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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0 | 특집 [특집]
전북의 실학자4이재 황윤석(Ⅰ)
하우봉·한국사·전북대 교수(2004-01-27 16:39:16)

1. 가계와 수학
18세기 이른바 호남실학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사람이 이재 황윤석(黃胤錫)이다. 그는 영조 5년(1729) 전라북도 흥덕군 일동면 구소동(지금의 고창군 성내면 조동)에서 출생하였다. 자를 영수(永搜), 호를 이재( 齎) 또는 서명산인(西 山人), 운포주인(雲浦主人), 월송외사(越松外史)라고 하였으며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그의 선조가 호남에 내려와 살기는 고조부때부터였다. 그 후대의 선조들이 높은 관직에 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4대에 걸쳐 학식과 덕망이 높이 칭송된 명문이었다. 특히 숙조부인 戟?(호 ; 龜岩)은 농암(農岩) 김창협(金昌協)의 문인 중에서도 석학으로 평가받았던 인물이었으며, 부친인 만재공(晩齎公) 전(廛)도 벼슬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머무렀지만 학덕(學德)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난 이재는 5살때부터 문자를 익혔고 9살에는 문장이 어느정도 성숙하여 고을의 선비를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수선(手選)을 하였다 한다. 10살때부터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세상을 떠나기 이틀전까지 계혹하였다 하는데 이것이 57책에 달하는 『이재난고( 齋亂稿)』이다.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그때 그때마다 의문이 나거나 깨달은 점들을 서술하여 그의 다양한 학문적 관심과 박학성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학술서적이기도 한다.
그는 일찍이부터 관리에 등용되기 위한 과학(科學)을 포기하고 경학(經學)에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당시 성리학의 대가였던 박필주(朴弼周 ; 1665-1748)에게 서장을 내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박필주가 죽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가학(家學)을 잇는 정도에서 벗어나 일정한 사문(師門)을 정하지 못하던 중 28세에 당대의 대 유학자였던 미호(미湖) 김원행(金元行 ; 1702-1772)에게 인사를 드렸다. 31세되던 해 진사시에 합격함과 동시에 경기도 양주군에 살고 있었던 김원행의 문하에 정식으로 입문하였다. 김원행은 기호학파의 정통을 계승하는 도학자였지만 동시에 주기론(主氣論)에 바탕을 두면서 실학자 지햐을 지니고 있었던 유학자였다. 그는 특히 실심(實心)과 실사(實事)를 학문의 요체로 강조하였다 한다.
그가 운영하고 있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에는 김이안(金履安), 홍대용(洪大容), 정철조(鄭喆祚) 등 나중에 실학사상 중요한 인물들이 모여서 고문(古文)운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학풍을 제시하며 영·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학파를 이룩하고 있었다. 미호문하를 들어간 이재는 미호의 학문을 계승하였고, 동문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실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되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이 시기에 이재는 고향의 선운사 도솔암과 백양산 백련암 등에서 주역과 경서를 읽으며 성리학의 연구에 정진하였다. 그의 별호인 서명산인과 운포주인은 이 시기 서해의 물가와 선운사의 포구에서 글을 읽었다 하여 스스로를 칭하였다 한다. 이시기를 이재의 전생애로 볼 때 수학기(修學期) 내지 제1기로 볼 수 있겠다. 학문적인 지향으로 볼 때는 성리학의 연구에 치중하였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명본주의(明本主義)에 입각한 이학(理學)연구는 당시의 일반적인 성리학자들과는 지향점이 달랐다. 그의 스승인 김원행도 그랬거니와 이재는 참된 선비는 널리 배워서 해박한 지식을 이루어야 하고 동시에 이것을 법도있게 행함으로써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관념적인 이론으로서의 이학이 아니라 인간생활의 실사(實事)에서 진리를 구하고자 하였으며(實事求是),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利用厚生) 학문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의 생애의 제1기가 30대 중반까지의 수학기라고 한다면, 제2기는 관계로 나아가 20여년간 관직생활을 한 사환기(仕宦期)라고 한다. 동시에 이 시기는 그의 학문에 있어서는 실학의 난숙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관력을 보면 38세에 은일(隱逸)로 추천을 받아 장릉참봉을 제수받은 뒤 중앙과 지방관을 골고루 역임하였으나 대체로 6품에 해당하는 낮은 직책에 머물렀다. 58세 되던 해 전생서(典牲暑) 주부(注簿)를 거쳐 전의현감(全義縣監)을 마지막으로 관직생활을 그만두었다. 그는 애초에 관직생활에 잘 맞지 않아서 이 기간중 도중에 쉬는 기간도 있었는데 이럴 때는 향리에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였다. 한편 그는 이 기간중 정경순, 김이안, 홍계희, 신경준, 홍대용, 이가환, 서명웅 등 당대 제일류의 유학자 내지 실학자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래서 역상, 천문, 지도, 경제, 사회, 산학, 역사, 성음, 문자, 전고 등에 걸쳐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가 평생 정력을 쏟은 『이수신편(理藪新篇)』도 이 시기의 소산이라고 보여진다.
