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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8 | [문화칼럼]
신비평(New Criticism)
이종민․문화저널 주간, 전북대 영문과 교수 (2004-01-29 14:47:59)
우리 문학과 신비평 우리는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너무도 진부한 말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신비평(New Criticism)'이라는 말에 접했을 때 쉽게 떠올림직한 비유이다. 우리의 문학적 숨쉬기가 신비평적 대기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현재문학의 출발이 영미신비평의 영향권하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물론 과장이다. 그러나 적어도 해방 후 우리의 문학적 풍토 조성에 이것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들의 문학적 무의식속에는 이 비평의 강령들이 강인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다양한 비평적 흐름의 하나가 결코 아니다. 최근에 이르러 여러 다양한 현대문학이론들이 소개되기 전까지만해도 그것은 보편원리로서 우리의 문학적 의식 무의식을 지배했던 것이다. 이는 다른 학문의 영역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편향이다. 미군정 이후 미국식 학문적 방법론이 소개되면서 그것은 학문의 보편원리로 우리 학문위에 군림했다. 그것은, 그것을 떠나서는 숨쉴 수도, 헤엄칠 수도 없는 물과 같은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있을 수도 없고, 있다해도 그것은 학문의 본령과 무관한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한국학’에 대한 관심의 고조도 사실은 그 소재에 한정된 것이지 그 방법론 자체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 풍수지리학이 대학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선정적인 매스컴의 화제거리 정도로 전락(?)하고 만 현실이 바로 우리 학문적 풍토의 부인할 수 없는 현주소인 것이다. 우리의 영문학은 물론 국문학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도 신비평의 원리는 눈에 띄지 않는, 그러나 강력한 힘을 지닌,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우리 문학에 대해 일정한 수련을 받았다고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서건 공공기관의 제도적 교육을 통해서건)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조차 그 답을 헤아리기 어려운 많은 국어시험 문제에서도 신비평의 ‘이데올로기’는 쉽게 확인된다. 중등학교 국어 참고서의 대부분이 이러한 배경속에 만들어졌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우리가 신비평을 하나의 보편원리로 전제하지 않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앞서 지적한대로, 최근 다양한 현대문학이론들이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이전에 살펴본 러시아 형식주의를 비롯, 구조주의, 맑시스트비평이론, 독자반응비평, 탈구조주의 등이 상당 부분 신비평에 대한 문제제기를 그 내용으로 포함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가면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철지난(?) 비평이론을 「독자를 위한 ‘현대’문학이론 입문」에 포함시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는 이 비평원리의 중요한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몇몇 개념들을 중심으로 그 핵심적 내용과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겠다.) 역사적 배경 신비평은 말 그대로 ‘새로운’비평이다. 물론 그것은 모든 ‘새로운’ 비평적 경향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한 비평이론을 가리키는 역사적 개념이다. 그것은 크게는 19세기의 낭만주의적, 인상주의적 혹은 주관주의적 비평에 반발했던 I.A. 리차즈(Richards)나 T.S. 리비스(Leavis), 윌리엄 엠프슨(William Empson) 등 영미를 중심으로 발달한 객관론적 비평 경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들의 노력은 “과학이 지식을 판단하는 지배적인 기준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과학 자체가 내세우는 엄격한 기준들에 부합하는 엄정하고 객관적인 원리에 입각한 문학비평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문학을 과학과 혼동한 것은 아니다. 리차즈에게 있어, 현대과학은 진정한 지식의 모범이지만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있다. 과학은 ‘어떻게’의 문제에는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해답을 제공해주지만 ‘무엇을’ 그리고 ‘왜’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들의 요구는 충족시키지 못한다. 시는 ‘지시적(referential)'이라기 보다는 ‘정서적(emotive)' 언어에 의한 ‘유사진술(pseudo-statement)'를 통해 이러한 요구에 부응한다. 과학에 상처받은 종교는 더 이상 흐트러진 인간정신의 균형을 잡아주는데 기여하지 못한다. 시(문학)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시야말로 “혼돈을 극복할 완벽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가 다시 엄정하고 객관적이기를 요구하는 과학에 상처받아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과학시대에 맞는 객관적 문학이론의 정립이 필요한 것이다. 