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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2 | 특집 [특집]
갑오농민전쟁의 주도세력
문화저널(2004-01-29 17:02:17)


1. 서언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이 봉건사회를 마무리짓고 근대사회로 넘어가도록 재촉한 결정적인 사건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농민전쟁으로 100주년을 3년여 정도 남겨 놓고 있는 요즈음, 오늘날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문제와 맞물려 농민전쟁은,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에 따라 농민전쟁에 대해 다방면에 걸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농민전쟁을 배태시킨 당시대가 안고있던 복합적 시대상황, 사료의 한계 등으로 인해 농민전쟁에 대한 많은 부분의 연구가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정리하여 예를들면 농민전쟁과 동학과의 관련문제(명칭문제 포함), 농민군의 주도세력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농민군의 주도세력 문제는 농민전쟁의 배경, 지향 등 농민전쟁의 성격을 규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 생각된다.
이에 본 글에서는 농민군의 주도세력에 대한 기존 연구성과를 정리하고, ‘농민군 참여세력’과 관련된 당시대인들의 시각을 살펴보며, 나아가 농민군에 참여한 ‘유생(儒生)’의 농민군 활동을 통하여 농민군 주도세력을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2. 농민전쟁 주도세력에 대한 제설(諸說)
농민전쟁의 주도세력에 대한 기존 연구자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잔반(殘班)주도설이다(김상기, 한우근). 이 입장에 따르면 농민전쟁은 “이미 양반으로서의 지체와 체모를 갖출 수 없이 된 지 오래였을 뿐만 아니라, 처지가 평민(농민)의 그것과 다름이 없이 된” 잔반계층의 동학접주에 의해 주도되었다. 지배신분층에서 탈락한 잔반들이 그들과 처지가 비슷한 일반농민과 이해를 같이하여 농민전쟁을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부농(富農)주도설<미촌수수(楣村秀樹), 마연정리(馬煙貞利).>이에 의하면 농민전쟁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성정하고 있었던 부르조아적 성격을 지니는 부농층에 의해 이끌어졌다.
셋째 빈농(貧農)주도설이다.(조경달, 신용하, 고석규). 이를 다시 세부적으로 보면 ‘부농’의 관계를 상정하는 입장에 따라 세 관점으로 분류된다. ①부농들이 당시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규정아래, 빈농이 농민전쟁을 주도하였다는 관점(신용하) ② 부농층은 그들이 지닌 불철저성과 타협성으로 농민군에게 탈락하고 결국 반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빈농 하층민이 농민전쟁을 주도했다는 관점 ③ 부농층은 이미 농민전쟁 전단계에 민란을 주도했으며, 농민전쟁 단계에서는 주도세력에서 탈락했다. 1세기(19세기)에 걸친 다양한 계층에 의한 투쟁을 토양으로, 마침내 농민전쟁기에는 소빈민층이 변혁의 주체가 되었다는 관점(고석규)이 그것이다.
넷째 양반(토호)주도설이다(신영우). 여기에서는 “영남 북서부 지방(예천, 상주 등)에서 활동한 농민군 지도자 21명 중 7명이 상급양반, 10명이 상급양반 이외의 양반”이었다는 사례연구를 근거로, 농민군의 주도세력이 잔반, 평민이라는 견해를 비판하였다.
다섯째 “혁명적 농촌지식인의 이념적, 사상적 지도 아래 농민층이 주도했다”는 설이다(이윤갑). 이에 의하면 농민전쟁이 근대변혁을 위한 공세적 전쟁으로 발전해간 것은 농민층이 혁명적 농촌지식인과 결합함으로써이다.
