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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2 | 연재 [문화저널]
겨울 나그네 길
박남준 시인(2004-01-29 16:57:24)

19. 오지 않는 이
언제 내가 기다리지 않은 적 있었는가
언제 내가 나의 깊은 잠, 꿈결 속에서 조차 당신 생각 떠난적 있었는가
언제 내가, 우우… 언제 내가아, 언제 내에가아, 우 우 우 …
그리지 않은 적 있었는가 원망한적 있었는가
오지 않는 이여! 들리지 않아요? 대답 없는 이여!

20. 황천길
황천길, 작은 거인이라는 애칭이 붙은 가수 김수철의 작곡집 황천길이 들려 오면 그 때마다 문득 문득 집에 가고 싶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 이제 나는 아버지! 불러불 수 없구나. 달려가 껴안을 사람 없구나. 울기도 울기도 많이 했었지. 법성포구 흰눈 펄펄 내려 뻘밭처럼 질척이던 날 고통스런 폐암의 바튼 숨 끝내 토해내지 못하시고 당신, 먼길 황천길 떠나셨지요. 눈 못 감고 눈 못 감고 오지 않는 이들하나 끝내 보지 못하고

21. 어린 쑥 한뿌리
쑥개떡, 쑥버무림, 쑥인절미, 쑥차, 쑥송편, 된장을 풀어 넣어 상큼하게도 끓여 내는 봄날의 시원하고도 향기로운 쑥국. 지혈제로, 뜸의 재료로, 어디 쑥처럼 우리 민족의 삶 이곳 저곳에 요긴하게 쓰이는 풀도 없을 것이다. 지천으로 널려 이 나라 땅, 그 어디를 가보아도 무리지어 자라나는 쑥, 이 민족의 질기고도 질긴 삶을 닮아 뽑아도 짓밟아도 억척스럽게 살아 돋아나는 눈물겨운 풀이다.
고마운 풀, 어찌 너를 업수이여겨 함부로 덤부로 뽑아 내버리겠냐만 제발 덕분에 이 곳에서는 자라지 말아다오. 남들 다가는 추석 명절에도 성묘 갈 수 없었다. 상강 입동 다 지나서야 쓸쓸히 찾은 무덤가. 버럿 몇 번을 뽀아 냈는데도 여기저기 수북히 자라 돋은 모질구나 쑥들아… 다 뽑아내고 뽑아 내는 그 한귀퉁이에 어쩌자고 이 추운 날 새순을 틔운 어린 숙 한 뿌리. 울아버지 가시던 길에 쑥뜸 한번 하며 매달리셨는데 그래 너마저 어찌 뽑아낼 수 있겠느냐. 살아 있거라 푸르게 푸르게 이 겨울 살아나서 홀로 누운 울아버지 말동무가 되고 됐으면…… 묘비 하나 아직 세워두지 못한 아버지의 무덤 멀리 북쪽에 남겨두고 고개 떨구며 고개 떨구며 뒤돌아섰지.

22. 겨울포구
눈발은 좀처럼 그치지 않아요. 깊은 밤에서 시작한 눈발은 한낮이 다 가도록 그치지 않아요. 추억처럼 폐선이 뒹구는 포구의 뻘밭 그 구불구불한 수로를 따라 우울한 서해바다가 폐수처럼 밀려드는 저녘 무렵 눈발에 잠긴 적막 강산. 작은 포구의 갯가에는 이런 소줏잔 기울일 사람이 그리워요.

23. 겨울포구
죽음으로 가는 고통 결에 서면 문득문득 지난 사랑 배어옵니다. 막스 부르흐, 콜리드라이 작은 포구의 겨울은 황량하고도 우울합니다. 마치 첼로의 그것처럼 연 삼일을 두고 눈은 그치지 않는데 무릎 근처까지 차 오르는 눈길 속에, 눈부신 눈빛 속에 아름다운 사람들의 얼굴, 떠오르고 자꾸 흐려집니다.

24. 겨울 나그네 길
바다로 난 길을 따라 누군가의 죽음 하나 떠나가요. 어나어.. 나 꽃상여를 따라 슬픈 상여소리 울리며 너우 너울 하얀 종이꽃이 바람에 날려요. 빌헬름 뮐러 슈벨트는 뮐러의 시를 보고 가곡, 겨울 나그네 길을 만들었다지요 상여가 떠나는 겨울 포구의 길, 이런 겨울이었을까요. 겨울 나그네 길은

25. 겨울비
세상은 왜 이리 눈물만 나는지
속절없이 쓰러져 쓰러져 울며
당신께 보내는 나의 눈물방울
뚝 뚝, 아.. 흐를 길 없는

26. 겨울비
그대 앞에 엎드려 울고 싶다
숨죽이지 않으리라
소리내어 목을 놓아
통곡으로 울고 싶다

27. 동짓 밤
당신 오지 않고 잊어야지 잊어야지 돌아 눕는 그 다짐 비집고 들어오는 배갯머리 젖는 그리움. 어쩌면 당신 지울 수 있을까요 내 절망같은 사랑, 동짓밤 그 길고도 깊은

28. 겨울, 하동포구
보이지 않네 이제 더 흐를 길 없네. 먼 산들을 흘러 돌아온 섬진강의 그 긴 산고를 풀어놓은 하동포구. 섬진의 강어귀에 반가움처럼 맞아주는 따뜻한 겨울 햇볕 속에는 맑은 강물에 비쳐오는 그리운 이의 얼굴 눈부셔 눈물겨워 피어오르는데 이대로는 떠날 수 없네. 허기를 메우려 들어선 포구의 간이주점 한 그릇의 재첩국도 목이 메어 뜰 수 없네

29. 모악에서 첫날 밤
얼마만인가 몇 해이던가 떠돌다 떠돌다 자리잡은 곳 모악. 모악에서 첫 밤을 보냅니다. 이게 내방인가 생각하니 소금끼없는 수제비도 굶주린 뱃속을 편안하게 하는 모악의 밤은 깊어 방 앞을 흐르는 물소리가 캄캄어둠을 가릅니다. 아! 이제 내 소원 하나 있다면 이 밤. 꿈길. 모악의 저 너머 백두며 지리산 그리운 당신 훠얼 훨 달려와 첫날 밤 얼크러져 뒹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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