제3기는 59세 되던 해인 저조 11년 (1787) 정월에 벼슬길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온 이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고향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저술을 정리하다가 63세 되던 해인 1791년 4월 만은재(晩隱齋) 별실에서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치었다.
2. 학문과 사상
이재의 학문은 실로 호한한다. 그것은 그의 방대한 저술에서 바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군자가 되어 한가지 일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君子恥一物不知)'라고 할 정도로 격물치지적인 박학성을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점은 14세 때부터 서술하기 시작한 『이수신편』에 잘 드러나 있다. 성리학을 기초로 하되 박학성을 중요시한 그의 학문의 특징이 나타나있다.
한편 그는 진리에 이르는 방법 중에서 귀납적 방법을 중시하였다. 널리 나타나 있는 현상을 탐구함으로써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가 성리학에서 주기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점과 일맥항통한다. 이러한 학문방법 내지 지향에는 '실사구시 무징불신 (實事求是 無徵不信)'을 모토로 하는 청대 고증학과 서양과학 및 기하학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그는 종래의 유학의 관념적이고 폐쇄직이었던 성리학의 분야에서 훨씬 벗어나 학문의 길을 개방하여 보다 넓은 분야에서 자유롭게 고증과 논평을 붙이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이러한 다양한 학문적 경향은 역시 석실학원에서의 '고학적(古學的)이고 실사구시적인 학풍'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학파 실학의 대가이자 실학파 제일의 과학자로 성장하였던 홍대용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학문적 영향을 주고 받았다. 또 지리학과 음운학의 대가이자 동향의 실학자인 신경준(申景濬), 북학파의 원로이자 백과전서파로 일가를 이룬 서명응(徐命應), 역산학의 대가인 정철조, 고학과 서학연구에 일가를 이루었던 이가환(李家煥) 등과의 교류는 그의 학문의 살을 찌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지향에 입각하여 유교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명적(古今名籍)을 빠짐없이 탐독하였고, 구류백가(九流百家)의 학을 두루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유학의 근본정신을 탐구하고자 하는 '명본주의'내지 '명본원주의(明本源主義)'에 바탕을 두었지만, 시문, 산학, 음운학, 지리, 역상학, 역법,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 문물제도의 탐구, 서양과학의 수용 등 다양한 방면의 연구에 업적을 남기고 있다.
이제 그의 저술을 통해 그의 학문과 사상의 특징을 정리해 보자.
이재의 저술로는 『이재유고( 齋遺稿)』12권,『이재속고( 齋續稿)』14권,『이수신편』23권이 있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수필사본인『이재난고』57책(12,000여 면에 달함)이 있다. 이러한 문집 중에 포함되어 있는 개개의 저술목록은 너무 방대하므로 생략하겠거니와 그 내용은 호환하기 이를데 없으며, 그의 백과전서파로서의 면모가 약여하다 하겠다. 그의 학문의 요체가 집대성되어 있는『이수신편』을 비롯한 이상의 저작 중에서 그의 학문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측면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성리학적인 측면 : 이재는 실학자이지만 기본적으로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사물을 관찰하였다.『이수신편』에서도 이에 관한 저술이 가장 많다. 이 점은 그가 학문의 목적을 명성(明誠)과 박문(博文約禮)에 두고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다른 실학자들과 구분되는 점이며, 필자의 느낌으로는 북학파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 ; 1741-1793)와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②천문·역상학 : 『이수신편』의 <산뢰잡고(山 雜考)>, <상위지요(象緯之要)>와 『이재속고』의 <전한서율력지해(前漢書律曆志解)>, <고금역법고(古今曆法考)>, 『資知錄(자지록』의 <역법연혁(曆法沿革)>등의 논설에 잘 나타나 있듯이 그가 심혈을 기울였으며 많은 업적을 남긴 분야이다.
그는 마테오 리치와 중국인 과학자인 이지조(李之藻)등 서구의 천문학과 역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리고 당시 국내의 역산학의 대가 정철조와 교류하면서 '지원설(地圓說)'을 제창하였고, 일식과 월식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정확한 설명을 하였다.이재라고 하는 자신의 호도 『주역』의 <이괘( 卦)>에서 따왔을 만큼 중요시하였다.
③산학·기하학 : 『이수신편』의 <산학입문(算學入門)>,<산학본원(算學本源)>, 『이재속고』의 <호현약선(弧弦約說)>,<산학답문(算學答問)> 그리고 『자지록』에도 나타나있다. 이재는 마테오 리치의 서양산학과 기하학, 중국산학, 우리나라의 역대산학에 대해 통괄 집대성하였다. 여기에는 삼각형의 면적을 구하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은 기하학적인 산법(句服), 이차연립방정식을 나타낸 산법(方程)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는 또한 순수한 산학(算學)의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양곡과 금전을 계산하는 방법(粟布), 세금을 산정하는 방법(?分), 토목공사에 소요되는 인부와 비용 등의 산출방법(?功), 물자수송에 드는 노역과 비용의 산출방법(均輸) 등 수학적 지식을 실용적으로 응용하여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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