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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1 | 특집 [특집]
누가 폭력없는 세상을 마다하랴만
위행복·전북대교수(2004-01-27 16:55:16)

지난 10월 23일자 국내 일간지에는 새마을 금고에 침입한 살인강도 사건과 경찰폭력에 의한 피의자 치사사건이 동시에 보도되었다. 엊그제 대통령이 발표한 '범죄세력과의 전쟁선언'과 관련하여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전과 10범에 의한 청원경찰 살해와 누차 문제시 되어온 경찰의 인권유린에 의한 살인을 동시에 보도하는 신문을 대하면서 이 시대의 단면을 보는 듯했다. 새마을 금고에 침입한 강도가 청원경찰을 권총으로 살해했다는 뉴스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공포다. 그러나 경찰에 의한 피의자의 살인에서 느끼는 것은 공포 이전의 뼈저린 절망이다. 수많은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는 국민들은 공권력만을 믿고 살아가는데. 경찰마저 인권을 무시하고 살인을 저지른다니 하늘 아래 믿을 것은 개개인의 물리적 힘밖에 없는 것인가? 집집마다 사람마다 가스총이라도 구입해서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갈수록 포악해지는 각종 폭력앞에 노출되어 있는 국민들에게는 민생치안에 대한 대통령의 결연한 의지가 반가운 것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같이 무기력한 '보통사람들'의 안전을 통치력 차원에서 보장해준다니, 이야말로 가뭄 끝의 단비가 아닌가? 그러나 범죄세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솔직히 말해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전국적으로 보안사의 민간인에 대한 불법사찰을 규탄하는 집회가 있었던 날이었고, 보도에 의하면 대통령은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아왔다는데. 그렇다면 대통령은 조속히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이에 대한 사후조치를 발표하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과 함께. 금년초 3당합당의 발표가 전노협의 출범일에 취해진 '오묘한 이치'가 깨달아지는 듯 했다.
'사회정화'니 '삼청교육대'니 하는 불길한 단어들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면서 이번의 발표에 공권력의 기강이 더욱 해이해지고 가뜩이나 열악한 인권상황이 더욱 악화되지나 않을까를 우려하고 있는 차에 재야인사들에의 출석요구가 부쩍 증가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기우가 현실이었던가? 이번의 발표가 정권안보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음은 대통령의 발언 직후 취해진 정부관련부처들의 후속조치로써 백일하에 드러났다. 임의동행시 피의자에게 동행거부의 자유가 있음을 알려주는 의무규정의 삭제, 임의동행시간의 8배 연장, 화염병 투척자의 총기사용 대상에의 포함 등등은 시국치안 강화의 조치에 다름아닌 것이다. 아울러 공권력의 임무수행이 더욱 자의적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이에 따라 인권이 유린될 확률도 그만큼 높아졌다. 결국 민생치안에의 떠들썩한 요구가 시국치안 강화의 빌미로 이용된 것이며, 인권탄압의 근거를 제공하고만 것이다. 대통령의 발표 이후 연세대에서 있었던 학생집회에서 경찰이 시위학생을 향해 직격탄을 쏘아대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그 부작용은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다.
민생치안에의 요구가 높아진 것은 도덕성의 파탄으로 인해 범죄가 증가하고 난폭하여진 데 그 원인이 있으며 이번의 '전쟁선포'는 이에대한 대책으로써 취해졌다고 들린다. 이번의 발표는 범죄증가와 난폭화의 원인이 공권력과 법이 너무 느슨한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지금의 도덕적 파탄은 이 사회의 소외심화 현상에 그 원인이 있으며, 그 일차적 책임은 당연히 정권에게 있다. 정경유착에 의한 가진자들의 기만과 횡포 때문에 도탄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사회정의를 의심하고 성실한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예정된 결과이다. 최근 29억을 횡령하고 10억이 넘는 액수의 탈세를 저지른 이창석이 보석되어 물의를 빚고 있는데, 전경환씨가 석방된 직후 인질극을 벌인 탈주범들의 절규가 귀에 쟁쟁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법이 공평하지 못하고 사회정의가 상실되었다는 외침이었다. 소외된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가 이해될 것 같다. 극심한 불평등이 엄존하는데, 사회의 모든 제도가 가진자들의 편에만 서있는데, 도덕성 회복만 백날 부르짖어 보아야 공염불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맹자가 이르기를 백성들은 일정한 생활근거가 있어야만 일정한 마음을 갖게 되는데, 만약 백성들이 죄를 저지르게 된 연후에야 그들을 처벌한다면 이는 그물을 치고서 잡아들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책임을 각성하지 못하고 법망만을 더욱 조이겠다는 발상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지난번 한강둑이 터져 많은 이재민들이 발생했을 때'인재(人災)'라는 여론이 높았다. 얼마든지 사전 대비책으로 막을 수 있는 사태였다는 말인데, 만약 그 때 국정담당자가 이번의 수재는 전혀 자신의 책임이 아니며 단지 하늘이 그렇게 만든것이라고 했다면 누가 용납했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이는 스스로가 그 자리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임을 드러낼 뿐이다. 