르는 문화현장을 가질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부르는 문화예술 현장이라는 것은 영화 '이끼'에서 나오는 마을을 닮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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