리차즈의 노력은 바로 문학비평에 엄격한 ’과학적‘ 심리학의 원칙이라는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엘리어트나 리비스, 엠프슨 등도 공히 문화비평을 어엿한 학문의 한 분야로 정립하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경주한 사람들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상이한 점들이 적지 않지만, 작가의 전기적 사실 및 심리와 문학사 등 작품 이외의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집중에 반발하여 작품 자체를 중시하며 객관적 비평원리를 세우기 위해 힘쓴 ‘새로운’ 부류의 문학이론가들이라는 점에서는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신비평’은 일반적으로 이들의 영향을 받아 특히 미국의 남부를 중심으로 발전한, 193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까지 번성했던, 비평 경향을지칭한다.그 대표적 인물로는 『신비평(The New Criticism)』(1941)을 출간하여 이 용어가 널리 통용되는 데 기여한 존 크로 랜섬(John Crowe Ransom)『시의 이해(Understanding Poetry)』(1938)라는 유명한 교재를 통해 ‘신비평’을 미국 대학은 물론 중등학교까지 확산시킨 크리앤스 브룩스(Cleanth Brooks)와 로버트 펜워런(Robert Penn Warren) 이 밖에 앨런 테이트(allen Tate), R. P. 블랙머(Blackmur), 윌리엄 K. 윔저트 2세(William K. Wimsartt Jr.) 등이 있다. 이 문학운동의 중심지인 당시 미국의 남부지역은 경제적 후진 지역으로 전통적 혈통이나 교양 등을 중시하는 아직도 유기체적 사회의 징후를 다소 지니고 있던 곳이다. 당시 이곳은 북부 독점자본의 침입으로 급격한 산업화 과정을 겪고 있었으나, 아직 북부의 메마른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미적’ 대안의 예를 찾아볼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 남부의 지식인들은 산업화로 인하여 남부의 ‘미적인 삶’이 파괴되고 인간의 경험이 그 감각적 구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현실에 화가 났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시(예술)에서 그 구원의 가능성을 찾았다. 사물의 ‘감각적 온전성’을 중시하고 이를 보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시에서 산업화, 혹은 자본주의화로 인한 피폐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시는 일종의 새로운 종교로서 ‘산업자본주의의 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향수어린 피난처’이다. 시는 자족적인 객체로서 합리적 탐구를 거부하는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것은 자기 이외의 다른 말로 풀이될 수 없으며 각 부분은 복합적인 통일성 속에서 다른 부분들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이러한 유기적 통일성을 깨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에 해당한다. 결국 신비평은 이글턴의 지적처럼 ‘자신들이 현실속에서 세울수 없는 것을 문학속에서 재창안해 놓은 뿌리 뽑히고 방어적인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향수어린 남부의 유기체적 공동체 사회가 과학적 합리주의를 내세운 북부의 산업기술주의에 의해 와해되는 마당에 이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의 모색 보다는 ‘기술주의에 소박한 유머니즘을 더한 미적 대안’에 안주하려 했던 지식인들의 자기 방어적 태도의 산물인 것이다. 의도론적 오류/영향론적 오류 시를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객관적 대상으로 간주하여 객관적 비평을 강조하는 신비평가들은 ‘의도론적 오류(Intentional Fallacy)'는 물론 ‘영향론적 오류(Affective Fallacy)’도 경계한다. 의도론적 오류란 작품을 쓴 작가의 의도, 의식적 구상 또는 목적에 관련시켜 작품을 해석하거나 평가하려는 잘못을 가리키는 말이다. 작가의 명백한 진술을 통해 드러난 것이든, 그의 생애나 의견 등에 대해 알려진 것들로부터 우리 스스로가 추론한 것이든, 그 의도는 문학 비평에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작품의 의미와 가치는 완성되고 독립적이며 공적인 작품 자체 안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만 말을 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본다면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이것은 위대한 시를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인 흘러넘침’이라 규정하는 낭만주의 시론과도 맥을 같이 하는 면이 있어 흥미롭다. 작품은 작가의 의도의 산물이 아니라 무의식의 산물이다. 작품은 작가가 영감을 받아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동기술한 것이다. 작가는 쓰고나서 ‘손이 아픔’을 느낄 뿐이다. 이 지적은 문학작품을 사회 역사적 산물로 간주하는 입장에서 볼 때에도 일견 타당성이 있어보인다. 작품은 작가의 구상이나 의도와는 별도로 당시의 객관적인 사회 경제적 조건은 물론 문학적 풍토의 규정성속에서 탄생한다. 