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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6 | 특집 [특집]
1987년 6월과 1991년 6월
김의수 전북대 교수, 철학(2004-01-29 14:05:14)

지금 벌써 6월을 말하기는 어렵다.
91년 5월에 한 달 앞을 내다보기란 어느 해의 경우보다 어려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엄청난 싸움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에 대한 정확한 예언을 시도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싸움이 이미 결판나고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감지하고 있다.
87년 6월!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오는 승리의 감격이 우리를 감싼다. 한국의 역사상 길이 남을 항쟁을 우리가 직접 감행했고 성공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87년 6월항쟁과 비교될 만한 국면이 다가온다면 그것처럼 반가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지금 그런 국면을 맞고 있다! 강경대열사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죽는 끔찍스런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폭력살인정권을 규탄하는 죽음의 항거가 계속됐고 뒤이어 전국민적 항쟁이 불타오르고 있다.
6월항쟁의 계기는 박종철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박종철열사는 수배를 받고 있는 한 운동권 선배의 소재 파악을 위해 연행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당시에 수배되고 구속당하는 운동가들의 수는 천 단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전두환 일과에 의한 제 2의 쿠데타로 광주민중이 대학살을 당한 이후 민중진영의 항거는 나날이 확대 발전하여 파쇼진영과의 공방을 계속해왔다. 86년 봄 직선제 개헌운동의 열풍이 일어난 후 전두환정권은 강력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9월에는 ꡐ반공이 아니라 통일을 국시로 삼아야 한다ꡑ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했던 국회의원을 구속해 버리고 11월에는 건국대에서의 대학생 연합 농성을 헬기 공격 등의 진압 작전을 펴 전쟁과 같은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며 그 직후부터 운동권에 대한 구속 수배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감행했다. 그러면서 야당 지도자를 포섭하여 내각제 개헌 강행의 시나리오를 완성해 놓고 있었다. 장기집권의 확고한 기반인 내각제 개헌의 집행 1개월을 앞두고 저들은 고문치사 사건을 저지름으러써 스스로 무덤을 팠던 것이다.
노태우정권의 문제점은 6월항쟁의 성과물인 6․29항복선언을 속임수로 위장했고 또한 대통령선거에서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됨으로써 정권의 정통성 마저 획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그 후 7․7선언(1988)을 통해 북방정책을 표방하더니, 89년에는 방북통일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더불어 공안통치로 전환해 버렸다. 그리고는 6․25이래 최대규모의 통일전선체로 출범한 전민련을 와해시키려 했고, 전국 40만 교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결성된 전교조를 파괴하기 위해 무려 1,600여명의 교사들을 해직시켜 버렸다. 이처럼 폭력적인 통치로 일관하다가 90년 벽두에 김영삼으로 하여금 국민을 배신하게 하여 군민 통합 파시즘 집행체로서 민자당을 급조했다. 이번에도 역시 내각제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 획책이 그 목표였다. 민자당은 창당일에 벌써 전 국민으로부터 해체 요구를 받았고, 1년을 넘기는 것조차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민중진영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으니, 90년 1월에 결성된 전노협의 파괴에 총력을 기울이고, 우루과이 협상과 수입개방으로 농촌의 완전 몰락을 유도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전농을 와해시키려 했다. KBS방송 사원들의 투쟁을 물리력으로 제압하여 언론장악의 기반을 마련한 후 국군조직법, 방송관계법 등을 날치기 통과시켜 내각제의 실질적 내용을 확보했고, 국회의원들의 비리를 확대 폭로하여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면서 공안통치를 강화시켰다. 정치적으로 군민통합의 특성을 갖는 민자당은 경제적으로 철저히 독점자본가들 위주의 정책을 펴고 있고, 30년간의 군사파시즘 통치를 가능하게 한 정경유착이 그 극에 달하고 있다. 여기서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대형 비리가 나타나게 마련이 바, 91년에 접어들면서 터진 수서 비리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실 이 사건만으로도 노정권은 위기에 직면한 것이었는데, 뒤이어 터진 페놀사건과 강경 대열사 타살 사건으로 몰락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고 말았다.
강경대열사를 타살한 후 경찰은 쇠파이프의 출처에 대해 대학생들의 시위용품 수거 과정에서 압수한 것을 전경들이 몰래 감춰 두었다가 사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ꡐ탁 치니, 억 하고 쓰러지더라ꡑ던 박종철열사 때의 자세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더구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생명을 바쳐 민족과 역사를 살려내려한 티없이 맑은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불순세력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매도하는 파렴치한 수법마저도 버릴 줄 모른다. 86년 여름 권인숙씨가 성고문 사건을 폭로하자 ꡐ성 마저 혁명의 수단으로 동원하는 지독한 불순세력ꡑ이라고 선전했던 바로 그 수법인 것이다. 이처럼 반성할 줄 모른 채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범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권력이 영구히 존속될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은 이제 곧 스러져 버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91년 5월의 시위 분위기는 87년 6월 같지 않다고 말한다. 시민들의 호응이 그때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잇는 사람들 중에는 보다 급속한 항쟁의 분위기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두가지 문제점을 노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첫째, 87년의 경우 직접적인 계기가 된 박종철열사의 치사 이후 6개월 동안의 준비적 투쟁 기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6․10~6․26이라는 마무리 단계의 항쟁분위기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서 지금의 항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항쟁의 파고를 높이려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지는 않고 과학적 분석을 하는 체 하면서 실제로는 불참의 사유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6․29선언이 전적으로 기만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마자 노태우정권은 저항에 부딪치기 시작했고 그들이 무너지기 위해서는 저항의 축적과 결정적 계기가 필요했다. 이제 그 모든 객관적 필요조건이 채워졌고, 주체적 역량도 6월항쟁때보다 엄청나게 발전돼 있다. 전민련, 전교조, 전노협, 전농, 전대협, 전빈련, 민교협 등의 전국적 조직들이 모두 6월항쟁 이후에 결성되었다. 변혁운동이 체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노선의 차이와 조직운영의 차이로 어느정도의 갈등이 생겼고 아직 굳건한 통일전선의 형성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긴 하지만, 너무도 순수하고 숭고한 희생이 한꺼번에 받쳐진 지금은 주체적 조건의 한계를 곡복할 수 맊에 없는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91년 5월에 벌써 우리는 87년 6월에 사기당한 민주개혁 약속을 그 실천에 대한 보증과 함께 되돌려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최소한의 요구이자 성과이다. 우리의 투쟁은 노태우 정권의 퇴진에 의한 파시즘통치의 종식을 향해 더욱 가열차게 전개될 것이다. 설혹 1991년 6월까지 그것을 완결짓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기는 결코 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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