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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5 | 특집 [문화와사람]
<작가를 찾아서>사진작가 채원석 순간을 누르고 영원을 담으며
박병도 ․연극연출가(2003-12-18 12:26:27)

예술의 희극적 아름다음은 탈피(脫皮)의 세계라 했다. 껍질이 깨지는 아픔과 함께 수 없는 자기 변신이 뒤따라야 되고 때로는 생활과 의식주에 대처하여 그 아픔의 질곡을 넘어 서는 탈출도 감행해야 한다. 르네 드루앙이 말한 탈피의 미학은 곧 시대와 상황이 던지는 문제에 해답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이상의 몫을 생활의 영속에 두고도 있음이다.
사진 작가 채원석(蔡元錫)을 찾은 날은 이른 아침·부터 봄비가 촉촉히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막 피어난 개나리의 노오란 꽃망울에 봄비는 태아의 고운 살결을 매만지듯 조심스러웠고, 훤히 뚫린 전 ·군간
신작로변 벚꽃은 마지막 개화의 숨을 고르고 있었다.
빛의 예술이랄 수 있는 사진. -그 빛을 잡아 시간을 매어 놓는 빛의 마술사를 찾는 날에 하늘은 흐려서 찾는 이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했지만, 또 그것은 초석 펴고 자리 건네 주는 주인의 겸양이라 생각되어 사진에 문외한인 필자를 맞아 마법의 향로를 치워 놓고 허심탄회한 마음을 나누자는 자상한 배려를 하늘도 헤아리는 듯 싶었다.
구세군 아동 복지 회관을 끼고 도는 골목앞에서 선생은 반갑게 맞아 주셨고 긴 세월의 편린을 쉴새 없이 잡아 매신 손끝의 정감은 곱게 늙으신 할아버지의 따스한 마음으로 저려왔다.
사진의 현장성을 강조하는 선생의 작품세계는 다큐멘타리 작품영역에 늘 거주하였고 순간을 붙드는 거친 호홉으로 일생을 스쳐 지나 왔다는 것. -순간을 잡기위해 아니 살아 움직이는 삶의 현장을 붙들기 위해 그 손끝은 분주했고 그 지나친 세월이 또 순간 같아서 나이 보다 더 젊어 보이는지도 모른다. 망각의 효능이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든 기억의 범주는 삶이나 세월을 다 묶어 놓을 수 없을 것
이나 아스라한 지난날들을 그리도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 맑은 정신은 어쩌면 붙들수 있는 것은 다 불잡아 놓고자 한 연민이 아닌가 싶다.
옥구 성산에서 태어나 세살때 서울로 이주하여 l ·4 후퇴때 다시 예산 수덕사 옆까지 내려왔다가 군산에 다시 자리 한 것은 1953년이었다. 어려서 부터 그림(도화)을 무척 좋아 했던 선생은 틈만나면

책갈피며 공책 둥에 연필을 댔던 기억도 너무 디테일하고, 또 세월과 함께 그 시간의 늪을 지나쳐 간 많은 벗들의 이름이며 생김새까지 소상히 나열하며 그들과의 한 5순간의 일들까지 그 상황을 철저히 기술하는 놀라운 기억력도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시간을 충실히 바라 본 여지가 아닌 듯 싶다.
서울로 이사하여 지금의 홍대 밑 와우산에 자리 한 경성사립의법을 다녔고 그때부터 미술적 재질을 보여 학급의 환경 미화엔 늘 앞장섰다. 그때만 해도 환경 미화는 그림이 대부분인데 절반 이상이 선생의 그림이었다. 선생의 탁월한 기억력으로 말하자면 당시 YMCA 활동을 하셨던 담임의 친구이신 김상덕씨의 동생 김경덕씨가 같은 반에 있었고 그 역시 단짝이 되어 그림 그리기에 쌍벽( ? )을 이루고 었었단다. 조선산수가를 13절 까지 다 외우는 기억력으로도 능히 헤아릴 이름들임엔 분명하고, 또 다 취하지 못하고 지나친 시간일망정 다 소중한 모습들로 선생의 가슴에 현상된 것 일게다.
당시 리노륨(지금의 모노륨 같은 재질) 등에·그림을 조각하여 판화 형태의 작업에 까지 손을 미쳤으니 무엇이든 손을 대면 깊이 파고드는 열정이 손끝마다 배어 있고 또 그로하여 지급의 한 평생이 된 사진의 길로 접어든 결정을 그 정열의 가슴이 내려주기도 하였다.
조회 시간을 때먹으면서 까지 울밑에 쪼그리고 앉아 판화를 조각하고 친구들에게 나눠줬으니 그때 부터 주위의 여린 관객에게 나마 작은 전시를 베푼 셈이 된다. 한번은 교감 선생님에게 들켜 졸인 마음으로 사무실(지금의 교무실)로 불려갔는데 예상외로 상까지 내리면서 ‘앞으로 훌륭한 미술가가 되라’는 말씀을 주셨으니 일생 처음의 상과 격려가 아닐 수 없었으며 어린 마음에도 일생을 결정지을 굳은 자
부의 싹을 키운 동기가 되고도 남는다.
