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의 사별
1982년, 한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마지막 주에 기다리던 남편이 한국으로 왔다. 내가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혼비백산했던 일이 생겼던 이틀 뒤였다. 어머니 때문에 한동안 침울해하고 있던 우리는 처갓집에 처음 오는 남편의 방문으로 모두가 흥분하여 들뜬 분위기 속에서 그를 맞아들였다. 현이와 미자는 오래 보지 못한 아빠 품에 안겨 재롱을 떨었고 어머니는 처음 만난 사위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나에게 넌지시 ‘네 남편하고 말이 안 통해서 어쩌냐, 한국 음식은 잘 먹느냐’고 물으며 사위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내가 ‘그는 한국말은 못 하지만 음식은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자 어머니는 살짝 웃으며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언뜻 옛날 건강했을 때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은 나한테서 배운 한국말 몇 마디를 가지고 어머니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조카 부부는 고모부를 환영하는 뜻에서 큰절을 한 뒤 조촐히 차 대접을 했다. 외국어를 모르는 조카는 차를 마시는 동안에 내 통역을 거쳐 어머니의 질병과 처방 문제에 대해 여러 질문을 했다. 남편 대답은 그러나 의외로 간단했다.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알츠하이머병에 대해서 특별한 치료 방법이 별로 없다. 그건 스위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머니는 중증환자로서 지금까지의 상태로 봐서 오래 못 사실 것 같으니 서서히 마음 준비를 하라’며 그 기회에 조카 부부에게 그들의 수고에 우리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를 직접 알렸다. 한국에서 3주 동안 머물면서 남편은 낯선 생활 관습에 적응하느라 알게 모르게 애를 썼다. 예를 들어, 항상 침대에서만 자다가 처음으로 요 위에서 자려니까 허리가 아파서 처음 며칠은 아주 힘들어했다. 그리고 앉아서 식사를 해본 경험이 없었던 지라 그에 적응하려고 나름 노력을 했지만 무릎이 너무 아파서 이틀도 못 가서 쑥스러워하면서도 두 다리를 뻗고 식사를 했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말이 통하지 않아 처갓집 가족과 자유롭게 말을 나누지 못한 점이었는데 남편은 그걸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한국음식은 그의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그는 스위스에서 맛보지 못했던 전통 음식들의 독특한 맛과 다양함을 현지에서 실지로 경험하면서 사뭇 흡족해했다. 한국 음악과 미술에 대해서도 사실 관심이 갔지만 그것은 뒷날로 미루기로 하고 출국하기까지 어머니 위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았다. 주로 걷기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하여 우리는 아파트 주로 근처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애들과 나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서울 시내의 동물원과 궁전들을 찾아다녔는데 스위스에 없어서 그랬는지 애들은 지하철 타는 걸 재밌어했다.
우리의 출국은 9월 중순으로 잡혀 있었다. 우리는 시간에 쫓기면서도 진즉부터 약속이 돼 있던 친구를 만나러 9월 초순에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로 갔다. 친구는 전남 출신으로 70년대 말경에 바젤대학에서 철학, 독문학, 미학을 전공하면서 우리와 가까워졌다. 그런데 유학하기 전에 광주 조선대학에서 강사로 있으면서 아주 친했던 선배와 동료가 1980년 광주 사건으로 총에 맞아 죽게 되자 충격에 빠져 조금 남은 박사과정을 팽개치고 바로 귀국했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대구 어느 대학의 강사로 있었다. 하루 동안 우리는 대구에서 음식점과 찻집을 바꿔가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눴는데 사이사이로 친구를 통해 전두환 정권의 끔찍한 횡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다음 날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남편이 ‘언제 바젤에 와서 박사과정을 마칠 생각이냐’고 묻자 그는 아직도 5.18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좋은 친구들이 억울하게 죽는 세상에서 박사가 돼서 뭘 하겠느냐‘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는데 나중에 그는 몇 권의 책을 발간했다. 그가 우리게 선물한 “서양근세철학”은 그중의 하나로 내가 한겨레 신문을 일찍이 읽을 수 있도록 해준 사람도 그였다.
출국을 하루 앞두고 나는 어머니를 다시 못 만날 것 같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9월 15일 오후 공항으로 갈 시간이 되어 나는 어머니에게 “우리 갈게요” 하면서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어디로 또 가냐”며 절망한 듯 문 앞에 주저앉아 몸을 바르르 떨었는데 그게 내 눈에 비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두 달 지나서 조카한테서 전화가 왔다. 과천이 너무 위험스러워 할 수 없이 할머니를 용담으로 다시 보냈다는 것과 할머니는 용담에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잃어버릴 염려가 없어서 그렇게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는 ‘약속을 못 지켜 죄송하다’고 울면서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가 용담으로 돌아간 뒤로 연락할 방법이 없어 내가 애를 태우던 중에 조카로부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다. 전화가 아니라 편지였는데 이미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 받은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집에 온 지 3개월 뒤에 여든 살의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조카는 ‘내가 경제적으로나 어린 애들 학교 문제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할 것 같아서 늦게 알린다’고 썼는데 조카가 나를 위해 그랬겠지 싶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내 어머니 이옥례는 1902년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에서 증간층의 농부 가족에서 태어났으며 형제는 남동생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19살에 송씨 집안으로 시집갔는데 결혼 뒤 직업이 행상인 남편과 용담에 정착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3년 뒤 남편이 교통사고로 타계함으로 22살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용담 시장 옆에 비단 무명 마포 등을 파는 자그만 송방집을 열고 두 아들을 혼자 키웠다. 그러다가 1940년에 용담에서 가까운 월계리에 사는 양반 가족의 장남 임병귀의 둘째 부인으로 결혼하고 일 년 후에 딸 나를 낳았다. 그러나 둘째 남편과 뜻이 맞지 않아 3년 후에 헤어지고 송방을 계속하다 나중에는 둘째 아들집에서 가사일을 도우며 나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모든 사랑을 나에게 쏟으며 가난 속에서도 내 학교 교육을 위해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단 하나뿐인 딸인 나는 24살에 한국을 떠나 어머니를 한번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어머니에 대한 미련이 이 글을 쓴다고 없어지지 않겠지만 4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이 글을 바침으로 내 가슴 속에 쌓여있는 사랑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