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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2 | 연재 [사람과사람]
부안사랑 청년회
지역문화 건설, 새날을 여는 이들(2004-01-29 16:56:38)


‘부안’이라는 지명보다는 변산반도로 더 잘 알려진 땅. ‘앉으면 죽어서 백산’ 녹두장군과 함께 떨쳐 일어선 동학 농민들의 땅에 『부안사랑 청년회(회장:이재영, 이하 ‘부사청’)』라는 건강한 부안 문화의 건설과 우리의 새날을 여는데 함께 걸어가는 건실한 청년들의 모임이 있다.
『부사청』은 “부안군민주운동연합(이하 ‘부민련’)” 사무실 내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다. 부민련은 농민 단체인 ‘부안군 농민회’ 참교육을 실천하는 ‘전교조 부안지회’ ‘목회자 정의 평화 실천 협의회’로 구성된 민주 단체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 비추어진 청년들의 모습은 유흥과 환락, 술, 담배, 선정적인 영화 등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부안이라는 군 단위 지역에서 이러한 퇴폐적인 문화에서 벗어나 청년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세대적 특성 즉, 청년대중의 정의감, 용감성, 왕성한 활동력, 사상적 진취성을 살려 건강한 문화를 창출하고 민족 민주 변혁 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지금의『부사청』이라는 조직이 생기게 된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다.
현재 남한 사회에 ‘나라 사랑 청년회’ 등을 비롯하여 50여개가 넘는 청년 조직이 세워졌고, 이에 대응하여 부안지역에서도 청년 모임을 준비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지금의 부민련을 보면 그 동안 함께 일해오던 사람들 중 농민들은 ‘농민회’ 교사들은 ‘전교조’ 목회자들은 ‘목정평’이라는 조직들이 꾸려짐으로써 활동하기에 좀 더 활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일해오던 청년들은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리하여 부안 지역에서의 청년 모임이 자연스럽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89년 12월부터 꾸려지기 시작한 활동가들의 학습마당 “민주교실”을 꾸려 내면서 청년 모임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이에 따라 90년 5월 5일 뜻 있는 2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광주 망월동 민주 열사의 성지를 참배하고 지리산 심원에 들러 1박을 하면서, 부안지역 청년 모임을 제안, 필요성을 공유하고 구체적인 활동 방향을 계획하였다. 아울러 힘있는 다수가 되기 위해『(가칭)부안사랑 청녀노히 준비 위원회』를 띄우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부사청은 소모임 위주로 사업을 풀어 가기로 하고 지금의 네 개 마당을 이루게 된다.
현재 활동이 가장 잘되고 있다는「역사탐방 마당」은 지나온 역사는 후손들에 의해 만져지고 다듬어 져야 한다면, 왜곡된 교과서적 역사 교육수준에서 벗어나 척박한 땅으로 알려진 전라도 땅 부안에 있는 유적지 곳곳을 현지 답사를 통해 그 곳에 숨어있는 진실을 밝히고 배우는 마당이다.
회원들이 가장 어려워 한다는「시사토론 마당」은 각종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느 정보가 정확하고 올바른지, 그리고 어느 것이 정론이고 곡필인지를 모르게 하는 현실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좀 바르고 정확하게 각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신문 사설 읽기’ ‘매월「말」지 보기’를 강조하고 있으며 현대사와 국내, 국제 정세까지 공부하는 즉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학습하고 토론하는 마당이다.
영상 마당은 이 땅의 외세 문화와 천박한 퇴폐문화, 지배자들의 편에 선 그릇된 문화를 거부하고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여 우리의 시각을 흐리게 하는 영상 문화를 철저히 거부하고, 이 땅위에 참된 영상 문화의 실현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모임이다.
여성 회원으로만 이루어져 있는「풍물.노래마당」은 무분별하게 밀려드는 외래문화와 불건전한 대중 가요에 흠뻑 젖고 익숙해져 버린 안타까운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잊혀져 가는 우리 민족의 정서, 삶을 담은 우리의 노래, 놀이를 다시금 찾아 느끼게 하고 발전, 홍보 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모인 마당으로 단순한 기능 위주의 풍물만이 아닌 우리 가락의 변천사 등도 함께 공부하고 있다.