이처럼 갑오농민전쟁의 주도세력에 대한 기존 연구는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농민군 내부세력의 구성, 즉 농민군 참여층 개개세력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도세력을 일원적으로 단정지으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3. 농민군 참여세력에 대한 당시의 시각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농민군 주도세력의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농민군 참여세력의 내용을 다루어야할 필요가 있다. 이는 농민군 참여세력에 대한 당시대인들의 시각을 통해, 농민군의 주도세력을 일원적으로 단정지을 수 없음을 시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기사를 시기순으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보은취회시기-어윤중:재기(才氣)를 갖추고도 뜻을 얻지 못해 불평불만에 차있는 자, 탐묵(貪墨)이 횡행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자, 외국오랑캐가 우리의 이원(利源)을 빼앗는 것을 분통하게 여겨 함부로 큰소리하는 자, 탐사(探査)&#8228;묵리(墨吏)의 침학을 당해도 호소할 바 없는 자, 경향(京鄕)에서는 무단과 협박 때문에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는 자, 경외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 영(營). 읍속(邑屬)들의 무랑무뢰배, 영세농상인, 풍문만을 듣고 뛰어든 자, 부채에 견디지 못하는 자, 상.천민으로 뛰어나 보려는 자 등 불평불만에 차있는 자.(취어,『동학난기록』)
나. 제1차 농민전쟁기-김시병:이들은 본래 양민(良民)인데 여러 지방관들의 수탈로 인하여 곤고함을 이길수 없었기 때문에 그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취회한 것이다. 그런데 지방관들이 회유하고 깨우치는 바를 알지 못한 채 이들을 동학도라 지목하여 병졸로써 위협하니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당을 지어 창궐함에 이르렀고 나아가 난역(亂逆)이 된 것이다.(『고종실록』)
다. 집강소 시기-황현:특히 사노, 역인, 역인, 무부(巫夫), 수척(水尺) 등 천인이 가장 즐겨 따랐다. 따라서(이들에게는) 양반. 사족이 제일의 적이 되었다.(『오하기문』)
라. 제2차 농민전쟁기-령목창(鈴木彰)(황해도의 경우):진정동학당, 일시적동학당, 위(僞)동학당(그 류가 자못 하는데 그 중요한 자는 중국인을 제외한 모든 외국인을 미워하는 자, 범죄자, 무직업으로 생계가 궁한 자, 지방관에 원한을 품은 자, 사금채집광부 등)(『황해도동학당정토략기』)
바. 농민전쟁 종식 후-오지영: 여러 가지의 불평으로서 몇 백년을 두고 내려오던 상민, 노비, 서자 등 불평을 가진 사람들이 비로소 동학의 손을 빌어 일시에 폭발하였던 것이다.(『동학사』)

이처럼 농민군 참여자들에 대한 당시대인들의 시각은 단순하지 않다. 개개인에 따른 시각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주목한 농민군 참여세력도 단일하지가 않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농민군의 참여세력이 농민전쟁의 진행단계에 따라 시기적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농민전쟁 초기단계의 농민군 구성에 주목한 어윤중은 ‘평.평민과 그 외에 평민이상을 포함하였을 불평불만에 차 있는’ 다양한 계층이 농민군을 구성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집강소기의 농민군 구성에 주목한 황현은 천민이 농민군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하였고, 농민전쟁 종결시의 농민군 구성에 주목한 것으로 보이는 오지영 역시 상민, 노비, 서자들로 농민군이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농민군은 농민전쟁 초기의 다양한 구성에서 집강소 운영기를 계기로 평.천민계층으로 집중되어가는 변화를 보인 것 같다.

4. ‘유생(儒生)’의 참여를 통해 본 농민전쟁 주도세력
여기에서는 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여러 계층 중에서 농민군의 원정서(願情書)‘를 올린 ’유생‘들의 참여양상을 농민전쟁의 전개양상과 관련하여 살펴보려 한다.
보은취회에서 보듯이(이 때 농민군의 창의문은 ‘동학창의유생’이라는 이름으로 올려졌다.), 19세기 말엽이후 꾸준히 문란한 사회질서의 개혁에 대한 의지를 펼쳐온 유생들이 농민전쟁 참여 흔적은 그들이 올린 원정서를 통해 추적해 볼 수 있다. 농민 전쟁기 농민군을 대표하여 ‘유생’의 이름으로 보내진 원정서는 모두 세차례 이다. 이 원정서들이 보내진 일시, 장소로 보아 유생참여자들은 전체 농민군과 행동을 같이 하고 있었고, 그런 가운데 일정 정도의 유교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원정서를 통해 당시의 정치, 경제적 폐악의 시정을 요구하는데, 이는 실제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들로 전체 농민의 생계에 긴급한 문제였다. 제 1차 농민전쟁기에 있어 농민군이 해결을 요구한 절실한 문제는 바로 열악한 정치, 경제적 상황이었으며, 이 문제에 관한 한 농민군에 참여한 제계층이 공동으로 지니는 문제였던 것이다.