사진을 하게 된 동기률 털어놓기까지 선생의 주름진 눈가에는 차마 떨치고 갈 수 없는 추억의 편린들이 참으로 많이도 아른거린다. 어린 시절의 미술 행적이 귀한 발판이 되어준 까닭을 모를리 없기 때문이다. 당시 여의도 비행장 주변에서 모의비행기를 손수 만들어 날리던 추억도 생생하고, 판화를 찍던 추억은 지금도 한번쯤 하시고 싶은게 있다면 판화를 하고 싶달 정도로는 추억의 유산을 소중히도 갖고 계신다.
선생이 13세때 사진은 인연으로서 곁에 와 닿았다. 당시 문방구에서는 일본 배우들의 사진을 팔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사진들에 눈이 닿았고 어떻게 하면 저런 그림들이 찍혀 나올까 궁금도 했을 재주꾼의
기질이 발동했을 법하다. 그래서 어렵게 31전을 주고 프로마이드형 사진기와 종판(필름)을 구입하고 지금은 수색에서 목사일을 보는 이문성이라는 친구를 모델로 일생 처음의 사진을 찍었다. 촬영에서 현상인화까지를 손수 불잡고 수없는 실패들의 연속이었던 새로운 경험-그 경험은 미술적 재능과 그 칭찬의 두툼한 자만을 깔아뭉게는 실패의 연속이었기에, 어떤 일이고 해내고야 마는 집념의 성격은 그 실패 자
체에 하나의 매력을 심기에 충분한 것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첫 인물사진이 착화 되던 날 성취의 만족은 보람이라는 풍선을 타고도 남았으며, 그 어줍잖은 사진 이나마 동경의 아트사진공업사 내의 실버 카메라 회가 주관하는 공모전에 출품하였고 그것이 입선의 통지가 되어 되돌아 왔을때,
이것이야말로 한번 해봄직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한다. 환타지를 동반하는 작업이 새로운 꿈에의 접근을 유도한다 했다. 메카니즘의 테크닉을 요하는 사진술이야말로 선생의 예술적 재능을 파고드는 충분한 삶의 환타지일 수 있었다. 필자가 생각키에 사진작가의 눈에 포착된 형상이 손끝에 담겨져 인화되어 나오는 순간까지는 곧 ‘기다림’이 아닌가 싶고 그 기다림은 고운 싹을 틔우는 정성으로 승화되어져야만 부화되지 않을까 그렇다. 선생은 선생의 그 검은 안경 너머로 바라본 순간의 이미지들이 영원의 영속가치로 승화되는 기다림의 연속을 헤아렸는지도 모른다.
계속되는 기계적 장치와의 사용으로 이 예술의 특성이 요구하는 기술적 만남을 경험하였고, 예술의 순수는 기계를 터부하는 배타적 사고에서는 안일한 포용일 수 밖에 없다는 견지를 구축하게 됐다.
13세 때의 인연이 17세 때 공업학교 진학으로 구체적 기술로 접근케 되었고, 새로운 상상력은 슬라이드 겸용 밀착기를 제작하는대 성공하게 된다. 19세때 안양에 있는 조선 비행기 공업 주식회사에 첫 직장을 얻어 들어 갔고 첫 봉급을 털어 올림픽 카메라를 구입한 것이 일생에 있어 사진기 다운 사진기를 처음 수중에 넣은 것이 되었다. 23살때는 확대기를 직접 만들었다고 본격적이고도 실질적인 사진 작업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요즈음 고급 카메라 한대만 구입하면 최다 작가가 된양 착각하는 현실을 두고 마음 아파하는 선생은, 작가적 작업 방법론을 나름대로 세우시는데 흰 머리칼 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의 늪을 건너야만 했다. 종판 한 장 구하기 힘들었던 시대적 경제적 질곡들을 무너뜨리신 편린들이 소중한 의미로 가슴에 앙금져 있기 때문이며, 또 그로하여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바라보는 마음에 진한 삶의 애정이 가지 않는 한 셔터를 누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빵을 위해 작품을 내놓진 않는다는 선생의 굳은 뜻은 필름 한 컷 작품 한 점이 다 소중한 자식들 같아서 그윽한 눈빛으로서 삶의 회비나마 염화미소로 얘기할 줄 아는 이에게는 선뜻 작품을 쥐어 주곤 했는데 그 속깊은 뜻을 아는 이가 많을까 생각도 되어진다.
