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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 | 칼럼·시평 [문화칼럼]
종로 네거리, 전봉준이 건네는 말
이광재(2018-07-13 11:43:15)

지난 4월 24일 서울의 서린동 옛 전옥서 터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이 세워졌다. 전봉준은 개화파 정부와 일본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동상이 세워진 바로 그곳에서 1895년 3월 29일 교수형되었다. 교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법관에게 전봉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그는 백성들이 바라보는 서울 복판에서 붉은 피를 쏟으며 스러지는 장면을 천하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백성의 장수가 어떻게 스러졌는지를 목격하게 함으로써 역사가 흘러가야 할 방향을 암시하고 싶다는 당부로 읽힌다. 죽음에 임해서까지 그는 자신과 농민들의 패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면을 응시했다.
그런데 역사의 긴 회랑을 통과해 그의 꿈이 우리 앞에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서린동 옛 전옥서 터. 그곳이 바로 전봉준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피를 뿌려달라던 종로 네거리였으니 말이다. 그는 이제 그곳 종로 네거리에서 21세기의 백성을 향해 말을 건넬 것이다. 과연 오늘의 세계를 향해 그는 무슨 말을 건넬 것인가.


사람들은 동학농민혁명을 반봉건 ․ 반외세 투쟁이라는 말로 정리한다. 그런데 혹자들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못 이겨 백성들이 얼떨결에 들고 일어났다가 일이 커져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고 동학농민혁명을 설명한다. 국내에서 출간된 위인전 등에는 하나같이 전봉준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고, 국사교과서의 주요 논조 역시 마찬가지다. 위인전이나 교과서는 새로운 국가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우발적인 민생운동으로 동학농민운동을 바라보고 싶어 한다. 이는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식민사관이나 세계의 변화발전이 일부 엘리트들에 의해 이룩된다는 엘리트주의 영향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한낱 무지렁이들의 충동적인 폭동으로 동학농민혁명을 비하하고, 전봉준과 그 운동의 지도자들을 조병갑의 라이벌 정도로 전락시킨다. 동학농민혁명을 반봉건 반외세 투쟁으로 명명해놓고도 실제로는 그 운동을 갑자기 돌출했다 소멸한 예외적 소란쯤으로 폄하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오늘날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이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널리 통용되고, 갑질이란 말이 사회적 화두로 언급된다. 인간 존엄에 대한 가치가 얼마나 부정되고 훼손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사람들은 근대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오늘날의 국가가 불평등과 서열화의 규격 속에 개인을 어떻게 내던져버리는지 날카롭게 풍자한다. 각종 법규와 장치들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신념을 국가권력과 지식인들은 무차별 유포시킨다. 물질적 가치가 삶을 평가하는 척도가 돼버린 지금 국가는 그러한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럴 때 동학농민혁명을 수행한 농민들이라면 틀림없이 다시금 이 인정머리 없는 국가를 향해 죽창을 들지 않겠는가. 반봉건은 정부의 성격에 따라 폐기되거나 강조되는 슬로건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공동체를 소멸시키고 건강한 노동을 위협할 때 언제든 꺼내들어야 할 장엄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반봉건'은 말 그대로의 '반봉건이'이 아닌 국가권력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개인이 강조되고 탐욕이 부추겨질수록 동학농민혁명의 반봉건 정신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체인 농민군의 지향이 서구적 의미의 근대가 아님을 논파하면서 그 활동을 폄하하려는 논자들이 개중에는 존재한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서구적 근대가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식민지 침략의 주범이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유와 평등이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소중한 가치라고 해도 제국주의로 치달릴 수밖에 없는 서구의 국가모델을 용인하지 않았다 하여 동학농민혁명을 폄훼한다면 우리의 전 역사는 폐기되어 마땅한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서구적 근대를 내부에 잉태하지 못할 전근대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동학농민혁명에서 말하는 반외세는 여타 약소국가의 문화와 역사, 그곳의 삶을 송두리째 쓸어버리려는 제국주의의 탐욕과 야만에 관한 고발이자 서구적 근대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만일 서구적 의미의 근대만이 오로지 유의미하다면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국권을 찬탈한 자들을 우리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야 한다.


얼마 전 한 다큐멘터리는 실리콘벨리의 부자들이 준비하고 있다는 신종 별장을 소개한 바 있다. 풍경 좋은 곳을 배경으로 들어앉은 고급 주택을 연상하기 쉽지만 다큐멘터리에서 소개한 별장은 지하 깊은 곳에 숨겨진 벙커에 불과했다. 부가 특정 소수 집단에 편중되고 그 여파로 장래에 벌어질 대중의 폭동에 대비하여 그들은 지하 깊은 곳에 참호를 파고 식량과 무기를 비축해두고 있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만인을 향한 만인의 약탈과 전쟁이 도래할 것을 알면서도 더불어 살겠다는 생각 대신 그들 기득권 집단은 개인의 안위만을 도모하고 있었다. 미세먼지로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미세먼지를 유발한 주범(자본)들은 다시 공기청정기를 만들어 부를 축적한다. 의학의 발달로 기생충이 박멸되면서 반대급부로 아토피가 발생했다는 가설이 의학계 내에 존재한다. 그 가설이 맞다는 전제 하에 자본은 다시 기생충 역할을 하는 약을 제조해 판매하려고 준비한다. 자본은 4차 산업이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떠든다. 물론 자본에게 4차 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분명하다. 그러나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그건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옥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서구의 근대가 도달한 지점이다. 그런 자본의 탐욕에 맞서 반외세의 기치를 들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주역들을 누가 촌스럽다고 키득거리는가. '반외세'는 인류의 삶이 파탄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자본에 제동을 걸라고 외치는 세계 시민의 외침이 아닐 수 없다.


광화문 네거리의 전봉준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은 명약관화하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허상만 바라보며 오늘도 탐욕의 부피를 키워가는 우리에게 그는 단호한 얼굴로 말한다. 편승하지 말고 의심하라. 부러워하지 말고 비판하라. 근원적으로 사고하고, 대안을 마련하고, 그것을 주장하고, 그 말을 듣지 않으면 단호히 맞서 싸워라. 그리하여 국가권력을 제어하고 자본에 제동을 걸어라. 부릅뜬 눈으로 종로 네거리에서 전봉준은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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