그러니 작품의 의미나 가치를 작가의 의도와 견주어 살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영향론적 오류란 하나의 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평가하는 오류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런 경우 객관적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작품은 사라지고 결과적으로 비평은 인상주의 혹은 극단적 상대주의에 함몰되고 만다. ‘시는 시인의 의도나 시로부터 도출된 독자의 주과적 감정과 상관없이 그것이 객관적으로 의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평은 이 객관적 의미와 가치를 규명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래서 관심을 작품 이외의 것들로 확산시키지 말고 작품 자체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반응과 무관한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과연 상정할 수 있는 것인가? 작가의 의식적 의도에 입각하여 작품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하지만 작품이 탄생하게 된 주․객관적 조건을 살피는 것이 작품의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는 소박한 믿음의 유효성은 여전히 남는 것이다. 독자의 작품 읽기를 통해서만 그것의 의미가 생성된다는 주장도 분명 극단적이다. 그러나 독자와 무관하게 작품의 의미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 또한, 적어도 현대 해석학이론에 눈을 뜬 사람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환상이다. 아니 좀더 소박하게, 신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객관적 분석을 할 수 있는 비평가 또한 하나의 독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꼼꼼한 읽기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반응을 배제하려는 입장에서라면 의당 작품 자체에 대한 ‘꼼꼼한 읽기(close reading)'를 강조할만 하다. ‘순문학적 잡담’ 대신에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실질적 해부를 뜻하는 ‘실제비평(practical criticism)’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 개념은 ‘신비평’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동시에 그것의 가장 긍정적인 공적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작품 자체에 대한 세세한 분석적 해석을 의미하는 이 말은 ‘미학주의적 잡담에 대한 가치있는 해독제’를 제공해 준다. 신비평가들은, 작품 탄생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이나 배경, 작가의 의도 혹은 독자의 반응 등 작품 이외에 대한 관심 대신 작품 자체에 대한 주의의 집중을 요구한다. 이들은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의 복합적인 상호관계와 이로 인한 다의성(ambiguity)에 대한 상세하고도 미묘한 분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인상주의적 비평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이 개념 또한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킨다. 관심의 집중이 바로 관심의 제한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어라는 것이 사회적 산물임을 망각하고 있다. 이는, 언어라는 것이(그것이 문학적인 것이건 아니건) 다른 것들과 분리된 상태에서도 적절하게 연구될 수 있고 심지어는 이해될 수 있다는 환상을 조장하는 것이다. 문학작품이 그 자체로 온전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이러한 태도는 신비평의 성공적인 절정뿐만 아니라 그 결정적인 한계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재진술의 이단 신비평가들의 언어관은 언어를 지시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리차즈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논리적이며 지시적인 과학의 언어와는 달리 문학의 언어는 정서적인 것으로서 다른 말로 풀이(재진술)될 수 없다. 시는 진술이 아니며, 그 형식이 내용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식(혹은 구조)은 내용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그 핵심적 부분을 구성한다. 리듬, 톤, 비유 등 시를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내적 통일성을 형성한다. 이와같은 구조와 의미의 ‘유기적 통일성(organic unity)'을 무시한채 ‘시가 다른 말로 재진술 될 수 있다’고 믿는 견해가 바로 ‘재진술의 이단(Heresy of Paraphrase)’이다. 이러한 견해는 다시, 훌륭한 시는 ‘나무에 돋아나는 나뭇잎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낭만주의자들의 유기체적 시론과 맥을 같이 한다. ‘시는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할 수 없다’라는 상식과도 통하는 얘기이다. 시는 자기충족적인 완결체이기 때문이다. ‘꼼꼼한 읽기’가 필요한 것도 작품의 이러한 자기 완결적인 ‘유기적 통일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형식주의와의 차이 신비평은 꼼꼼한 작품읽기와 실제비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이론과 흡사하다. 그러나 몇가지 점에서는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상징주의에 반발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작가의 기술적 역량과 기교적 재주를 강조하여 그들을 ‘건축가, 기술자, 혹은 십장’으로 간주하는 반면 신비평가들은 예술의 신비적 불가침성, 예술가의 무의식적 영감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적 예술관의 연장선상에 서있다. 형식주의자들에게 있어 시인은 우리의 인식을 심화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독특한 예술적 장치들을 고안해내야 하는, 20세기 기계시대에 걸맞는, 장인(匠人)이다. 