『(가칭)부사청 준비위』는 칭립 때까지 위 네 개의 마당 모임과 전체 모임을 통해서 봄, 가을 농민들과 연대사업으로 보리베기, 모내기 지원 및 벼베기 등의 사업을 통해 농촌의 현실을 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90년 8월에는 의료 시설이 부족한 섬마을 위도로 3박 4일간의 수련를 통해 참된 의료 실현을 위한 ‘청년 한의사’들과 함께 진료 활동을, 10월에는 ‘공해 추방 캠페인’으로 국립공원 내변산을 등산하면서 오물 제거 사업을 펼쳤다.
그러던 12월 뚜렷한 공간이 절실히 요구되어 부민련 공동사업으로 서화전을 개최하여 사무실 마련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여 현재의 부민련 사무실을 마련했다. 이러한 사업들을 통해 척박한 토양에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결실을 바라는 농부의 심정이었을까?
91년 2월 2일『(가칭)부사청 준비위』는 많은 시행착오 끝에 여러 단체들의 축하와 환영을 받으며 창립총회를 갖게 되었다. 이로써 정식으로『부안사랑 청년회』가 탄생한 것이다. 이 땅의 회원수는 30명이었다.
『부사청』은 창립을 하면서 곧이어 3월 지자제 선거에서 부사청 회원이면서 부민련 사무국장인 고영조님을 출마시켰다. 이때 청년 회원들은 “민주 후보, 농민 후보 고영조를 군의회로”라는 구호를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외치면서, 무보수에 자발적으로 도시락까지 지참하면서 고영조 선거 사무 운동원에서 온힘을 다해 일했다. 그러나 결과는 안타깝게도 낙선이었다.
『부사청』은 3월의 지자제 선거를 치루고 나서 느낀 것은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면서 청년 모임으로서의 색채를 잃지 않는 일이었다. 즉, 지역 사회에서 깊이 뿌리 내릴 수 있고 현실적으로 유화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부사청』청년 개개인은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모임을 이끌어 가면서 부안 사회 발전과 함께 할 수 있어야함을 깊게 인식했다.
『부사청』은 ‘청년’이라는 공통점 외에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만큼 생각을 함께 공유한다는 점이 어렵다. 부안이 좁은 지역인 만큼 또한 민주 교실에서 배출된 회원들이 많기 때문에 친목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기능을 익히기 위해 청년회에 들어온 회원이 있고 사람을 사귀는 목적으로 가입한 회원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묶어서 통일된 목적의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학습과 사업을 통해 친목 단체의 성격에서 탈피하고, 지역 사회를 고민하고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 문제를 걱정하는 청년 조직으로 발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동안 부사청에 몸담은 청년들은 50여명이 넘는데 그 주 20여명이 빠져나가 현재에는 30여명의 회원수를 유지하고 있다. 탈퇴의 원인을 알아 보자면 여청년들의 결혼 후 남편따라 생활 근거지를 타지역으로 옮겨지는 경우와, 먹고사는 문제로 본의 아니게 도시로 직장이 옮겨지는 이유가 대부분이라 한다.
『부사청』은 소수 학생 운동과는 분명 그 성격이 다르다. 지금까지 청년의 움직임은 대중적 사회 움직임으로 진출이 막혀져 있었다. 즉, 대다수 청년들은 현실의 인식과 조직 생활의 경험없이 무비판적으로 기존 사회 구조에 속하게 되는 실정이었다. 이에 청년 자신의 자각이 필요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의 기술, 지식, 열정 등등을 살려 대중에게 봉사 할 수 있는 차원에서 청년 모임이 요구되는 것이다. 더불어 청년들의 건강한 문화 창출에 요구되는 차원에서라도 『부사청』은 현실의 요구에 맞는 진보적인 집단이라 할 수 있겠다.
『부사청』은 양심있는 개인으로 남기보다는 힘있는 다수가 되고자 뭉친 청년들의 모임이므로 갈 길을 몰라하는 부안에 거주하고 있는 청년이라면 어느 누구든지 함께 하고자 하는 뜻만 있으면 환영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
오늘은 『부사청』은 한사람이 열걸음 앞서가는 것보다 열사람이 한걸음 발전하는 부안 지역을 만들고자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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