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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2 | 칼럼·시평 [시]
지게꾼 친구 이야기
이용범 시인, 백산고 교사(2004-01-29 16:57:51)

지게꾼 친구 이야기
이용범 시인, 백산고 교사
“야, 요즘 작품활동하냐?”
나처럼 게으른 글쟁이에겐 이 물음이 나를 가장 옥색하게 한다. 그때마다 어눌해지는 목으로
“셔터 반쯤 내려져 있어요. 밀까 땡길까 생각중입니다.”
작년이었다.
추석연휴가 끝나고 밤 늦게까지 혼자 교무실에 있었다. 평소 밑천이 딸리는 나로선 다음날 수업준비로그 무렵 학교 전기세 깨나 축냈다. 전화가 왔다. 하숙집 아저씨였다.
교무실을 빠져나와 일그러져가는 달에다가 친구놈들 얼굴ㅇ르 그려 넣었다. 한 놈은 내 고향 줄포에서 ‘차부뒤께 지름집 아들’이 명함이고 다른 한 놈은 털털하고 생김새가 하도 걱정스러워 별명이 ‘꺽정이’인 성호였다. 꺽정이는 부랄친구였다. 어쩌다 고향에 가면 성호를 찾았다. 내겐 끝내주는 첩(?)이었기 때문이다. 그 놈을 만나면 그렇게 몸과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떠났었다. 고향 줄포를, 나라를 떠나 머나 먼 사막 리비아의 막노동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론 고향엘 가도 한 쪽 구석이 허전했다. 또 얼마나 지난 후엔 서울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분간 이 나라에선 그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펐고 아프기까지 했다.
그리고 보고 싶었던 꺽정이가 내 하숙집에서 기다린다는 것이다.
밤 새도록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리비아 모래 밭에서 잡역 일꾼으로 번 돈을 꼬박꼬박 집으로 송금했었다. 그가 다걀이 햇볕에 익는다는 사막에서 꼬박 2년을 익히고, 고국행 비행기 안에서 꽤 기반이 잡혀 있을 가게(집)을 가슴 차 오르는 보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환상이었다. 막상 돌아와 보니 빚더미에 쌓여 가게조차 내놔야 할 형편이었다. 빚을 정리하고 친구네는 다시 거리에서 장사를 시작해야 했다. 그는 다시 떠났다. 서울로. 이번에는 식구들과 함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 바닥에서 식구들 밥벌이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결국평화시장의 지게꿈이 되었다. 하루 거의 열대여 시간씩 지게를 지면서 처음 몇 달간 많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그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들었다.
“겨울이었어. 서울의 겨울은 겁나게 춥도마. 자, 한 잔씩 또 들자!”
다시 추위를 잊으려는 듯이 잔을 비운 그는
“한데 평화시장 장사꾼놈들은 지게꾼 돈 주는 게 아까워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었다. 근데말야 그 가계가 얼마못가 고장이 났어. 짐이, 짐이 원청 무거워서 말이다. 그래서 그 노랭이 장사꾼놈들도 지게를 쓰지 않고 모두 지게꿈이 다시 지게 됐지.”
“그러면 기계도 무거 못 견뎌 포기한 짐을 너희 지게꾼들이 진다 그 말이지?”
“ 야, 말도 마 내가 힘께나 쓴다지만 그렇게 무거운 짐을 거기서 첨 져봤다. 그것보다 눈물나던 일은 그 추운 겨울날 잠깐씩 불을 피우며 쉴 때면 어느새 알고 왔는지 단속반들이 난리법석을 피우는 거여. 도시 미관상 안좋다고 사정없이 족치는 거여. 내참 드러워서 원.”
“그럴수가 있어! 자기들도 고생하는 줄 뻔히 암서. 어떻게 사람들이 그래!”
자못 흥분한 내게 그는 잘못한 아우에게 타이르듯한 어른스런 목소리로
“진정해라 진정해. 훈장님이 화내면 내일 애기들 지장 있승게.”
멀리서 개짖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한동안 아무도 말을 없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개가 그렇게 팍팍한 세상만 사는 것은 아니여. 요즘 내가 보람을 얻는다. 평화시장 지게꾼으로써 보람을. 우리 지게꾼 중에 장달준이라는 반백노인이 있는데 한줄 장님이드라고 신문을 못 봐요 글쎄. 그래서 내가 눈을 뜨게 하는 중이여.”
새벽녘에 그는 다시 갔다. 그의 일터 평화시장으로.
그는 평화시장에서 지게꾼 장달준의 눈을 뜨게 하고 그날 나의 눈을 뜨게 하려 온 것이다.
반쯤 내려진 셔터문을 올려주러 온 것이다.

이 시는 그렇게 쓰여진 글이다.
한동안 망설이기도 했다.
지게를 지는 그들에게 또 다른 짐이 되면 어쩌나 해서.
앞으로 ‘장달준’에 이어 옹골지게 자기 삶 져가는 지게꿈 친구 꺽정이 이야기를 써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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