도덕성 파탄과 범죄증가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스스로의 책임을 자각하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수립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국민을 그물로 잡아들이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권의 도덕성회복을 기반으로 소외를 줄이고 나아가 민생을 파탄에서 구제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국민들은 너무 많이 속아왔다. 각종 민주화 약속의 퇴보, 중간평가의 불이행, 야당세력의 집단적 변절과 밀실야합, 야당이 등원하지 않은 국회에서의 쟁점법안 날치기 통과, 방북허가 약속과 배반, 경제 민주화 조치들의 백지화 이후 부동산 투기 세력의 준동과 과잉소비에 의한 국민경제 파탄 등등 우리 국민들이 당해온 기만들과 그로인한 좌절과 분노는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돌이켜보건대 모든 약속들은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당장의 위기를 넘기기 위한 미봉책으로서 남발되었고 국민들은 끊임없이 속아왔다. 약속이 헌신짝처럼 버려지며 물리적 힘과 자본의 횡포만이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국민들의 불만이 더욱 고조될 것이고 공권력은 시국치안에 급급할 수 밖에 없다. 일하지 않는 자들의 투기에 의한 일확천금이 비일비재한 사회에서는 아무리 법망을 조여도 범죄는 줄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범죄의 조직화와 흉폭화만을 재촉할 것이다. 정치인들은 국민으로부터의 신회를 회복하여야 하며, 그가 통치권자 일때는 더욱 그렇다. 지금 시급한 일은 이전에 약속했던 모든 정치적 경제적 민주화 조치들을 즉각 실행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다. 민생의 기반을 되살려서 시국치안에 쓰는 공권력을 민생치안에 돌릴 수 있다면 지금의 공권력도 너무 많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외계층이 스스로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을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되면 이 나라의 범죄는 눈에 띄게 줄어들리라.
공권력의 기강확립과 신뢰회복도 시급한 일이다. 지금까지는 이 나라의 공권력이 국민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는 형태를 보여왔다. 악랄한 고문경찰 이근안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박종철 사건의 연루자들은 풀려났다. '전쟁'이 선포된지 며칠 후의 신문에는 부산에서 우익단체를 결성한 조직폭력배에게 시경국자이 감사패를 수여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지난 선거 당시 그토록 설쳤던 각목부대들. 노동운동 현장의 구사대, '말'지 사무실에 난입한 우익집단, 그들에게 공권력은 어떻게 했던가? 그때마다 공권력이 부족해서 폭력을 막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요즈음 일부 지역에서는 야간 순찰에 군인까지 가세한다고 하는데, 저의가 의심스러운 이러한 정책에 국민은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 제반 악법과 형평을 앓은 법적용이 국민들에게는 굴레로만 느껴지듯이, 근본대책을 외면한 공권력만의 강화는 국민들의 자유를 속박할 뿐이며 위협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마지막으로 '앞길이 구만리 같은'이 땅의 젊은 양심을 파괴하고, 남들의 뒤나 캐면서 살아가는 일부의 사람들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그들이 아무리 부림을 당하는 피동적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일부의 책임을 모면할 수는 없다. 맹자는, 화살 만드는 사람이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덜 인자하겠는가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남이 다치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남이 다칠까를 걱정한다고 했다. 참으로 관대한 말이다. 그런데 반제반봉건의 질곡에서 신음하는 20세기의 중국에 살았던 노신(魯迅)은, 사람을 무는 개가 물에 빠지면 착한 사람은 그놈이 잘못을 반성하여 다시는 사람을 물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커다란 오산이니 반드시 때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처한 시대와 그가 겪은 일들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으리라. 80년 5월에 그토록 처절하게 짓밟혔던 광주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베푸는 위대한 용서를 목격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국민들의 아량만을 보챌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제 양두구육(羊頭狗肉)의 기만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6·29는 한번으로 족하다. 국민은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며, 거듭되는 속임수는 국민의 분노를 가중시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이었던 유왕(幽王)이 계속되는 거짓말로 제후들과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고, 그 결과는 자신의 죽음과 나라의 패망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동안 국민에게 약속했던 사회적 경제적 민주화를 하루 속히 실천하고 민생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만이 이러한 패망의 재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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