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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 | 칼럼·시평 [문화칼럼]
전라도 새 천년! 어와 둥둥, 업고 놀자!
김화성(2018-02-07 16:13:41)

싸르락! 쌀랑! 쓰르륵∼쓰윽!
싸락눈이 장지문을 암소 잔풀 뜯는 소리로 시부저기 어르는 밤!
내 고향 징게밍게 외얏밋들(김제만경 너른 들판)을 떠올립니다. 가진 것 다 내줘 허허로운 겨울 빈 들판. 떨어진 낟알조차 줍는 새들 없고, 매서운 바람소리만 전봇대의 전선줄로 잉잉 울어댑니다. 하지만 그 들판에 사는 사람들은 온 몸뚱아리로 느낍니다. 그 모진 칼바람 속에도 살갗을 눅여주는 훈훈하면서도 그 묘하게 달큰한, 콩 조각만 하고 담배씨만한 봄기운을 말입니다. 그것은 얼었던 손이 녹을 때의 아랑아랑 간질거림 같기도 하고, 첫 사랑이 일렁일 때의 아련한 풋냄새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얀 솜이불을 목까지 덮어 쓰고 있는 징게들판의 보리싹들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눈밭에 파릇파릇 올라오는 여린 것들, 그 부드럽고 가녀린 것들이 어떻게 꽁꽁 얼어붙은 언 땅을 뚫고 우우우 올라올 수 있을까요. 그 순한 것들이 어떻게 철벽같은 언 땅에 숨구멍을 낼 수 있었을까요.    
들꽃이 아름답다고 집에 옮겨 심으면, 그 꽃은 대부분 시들시들 죽습니다.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던 새를 잡아다가 새장에 넣어도, 미친 듯이 몸부림치다가 죽기 마련입니다. 만주벌판을 뛰어다니던 야생마를 마구간에 붙잡아 놓는다고 그 야생마가 고분고분할 리 만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야생 늑대를 개로 길들이기까지엔 수만 년이 걸렸습니다. 심지어 그런 개들조차 요즘도 자신의 맘에 안 들면 불쑥불쑥 옛날 본능이 나옵니다.
왜 인간은 집으로 돌아갈까요. 왜 추석이나 설날에 저마다 고향을 찾아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될까요. 왜 철새는 해마다 죽음을 무릎 쓰고 수천 수만리를 날아갈까요. 단순히 추위나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일까요? 그래서 큰뒷부리도요새는 알래스카에서 호주까지 무려 1만㎞의 거리를 날아가는 것일까요? 그 과정에서 체내에너지가 모두 바닥이 나고, 뇌를 제외한 모든 기관이 손상되고 몸무게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그렇게까지 꼭 그런 고행을 해야만 할까요? 도대체 꿀벌들은 꿀을 따서 집으로 돌아갈 때, 어떻게 자신의 벌집을 찾아가는 것일까요? 꿀벌에게도 내비게이션이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철새나 인간이나 왜 집으로 돌아가는 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려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부터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고향을 찾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가도 고향은 대답이 없습니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가도 나중엔 결국 '허허쓸쓸'의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돌아올 땐 늘 빈손인 것입니다.
미국의 천재 요절작가 토머스 울프(1900∽1938)가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를 쓴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1980년 이문열이 똑같은 제목으로 소설을 내놓은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울프는 유럽 각국을 떠돌다가 15년 만에 뉴욕에 돌아왔지만, 자신이 찾던 고향은 이미 없었습니다. 그 눈물 없던 어린 시절은 이미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더 이상 시간과 기억의 샹그릴라는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고향에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는 그 도저하고도 쓸쓸한 깨달음! 그 환부 없이 멍멍하게 아픈 상실감! 결국 그는 서른여덟에 폐결핵으로 눈을 감았고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는 그 2년 뒤에 햇빛을 보았습니다.
내 고향 '새만금'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거대한 새'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새(鳥)만금(1987년 11월2일 정부 관계장관회의 결정)'인 것입니다. 이름 한 번 참 잘 지었습니다. 마치 중국대륙을 향해 활짝 나래를 펴고 힘차게 날아가는 독수리 같습니다. 좌우날개가 바로 군산과 부안을 잇는 일직선(33㎞)의 방조제입니다. 그리고 방조제가 140도쯤 꺾이는 중간지점의 신시도(新侍島)가 바로 새의 머리 부분입니다. 새의 꼬리는 제비꼬리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 만경강, 동진강 하구입니다.
어쩌면 옛사람들도 이곳에 '거대한 인공 새'가 뜬다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마침 새의 오른쪽 날개 지점에 '매가 날아간다'는 뜻의 비응도(飛鷹島•현재 군산시 비응도동)가 있습니다. 또한 왼쪽 날개지점엔 신통하게도 '기러기가 날아간다'는 의미의 비안도(飛雁島 현재 군산시 옥도면)가 있습니다.
새는 '보허자(步虛子)'입니다. 허공을 걸어 다니는 생명인 것입니다. 땅 위의 도로에선 앞차가 가지 않으면 뒤차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선 사방 360도 어느 곳이든 훨훨 거침없이 날아갈 수 있습니다. '땅 위의 셈법'이 1등에서 꼴찌까지 줄 세우는 것이라면, '새들의 세상'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분야에서 으뜸이 될 수 있습니다. 나비처럼 나풀나풀 날다가 해찰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누구도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중앙이나 권력의 간섭도 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4차 산업혁명 시대인 것입니다.  
무술년 개띠해가 밝았습니다. 마침 전라도라는 말이 생긴 지 딱 1000년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1018년 고려 현종임금이 全州와 羅州의 첫 자를 따서 全羅道를 만들었습니다. 왜 그 많은 지역 중에 전라도를 맨 처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 이유야 어쨌든 '과거 1000년은 곧 미래 천년의 주춧돌'입니다. 개는 도둑을 보면 짖습니다. 하지만 맨 처음 짖는 개는 도둑을 제대로 보고 짖지만, 나머지 개들은 그저 따라 짖기 바쁩니다. 전북의 새 천년은 맨 처음 도둑을 향해 짖는 '알파 도그'가 되어야 합니다. 허공을 저벅저벅 걸어가는 보허자가 되어야 합니다.  
해는 바다에서 두둥실 매끈하게 솟아오르지 않습니다. 보통 검은 구름밭 아래쪽이 붉게 타오르며 솟습니다. 마치 김제만경들판에서 거대한 짚불이 타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검은 구름짚불을 태우며 솟아오르는 해이지만, 결코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일단 떠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말갛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은 늘 아름답습니다. 살려고 꿈틀거리는 모든 생명은 눈부십니다.
서울에 모처럼 함박눈이 내립니다. 이럴 때마다 늘 내 고향 징게밍게외얏밋들을 떠올립니다. 수억만 마리의 배추흰나비 떼가 그 넓은 빈 들판 공중에서 강강수월래 군무를 추고, 까르르 까르르 깔깔대며, 와르르 이리 몰렸다가 우르르 저리 몰려가는, 그 오일장터의 흥성거림과 두근거림. 어린 것들 잇몸에 우우우 돋아나는 이빨처럼, 겨울 텃밭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마늘 순처럼, 그 벌판의 눈보라 속에서 '새봄이 머지않았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은근하고도 살가운 '따순 기운'. 동지섣달 닭장에서 갓 낳은 달걀을 언 손에 살며시 쥐고 나올 때의 한없이 감사하고 고마운 생명의 더운 입김.
그렇습니다. 난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 가슴 속 장독대엔 언제나 어릴 적 빛살무늬 토기들이 내 누님의 쪽머리처럼 조르라니 놓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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