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극회 62주년
길고 긴 꿈의 역사가 생생히 깨어있기를
극작가 곽병창 인터뷰
글 최기우 극작가·최명희문학관 관장
“조금 들뜬 기분이랄까요? 놀랍고 벅차면서도 1961년 박동화 선생님이 전주에서 첫 무대를 올리며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라고 세상에 질문을 던진 그 순간부터 묵묵히 제 몫을 해준 선·후배들의 노고와 꿈이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극단의 절절하고 절박한 역사를 지켜온 모든 분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60주년 기념 공연에 담긴 의미
2021년 창단 60주년을 맞은 극단 <창작극회>가 1년의 준비 끝에 2022년 12월 16일~18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기념 공연 ‘꿈속에서 꿈을 꾸다’(연출 류경호)를 올렸다. 80년대 중반부터 창작극회·창작소극장 대표와 여러 작품의 배우·연출가·작가로 이름을 올리며 60년 역사의 한복판에 있는 곽병창은 이 공연에서 ‘극작’을 맡았다. 창작극회의 부침과 뚝심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가 이번 공연의 얼개를 짜고, 관객의 마음이 동할 언어를 조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북대학교 1학년 때 들어간 연극동아리 <기린극회>가 창작극회의 또 다른 뿌리죠. 그러니 얼추 45년 가까운 세월을 창작극회와 함께해온 셈입니다.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긴 역사를 지닌 극단의 한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게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연출, 공연기획, 관립단체 실무자, 문화시설 대표, 축제 감독 등으로 종횡무진 살아 온 전방위 현장 예술인’으로 표현될 만큼 다양한 활동을 펼치면서도 이미 오래전 대한민국 연극판에 ‘극작가 곽병창’을 또렷하게 알렸다. 1993년 창작극회 배우들과 함께한 「꼭두, 꼭두!」 때문이다. 그가 극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북해도 탄광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참혹한 삶을 꼭두각시놀음·재담·마임 등 전통연희와 접합시킨 실험적인 작품으로, 그해 전국연극제에서 최우수상과 연출상을 받았다.
“‘작가’로 관객을 만난 첫 작품이기도 하지만, 전통연희의 수용과 재창조, 그리고 역사의 갈피에 휘말려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충실히 전하고자 노력했던 작품입니다. 이것이 제가 지금껏 품고 있는 화두이기도 하고요.”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무참하고 비극적으로 맴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 과거와 현재를 적절하게 섞으면서도 역사의 현장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인물이 안고 있는 그늘에 중심을 둔다. 전봉준 장군의 순국 120주년을 추념하기 위해 제작한 「녹두새, 훨훨 날다」(2015)와 전북도립국악원 30주년 기념 공연인 「이성계 해를 쏘다」(2016)도 그랬다.
또한, 극적인 상황과 다양한 실험이 공존하는 작품을 쫓았다. 전통 연희 양식을 지키면서도 그 속에 서구 연극의 다양한 유산을 결합하는 등 새로운 연희 형식을 창조하는 실험을 거듭해 왔다. 전주문화재단의 한옥상설공연으로 인기를 끌었던 「아나 옜다 배 갈라라」(2014), 「해같은 마패를 달같이 들어메고」(2015), 「천하맹인이 눈을 뜬다」(2017)가 한 예다. 관객과 더불어 생각하며 놀기, 곽병창만의 극형식이다. 「꿈속에서 꿈을 꾸다」의 내용과 형식도 그 연장선에 있다.
“창작극회는 민족의 비극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역사에서 개인들이 감당해야 했던 처절한 삶을 충실하게 기록해왔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육십 년의 굽이굽이마다 창작극회가 함께 꿈을 꾸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곳에 모은 것입니다. 함께 꾸어온 이 길고 긴 꿈의 역사가 더 생생히 깨어있기를 소망합니다.”
창단 60주년 기념 공연을 기획하면서 창작극회의 대표작품인 박동화의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1961), 곽병창의 「꼭두, 꼭두!」(1993), 최기우의 「상봉」(2003), 송지희의 「아 부 조부」(2019)를 떠올리고, 이 작품들을 한데 엮은 것은 이 때문이다.