반면, 신비평가들에게 있어 시인은 20세기 과학기술문명으로 인해 흐트러진 인간정신의 온전성을 보호하고 산업자본주의로 인해 유실된 유기체적 사회의 회복을 위해 (현실적으로가 아니라 예술적으로 혹은 시적으로) 노력하는 미학적 전사’와 같은 존재이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는 그들의 문학성에 대한 규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있어 문학성은 언어의 ‘낯설은’ 용례에서 유래한다. 일상적인 상투적 표현에 의도적 폭력(변형)을 가함으로써 우리의 기계적 반응을 방해하여 인식을 심화시키는 것이 바로 문학의 목적이요 존재 이유이다. 반면 신비평가들은 문학언어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한다. 그들은, 과학의 지시적인 언어보다는 시의 정서적인 언어가 오히려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뇌성벽력을 들으며 그것의 과학적 원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낀다. 무지개나 황혼의 찬란한 모습을 바라보며 빛의 굴절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 탄복하는 것이다. 시는 바로 이처럼 자연스러운 정서적 반응의 소사이다. 신비평가들이 시작품에서 아이러니, 패러독스, 애매모호성 등에 주목하는 이유도 우리들 실제 삶이 그러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라는 담론은 어떤 식으로든 그 자체내에 현실을 포함하’는 것이다. 남는 말 이는 역설이다. 이들이 시의 내적 통일성 혹은 일관성을 강조할 때 그 말속에는 시가 현실과는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자율적 존재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은 문학의 의의를 현실과의 상응관계에서 찾는 것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낯설게 하기’를 통한 인식의 심화를 내세워 문학의 현실적 존재의의를 주장한 것처럼 이들 또한 현실과의 완전한 절연속에서 문학의 의의를 찾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즉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만 문학의 의의가 규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현실적인 삶과의 연계를 꾀하는 것이 바람직스러운 것이 아닐까? 어정쩡하게 예술지상주의 혹은 ‘예술을 위한 예술’론에 빌미를 제공해주느니 말이다. 이 점이 이들의 역사적 한계와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신비평은 분명 문학교육의 대중화 혹은 민주화에 기여했다. 적어도 그것은 특수한 문학취향을 지닌 사람들만이 신비스럽고 내밀한 지적, 심리적 과정을 통해 비평활동을 할 수 있다는 그 이전의 신화를 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서정시나 단편소설만을 주 분석대상으로 삼았으며, 지나치게 고급 문화를 선호하였고, 제도권화함으로써 유연성을 상실하였으며, 천편일률적인 시분석과 해석으로 참신성을 잃고 말았다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신비평이 미국 강단에 잘 먹혀들어간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를 살피는 것은 신비평이 갖는 역사적 한계, 특히 우리의 문학풍토와 관련하여 자못 의미심장하다. 어떤이는 미국 문화(문학)의 전통부재를 그 이유로 지적한다. 이글턴은 이에 관련하여 두가지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다. 첫째는, 신비평이 급격히 늘어나는 학생수를 감당하기에 편리한 교육방법을 제공해주었다는 점이다. 작품 이외의 것에 대한 관심은 많은 노력과 시간의 소요를 요구한다. 더구나 신비평이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짧은 시들이다. 이점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한 영문학자가, 우리 영문학계에서 신비평이 맹위를 떨치는 이유를 그것의 용이함에서 찾았던 것도 새겨봄직한 일이다. 두 번째로 이글턴이 지적하고 있는 내용도,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신비평이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실과 견주어 볼 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시를 상충하는 태도들의 미묘한 균형으로, 대립하는 충동들의 사심없는 화해로 보는 신비평의 시관은 상충하는 냉전의 도그마들에 의해 방향을 상실한 회의적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인 것이 되었다. 신비평적으로 시를 읽는다는 것은 아무것에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가 가르쳐주는 것은 어떤 특별한 것을 침착하고 사색적으로 그리고 아주 공명정대하게 거부하는 태도인 ‘사심없음’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시는 정치적 무기력을 빚는 비방(祕方)으로 현재의 정치적 상태에 복종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대립물들은 결국에 가서 조화롭게 융화될 수 있는 한에서는 허용되었다. 신비평의 한계는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였다. 랜썸은 시는 ‘말하자면 시민들의 개인적인 특성을 희생하지 않고 국가의 목적을 실현하는 민주주의 국가와 같다’고 쓰고 있다. 남부의 노예들이 이 주장을 어떻게 생각했을지가 흥미롭다.” 다원주의를 표방하여 탈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현대의 다양한 문학이론들의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지적이다. 결코 새롭지 않은 ‘신비평’을 왈가왈부하는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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