26세때 해방을 맞고 화신백화점이나 미스꼬시백화점의 갤러리에 전시되는 많은 작품들을 구경하면서 작가에의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하고자 하는 마음에 부합되지 못하는 여건은 늘 지도에의 갈중을 느꼈고, 그런 아픔들은 ‘오동나무 심어 봉황을 기다리는’ 지혜로까지 발전하여, 후에 막막한 생활을 위해서지만 스튜디오를 만들고 후배양성에 전력하게 된다. 쓸만한인물-사물을 바라보는 마음과 순간을 포착하는 눈 그리고 상황을 옳게 해석하는 의식들이 무르익고 성숙된 작가
-을 찾던 기약없는 세월도 갖고 있다.

45년 창립된 조선사진예술연구회 주최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이 무려 다섯점이나 입선되는 사진인생에의 격려는 큰 심적활성을 겪게 된다. 이 조선사진예술연구회는 5·16 이후 사진작가협회로 통합되었다. 서해의 조그만 항구도시에서 한 평생을외곬 사진예술가로 지탱해 온 삶의 양식엔 남 봐라 할만한 것은 없어도, 자신에게 늘 충실한 채찍이 보이지 않은 스승이 되어 또다른 세계에 분신을 심고자 하는 고독의 몸부림을 엮어냈다고 볼 수도 있다.
기계적 장치로 이미지를 포착하고 화학 물질을 동반하여 주제를 현상하는 독자적 예술 특성을 두고 비순수 운운하는 부류가 었다면, 어째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억지가 아니겠냐며 화률 벌컥 내는 소중한 애정과 긍지 또한 갖고 계신다.
평생 선생의 분신 처럼 늘 손에 불어 다니는 카메라률 두고 어찌 선생과 카메라롤 떼어 놓고 얘기할 수 있으며, 또 그런 모습은 선생이 가는 곳마다 언제나 그림을 담을 수 있는 또다른 선생의 눈이 따라다 님으로 해서 지극히 현장성을 강조하는 작품을 연맥하는가 보다. 현실에 있어서 보기에만 좋을 Salmism작품 경향을 두고 조금은 걱정을 하시면서 당분간 이 주류가 계속될 전망이라며 이는 사실을 담는 사진의 일차적 효능을 망각할 우려도 낳고있다며 흐름에 대한 제언을 조심스레 꺼낸다. 사진을 시작하는 후배들에게는 영원히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붙잡고 늘어지는 끊임없는 활동성을 강조하며 그로하여 깊이 있는 세계에의 접근도 이룩될 것이라는 도움 말씀도 덧 불였다. 또 강태공들도 처음에는 민물에서 붕어를 낚다가 차츰 잉어며 바다 낚시 등 넓히다 말년에는 결국 붕어를 건지는것이 아니냐며 사진도 인물부터 시작하여 배경을 찍고 나아가 액티브한 기록등을 담아내다가도 결국은 인생이며 삶을 표정 짙고 있는 인물을 찍게 된다며, ‘사람을 찍다보면 배정이 보인다’는 말씀을 나즈막히 되뇌인다. 시어(詩語)가 현상의 이미지를 농축하는 값어치로서 남아 있어야 하듯이 한 장의 사진에도 많은 언어가 내재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선생의 작품속에 늘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들은 그들의 형태가 말해 주는 이미지룰 작가적 언어로 표현하는 어려움으로 담겨져 있다. 그러다 보면 차마 다못한 얘기들을 엮어 시리즈도 나오는 것이고 연결되는 이미지의 형상화도 구축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다.
삶의 현장을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일차적 접근의 발판이 될 수는 있을 지언정 그 객관의 날카로운 지적에 끈끈한 애정의 땀이 스미지 않는 한 항구적인 기록성으로 남겨지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순간의 포착이 영원으로 이어지는데는 참으로 귀한 작가의식이 앞장서야 한다는 듯
그림은 어떤 현상을 캔버스 내에 이끌어 넣는다고 할 수 있지만 사진은 어떤 현상에 접근하여 필요한 부분만을 끌어 담는 다는데에 차이점을 두고, 첨예한 감각과 바른 시각으로 사실과 현상에 접근하여 그 이 미지를 뽑아내는 테크닉에 도전해야 한다.
고회를 눈앞에 둔 원로 작가의 삶에 배어 온 수많은 경험과 지혜는 생활에 밑바탕을 둔 진한삶의 철학적 사고와 작업의 기능을 동시에 부합시켜 놓고 있다.
자신의 작업을 이해 하고파 뛰어든 길이 이젠 어엿한 작가가 되어 그 활동의 동반으로서도 한 몫 충실한 부인도 있고 보면 선생의 외로운 한 평생 한 길 작업도 충분한 만족의 결과로 이어진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렌즈를 통해 본 일생의 삶이 조목조목 애뜻한 연민으로 확대되어 자리잡힐 이편의 생에서, 오늘도 대학 강의률 서두르시며 나무 대문을 밀고 나서는 선생의 한 손에는 또 다른 삶의 저편을 담아오실 사진기가 어김없이 들려 있고, 후척 후적 걷는 걸음에 골목의 찬바람은 성큼 다가와 곱게 늙으신 선생의 뒷모습을 분주히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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