곽병창의 희곡사는 창작극회의 공연사
곽병창의 작품은 전북도립국악원·남원시립국악원·까치동 등과 함께한 예닐곱 작품을 빼곤 대부분 창작극회와 인연을 맺었다. 따라서 곽병창의 희곡사는 창작극회의 공연사이며, 곽병창의 희곡 경향은 창작극회 공연의 경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작품들은 세 권의 희곡집에 담겼다.
2007년에 낸 첫 희곡집 『강 건너 안개 숲』(연극과인간)에는 「꼭두, 꼭두!」(1993), 「꽃신」(1995), 「강 건너, 안개, 숲」(2000), 「하늘 잡고 별 따세」(2001), 「막득이 실연 전말기」(2006), 「소리꾼 청향, 돌아오다」(2006), 「환생녹두」(2007) 7편이 실렸다. 특히, 「막득이 실연 전말기」는 판소리·춤·노래가 어우러지는 마당극으로, 평범한 농촌총각의 인생에 끼어드는 비정한 인간들의 행태를 통해 세상을 고발한다. 지방문예회관 우수공연프로그램에 선정됐으며,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도 호평 받았다.
6년 뒤에 낸 『필례 미친 꽃』(연극과인간·2013)에는 「각시, 마고」(2010), 「좌도 저승, 우도 저승」(2010), 「춘향은 울지 않는다」(2009), 「필례, 미친 꽃」(2009), 「아리랑은 흐른다」(2011), 「꿈꾸는 슈퍼맨」(2008) 여섯 편이 실렸다. 이중 극단 까치동과 함께한 「각시, 마고」는 세계 여러 나라의 핍박받는 여성이 우리나라 설화에 등장하는 거대여신 ‘마고’을 만나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2011년 영국 에딘버러 프린지페스티벌에 참가해 브로드웨이 베이비에서 별 5개를 받았다.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된 『억울한 남자』(연극과인간·2018)는 「억울한 남자」(2015), 「귀신보다 무서운」(2016), 「빨간 피터, 키스를 갈망하다」(2013), 「대필병사 김막득」, 「천사는 바이러스」(2014) 다섯 편을 담았다. 「억울한 남자」는 가진 자, 혹은 전문인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약자를 짓밟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갑을 향한 을의 저항을 보여준다. 2018년 전북작가회의는 이 작품에 ‘작가의눈 작품상’을 선사했다.
가볍지 않으면서 재미있는 작품을 쓰는 일
극작가 곽병창은 많은 작품을 썼고, 쉼 없이 관객과 독자를 만났다. 하지만, 그의 욕심은 작가보다 연출에 조금 더 있다. 최근 십여 년 동안 연출을 못 한 아쉬움이 큰데다 작가보다 센 ‘연출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그 힘에 작품을 쓴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무대도 이따금 경험했던 탓이다.
“연출과 작품 해석이 다를 경우에는 아쉽죠. 때론, 절망적일 때도 있어요. 결국, 현장에서 관객을 만나는 일의 마지막 책임자는 연출입니다. 극본 쓰는 일의 최종 과정도 연출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죠. 그렇다고 극작가 노릇을 소홀히 하고 싶지는 않아요. 좀 길게는 현대사 속의 유랑과 이산을 다룬 큰 작품을 구상 중입니다.”
그는 지금 1920년대 연극운동가 조명희(1894∼1938)의 삶을 무대화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직장(우석대 문창과 교수)이 있는 충북 진천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극작가·시인·소설가·독립운동가 등 자신처럼 다양한 이력을 지녔기에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그는 앞으로 작품 쓰는 일에 공을 더 들여야겠다고 말끝에 힘을 준다.
“후배 작가들을 보면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재미있되 가볍지 않게, 진지하되 무겁지 않게 써내는 후배들을 보면 놀랍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지요. 후배들의 작품을 많이 읽고, 죽비처럼 여겨야겠다, 하고 생각하지요.”
창작극회 60년과 전북연극 120년의 역사에서 창작극의 경향을 앞서 세우고 있는 극작가 곽병창. 무대의 영역을 넓히며 디뎌온 길의 흔적만큼 이 땅 연극판의 한 중심에서 디뎌갈 길도 단단해 보인다. 창작의 병창, 창창한 병창.
최기우 관장은
2000년 단편소설 ‘재즈바에서 거울을 보다’로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귀싸대기를 쳐라’로 극작가의 무대로 뛰어오르게 되며 연극·창극·뮤지컬·창작판소리 100여편을 올렸다. 전국연극제 희곡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