농민군에 참여한 제계층의 이와 같은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무장봉기의 1차적인 공동의 목적을 ‘열악한 정치, 경제적 상황의 타파’에 두게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기간에 농민군이 신분타파의 의지조차 가지지 못하였던 것은 아니다. 농민군은 이때에도 신분타파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이 봉건신분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적극적인 형태의 것을 표출되지는 않았다. 올바로 행해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봉건정치권력과 양반신분에 대한 농민군으 l인정은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준다.(예컨대 사민(士民)의 수성(守成)을 인정한 함평(咸平)의 경우, 수령의 치적을 인정한 함열(咸悅)의 경우) 이처럼 1차 농민전쟁기 신분타파가 아직 1차적 목적인 목적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생참여자들과 전체농민군으 l'행동으로 드러난 지향점‘은 열악한 정치, 경제적 상황의 타파라는데 일치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유생참여자는 농민군내에서 일단의 중심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생들의 농민군 참여는 집강소 운영체제로 농민전쟁이 진행되면서 변화를 가지게 된다. 제 1차 농민전쟁을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개읍에 12개조의 폐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때 농민군ㅇ느 제 1차 농민전쟁에서 확인된 자신들의 힘을 근거로 앞서의 정치, 경제적 개혁에 더하여 ‘신분타파’를 위한 일단의 움직임에 착수하였다. (이는 농민군의 구성에 있어 평, 천민의 편입을 강요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제 농민군은 집강소 통치를 통해 신분질서의 타파를 포함한 ‘봉건질서 자체의 부정’을 표방하게 된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농민군의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유생참여자들은 한번 더 정치, 경제적 개혁을 요구하는 원정서를 올려 ‘문란한 봉건질서의 개혁’이라는 자신들의 기본적인 입장을 확인시키고 있다. 그러나 집강소 통치를 통해 표방된 농민군의 신분타파 지향의 의지는 유생참여자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을 계기로 하여 상승되어 갔다. 즉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은 농민군의 남원대회를 불러왔고, 농민군은 남원대회를 통해 ‘역모(逆謀)’로 인실될 정도(황현, 『오하기문』)의 집강소 통치권 강화를 도모했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이제 농민군의 신분타파운동은 ‘대(對)일본투쟁’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면서 가속되어 갔다.
이처럼 농민군의 활동이 자신들의 통치권을 확대 강화하고 봉건질서를 부정하는 신분타파운동으로 집약되면서, 유생참여자들의 활동은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집강소 운영 초기에 올린 원정서가 의미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문란한 봉건질서의 개혁’이라는 사회개혁에 대한 유생참여자들의 지향이 집강소 운영기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과 그들이 정치, 경제적으로 핍박받는 사람들이면서도 봉건적 신분타파에는 공감하지 못하고 몰락양반이었다는 점으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평민과 천민이 주로 이룬 집강소 운영기 신분타파운동을 전개하는 등 ‘봉건질서의 부정’으로 확립되어 간 반면, 봉건신분질서 안에서 양반층에 속해 있었던 유생참여자들의 지향은 처음부터 ‘문란한 봉건적의 개혁’에 있었고 이후에도 커다란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집강소 운영기를 기점으로 변화된 농민군의 지향과 이에 따른 평,천민계층의 편입강화로 이제 농민군의 주도세력은 평,천민으로 대체되어 갔고, 변화된 지향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필연적인 귀결로 유생참여자들은 농민군의 중심세력에서 일탈되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5. 결론
이상의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부민란으로 시작된 갑오농민전쟁의 지향은 집강소 운영기를 거쳐 커다란 성격 변화를 가지게 된다. 이에따라 농민군 주도세력 역시 변화를 보였다고 생각된다. 제 1차 농민전쟁기에는 당시의 열악한 정치, 경제적 조건에 불만을 지닌 단일하지 않은 여러세력이 참여하는 가운데, 몰락양반이 일단의 중심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강소 운영을 통해 농민군의 지향이 신분타파 등 ‘봉건질서부정’으로 확립되어 갔고 이에 따라 평.천민계층의 편입이 강화되면서, ‘봉건제 부정’이라는 ‘혁명성’을 담보한 평,천민층이 농민군의 주도세력으로 재편성되고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몰락양반 계층은 중심세력에서 일탈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의 구성원에 대해 언급한 당시대인들의 시각이 시기에 따라 변화되고 잇는 것에서도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와 같은 결론은 ‘유생’들의 농민군 참여양상만을 근거로 얻은 것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농민군의 주도세력 연구에 선행되어야 할 농민 농민군 주도세력 연구에 선행되어야 할 농민군 참여세력 연구를 위한 한 시도였다는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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